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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시나브로 ‘아비의 시대’는 가고

by 낮달2018 2019.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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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녕의 맏이, 결혼식에 다녀와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조차 잃은 아이는 씩씩하게 두 동생을 거두며 이번에 새로 가정을 꾸렸다.

미라가 시집을 갔다. 2008년 아버지를 잃고 올 4월에는 어머니까지 잃고 두 동생을 거두어야 했던 고 장성녕 선생의 맏이 미라가 결혼했다. 아랫도리를 벗고 지내던 시절부터 보아온 아이고 자라는 과정에서 아이의 심덕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혼인 소식에 반색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2008. 2. 14.)  지아비와 함께 편히 쉬시라(2012. 5. 1.)]

 

지난 4월, 제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아이의 곁을 지켰던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냥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여러 가지 궂은일 마다치 않던 친구였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그 친구에게 덕담을 건넸었다. 어쨌든 이른 시일 안에 국수를 먹게 해 주게나.

 

죽은 부모는 청첩장에도 못 오른다

 

그리고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한가위를 쇠고 어떻게 사나 싶어 전화했더니 아이는 11월쯤에 결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어찌나 반갑던지 바로 남은 ‘2장 1박’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청첩장보다 먼저 아이의 전화가 왔고 이내 가르쳐 준 주소로 청첩장이 왔다.

 

청첩장 내용을 살피는데 아이 혼주 난에 오른 이름이 낯설다. ‘아무개의 조카’. 아, 장성녕의 형님인 모양이구나. 양친이 계시지 않은 신랑 신부의 혼주는 마땅히 아버지 형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쩐지 그 낯선 이름 옆에 오른 아이의 이름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죽은 어버이는 자식의 청첩장에도 오르지 못하는구나…….

▲ 아이가 보내준 청첩장. 거기 박힌 혼주 이름은 고인의 형이었다.

아이는 밀양에 살고 있지만, 예식은 김해에서 한다고 했다. 서둘러 일주일을 남겨두고 나는 왕복 기차표를 미리 샀다. 김해에 가기 위해선 구포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밀양의 ‘장생모(장성녕 선생을 생각하는 모임)’ 운영위원인 박 선생께 전화했더니 구포에서 강을 건너면 김해라고 했다.

 

내외의 장례를 치를 때는 혼자였지만 갑절의 축복이 필요한 혼사다. 아내와 함께 하는 기차여행도 오랜만이었고 몇 달 만에 정장하고 나서니 공연히 마음이 설레는 느낌이었다. 기차는 한 십여 분 연착했다. 구포역에 내렸을 때, 나는 내 계산이 허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포가 이 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의 관문 격인 곳이라는 사실을 나는 간과했다. 지난여름에도 이용한 역이었는데 어쩐지 나는 구포를 낙동강 하구의 한적한 포구쯤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시간에 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버스에 올라 인터넷 검색으로 노선을 점검해 보고 나서 나는 아내에게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강 건너면 김해인 것은 맞았다. 그런데 예식장이 있는 내동은 구포에서 가장 먼 동네였다. 무려 30여 개의 정거장을 지나서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식이 시작된 지 20분이 지나 있었다.

 

내 계좌로 입금한 열몇 명의 동료 선후배들의 축의금을 수부에 냈다. 장생모에서도 의논 끝에 전자제품 하나를 제대로 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부조하기로 했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1장 1박과 안동에서 내려온 선후배 교사들, 밀양의 박 선생 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하객도 넘치게 많았다. 웬 하객들이냐니까 아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교우들이라고 했다. 어디 없이 교회가 큰 부조를 하는 것이다.

 

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고 있던 아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쓴 신부는 아름다웠다. 신랑 신부는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모두 마음에 흡족해했다. 이런 걸 못 보고 먼저 간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한 이는 안동의 배 선생이셨다.

▲ 신혼부부. 오른편의 고운 부인이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다.

사진 촬영이 시작되는 걸 보고 식당으로 옮겨서 먼저 식사를 했다. 김해에서 이름난 식장이라더니 뷔페식이 괜찮았다. 식사를 끝내고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폐백을 끝낸 부부가 인사를 하러 왔다. 아직 젊은 시어머니도 함께였다. 시어머니는 아주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들 내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아비의 시대’는 가고 ‘그들의 세상’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김해가 집인 신랑은 퇴근하기 무섭게 차를 몰아 신부가 있는 밀양으로 달려가곤 했다. 이걸 지켜보면서 행여 사고나 날라 노심초사하던 시어머니가 서둘러 혼인을 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아주 온화한 인상이었다. 신부를 안아주는 모습이 생모나 다름없어 보였다고 누군가가 전했다. 그렇다, 아이는 시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리라.

 

시집은 김해지만, 일단 이제 고1인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아이는 밀양 집을 떠날 수 없다. 신랑은 밀양 쪽으로 직장을 옮기기로 하고 신접살림은 아이들 집에 꾸리기로 한 모양이다. 어린 처남을 동생처럼 거두어야 하는 짐을 신랑은 기꺼이 맡기로 한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친구이자 매부인 장성녕을 보내고, 여동생마저 여읜 아이의 외삼촌, 김 목사님에게 ‘시름 하나를 더셨다’고 공치사를 했다. 고맙다고, 목사님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난 장례식에서 만났던 장성녕의 남동생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백부와 숙부들 덕분에라도 아이의 혼인은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 먼저 길을 떠나야 해서 우리도 작별하기로 했다. 우리 내외는 돌아가는 차표를 반환하고 박(朴)의 차에 올랐다. 김해에서 밀양, 청도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장성녕과 함께 했던 주변의 식당과 횟집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청도 어름에서부터 길가엔 감나무의 행렬이 이어졌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감탄이 끊이지 않을 만큼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감을 바라보면서 모두 아이가 새로 시작하는 삶이 그처럼 풍성하고 넉넉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장(張)이 그랬다. 오늘은 다 좋았지. 미라가 눈물 한 방울 훔쳤으면 화룡점정이었는데 말이야……. 우리는 모두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그러나, 아이가 남몰래 흘린 눈물이 그동안 얼마였겠는가를 생각하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축의금을 전해 준 선후배 동료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주신 축의금 잘 전했습니다.

신부는 예뻤고 신랑은 믿음직했습니다.

시나브로 ‘아비의 시대’는 끝나가고

이제 이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송’을 누르고 나서 나는 장성녕에게도 마음속 안부를 보냈다.

 

맏이가 면사포를 쓴 거 봤지?

자네 없이도 아이들 거두면서 이제 어른이 되었네.

기특하지 않은가.

동생들의 앞길도

지켜봐 주게나.

 

 

2012. 11.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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