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시의 ‘해바라기 축제’
태백시의 ‘해바라기 축제’
‘해바라기 축제’라고 들어보았는가. 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구와우 마을에 있는 태백고원자생식물원(이하 식물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름 축제다. 2005년부터 시작된 축제라는데 우리가 정작 이를 알게 된 건 며칠 되지 않는다. 가족의 여름휴가로 영월에서 열리고 있는 ‘동강 국제사진전’에 들렀다가 우리는 <한겨레>에서 축제 기사를 읽은 딸애의 제안으로 태백까지 내쳐 달린 것이었다.
영월 사진박물관과 모운동(‘해를그리며’ 님의 기사에서 얻은 정보로 잠깐 들렀다.)을 거쳐 태백 구와우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네 시가 겨워서였다. 식물원 입구가 어쩐지 허술해 보였다. 커다란 입간판 뒤편의 가건물에서 표를 팔고 있었는데 외부 벽면에 ‘공지사항’이라며 펼침막이 붙어 있었다.
공지사항의 골자는 ‘해바라기는 한 주 전쯤이 절정이었는데 지금은 해바라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이 점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심코 입구로 들어섰는데 입장료가 5천 원이라는 걸 알고 아내가 입을 딱 벌렸다. 좀 비싸지 않으냐는 얼굴로 나를 건너다보는 딸애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다.
“비싼 거 아니다. 천리포 수목원은 8천 원이었다. 그래도 그건 비싼 게 아니었다.”
글쎄, 한 5년 전이었다면 나도 이 입장료에 시비를 걸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연’을 너무 손쉽게 바라본다.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마치 숨 쉬는 데 필요한 ‘공기값’을 내야 하는 억울함과 비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땀 흘려 가꾼 자연이 적지 않다. 그런 맞춤한 숲을 한 바퀴 도는 데 드는 비용은 우리가 100분짜리 영화 한 편 보기와 비길 바가 아니다.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수십억의 비용이 들 듯 자연을 유지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하는 데 드는 비용도 인간의 셈으론 쉽게 계산해 내기 어려운 것이니 말이다.
인터넷에서 잠깐 둘러본 ‘해바라기 축제’는 온통 노란색 물감을 퍼부은 듯했지만 나는 애당초 별로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지나친 기대가 실망을 낳는 법이다. 자연의 풍경은 기사로 소개될 때가 이미 절정이다. 그 기사를 보고 들르면 이미 끝물이기 십상인 것이다. 이는 ‘봉화 메밀밭’을 보러 갔다가 겪은 호된 실망으로부터 배운 깨달음이다.
식물원은 ‘아홉 마리의 소가 누운 형상’을 닮은 지세 때문에 ‘구와우(九臥牛) 마을’으로 불리는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 입구부터 서글퍼 보이더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식물원이라는 이름이 버거운 모습이었다. 마치 시골 유원지에나 있을 법한 허술한 간이식당이 길옆에 어지럽게 벌여져 있었고,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시원찮았다.
“식물원 꼬락서니가 뭐 이래? 누가 운영하는 거지?”
“관에서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도 못한 것 같네.”
해바라기는 ‘끝물’이었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입장객들은 그래도 길옆에 줄지어 선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밭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산책로 입구에 이르자, 식물원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리집에선 모두 5만 평의 고원에 해바라기, 야생화 군락지, 생태숲 탐방로 따위가 펼쳐진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지의 경사면마다 펼쳐진 광활한 해바라기 군락지다. 밋밋하게 이어지는 구릉과 낮은 산등성이에 해바라기의 행렬이 노랗게 타고 있었다. 절정일 때는 장관을 이루었겠지만, 지금은 끝물, 점점이 뿌려진 노란색은, 그러나 화사하게 다가왔다.
그리 썩 내키지 않았지만,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들지 않은 숲길로 들었고, 곧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환호했다. 평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원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온 것이다. 우리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인적 없는 숲길을 걸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고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만 송이’라는 수사가 지나치지 않을 만큼 해바라기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간간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입은 원색의 옷 빛깔도 고원을 아우르는 풍경이 되어 주었다.
웅덩이와 못이 있었고, 코스모스와 벌개미취 따위의 군락이 양념처럼 섞여 있었다. 아직은 가꾸어지지 않은 숲길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어쩌면 우리는 잘 정리되고 관리된 인공의 길에 너무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길과 주변을 자로 잰 듯이 구분하고 규격에 맞춘 듯 일정한 주변 풍경에 우리는 잘 길들어 있는 것이다.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돌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이다. ‘해바라기’라는 우리말 이름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해바라기는 ‘해를 따라 돌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줄기와 잎의 끝부분만 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를 등지고 움직이는 일행 앞에 해바라기가 등을 보였던 까닭이 거기 있었던 게다.
우리는 천천히 산등성이로 난 길을 한 시간 남짓 걷다가 하산했다. 역사 자연이란 반드시 거기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것을 가꾸고 지키는 이들 덕분에 자연은 제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 앞에 그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뒤에 확인한 것이지만, 이곳은 6년 전에 개인이 조성하기 시작한 사설식물원이다. 원래 젖소를 기르던 목장이었다고 했다. 글쎄, 목장을 오늘의 모습을 꾸미기까지 얼마만 한 노력이 필요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조성을 시작하던 무렵이라면 거제의 외도식물원이나 태안의 천리포 식물원도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식물원을 나와 차에 오르면서 나는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아내는 ‘좋았다’라고 말했고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5천 원’의 교환가치를 이르지 않아도 좋을 일이다. 그것은 한 시간 남짓, 우리가 식물원의 숲길을 걸으며 얻은 것을 화폐가치로 따지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0. 8. 16. 낮달
해바라기에 대한 오해
해바라기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해바라기는 항상 해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해바라기꽃이 해를 쫓아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줄기와 잎의 끝부분만 해를 향하고 있다.
해바라기꽃을 보면 반드시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래서 해바라기꽃이 태양을 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해바라기꽃은 같은 방향을 향해 피어 있고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해바라기 줄기와 잎의 끝부분은 아침에는 동쪽, 낮에는 남쪽, 저녁에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꽃피기 전인 녹색 꽃봉오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바라기 줄기 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양을 쫓아가지만, 저녁에 해가 서산에 지면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동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침이 되면 완전히 동쪽을 향하고 태양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이처럼 식물 중에도 동물과 같이 나름대로 습관 같은 것이 있다. 도대체 해바라기는 무엇 때문에 태양을 쫓아가는 습성을 갖게 된 것일까. 아마도 어느 식물보다 생장이 빠른 해바라기는 광합성을 통해 많은 양분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해바라기는 항상 태양을 향해 잎을 돌려 광합성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다. 꽃봉오리가 아직 녹색일 때에는 광합성이 가능하므로 녹색 봉오리마저도 태양을 쫓아간다. 그러나 꽃이 피면 더는 광합성을 할 수 없으므로 태양을 향해 움직일 필요가 없다.
아직도 과학자들은 해바라기 줄기나 잎의 끝이 태양의 움직임을 쫓아가는 기작(메커니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다. 해바라기의 어린줄기에 강한 빛을 24시간 동안에 1회전 시키면서 쬐어주면 어린줄기는 항상 빛 쪽을 향한다. 그러나 12시간 동안에 1회전 하면 해바라기는 빛을 쫓아가지 못한다. 이처럼 해바라기는 진화 과정 중에서 삶을 위해 태양의 광주기에 따라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있다.
출처 : http://festival.taebaek.go.kr/part5/home/html/sub01_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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