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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군위 선방산 기슭의 옛 가람, 지보사(持寶寺)

by 낮달2018 2020.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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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이 창건한 고찰, ‘보물이 많다’고 한 절집

▲  주차장에서 바라본 지보사 전경

지난 목요일, 처가를 다녀오는 길에 군위에 사는 이 선생에게 들렀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 정직이 때로 그의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고단하지만, 자신의 원칙이나 정직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정직’이란 자기감정을 꾸미거나 ‘교언영색 하지 않음’의 뜻이다.

 

날씨가 뜨거웠지만, 그를 길라잡이 삼아 인근 군위읍의 지보사와 부계의 한밤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언제나 길 위에는 스승이 있다. 주제 없는 시답잖은 얘기로 지새우는 동행 길이었지만, 새삼 새롭고 배우고 느낀 게 여럿이다. 짐작했겠지만 그런 깨달음은 쉽사리 말이나 글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보사는 군위읍 상곡리, 그 모습이 마치 배를 띄운 것 같다고 해서 선방산(船放山)이라 불리는 산기슭에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데,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보사(持寶寺)라 이름 붙였다 한다.

 

보물이란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맷돌, 사람 열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가마솥, 단청의 물감으로 사용되는 오색의 흙(이 대신 청동 향로를 치기도 한다.) 등, 세 가지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고 통일 신라 시대 때 축조된 3층 석탑과 삼존불만 남아 있다.

 

1999년 대웅전 해체 때 나온 상량문에는 지보사의 ‘지(持)’가 ‘땅 지(地)자’로 쓰여 있다 하니, 보물은 굳이 딴 데서 찾을 게 아니라, 의상이 연 이 절집 터 자체로 볼 수도 있겠다.

▲  절로 오르는 돌계단

절집은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축대 위에 낮게 두른 담장 너머에 숨어 있었다. 왼쪽 담장 위 배롱나무 아래 삼층석탑이 보였다. 돌계단 왼쪽의, 부처님 말씀을 새긴 바위는 생뚱맞다. 하기야 불국사 앞에도 자연 보호탑이 자리를 빛내는 상황이니 마냥 나무라기도 쉽지 않다. 절집으로 오르는 계단은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놓아 축대를 보고 푸근해진 마음에 슬그머니 재를 뿌린다.

▲  지보사 대웅전
▲ 대웅전 뜰 아래 접시꽃이 피었다 .

새로 단장한 듯한 대웅전은 규모는 작았지만, 단청이 화려했다. 현판을 올려다보며 방문객들은 고민에 빠졌다. 현판의 글씨가 워낙 묘했던 까닭이다. “저게 여섯 육(六)자야, 뭐야?” 한쪽 선방에 앉아 있던 보살들에게 물었는데, 답은 반대편에서 날아왔다. “대웅전!” 선방의 발 너머로 비구니 한 분이 어른거렸던 것 같다.

 

짧은 밑천은 어디서든 드러난다. 큰 ‘대’(大)자를 여섯 육 자라고? 그러고 보니 대웅전이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서 한 마디 내뱉는다. “글자 한번 요상하구먼!” 대웅전 뜰 아래에는 장미와 접시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언제부턴지, 절집에 피는 꽃은 종류를 가리지 않는 듯하다. 절 마당이나 금당 뜰에 치렁치렁 피어나던 것은 불두화거나 보리수였는데 말이다. 접시꽃은 그런대로 봐줄 만한데 장미는 좀 그래 보인다.

▲  반대 방향에서 각각 찍은 삼층석탑(보물 제682호)
▲ 상층기단 면석에 양각한 팔부신중. 이는 불법을 수호하는 천(天)·용(龍) 등 8종의 신장(神將)이다.

보물 제682호 지보사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 왼쪽 담장 안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안내판의 해설대로 이 탑은 ‘상륜부만 없을 뿐 거의 완전한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하대부터 나타나던 장식성이 풍부한 석탑 계열을 충실히 계승한 탑이다. 규모가 크지 않으면서도 이 탑이 보여주는 안정감과 단아한 기품은 놀랍다. 상하 기단 면석에 팔부신중(八部神衆)과 12지상(十二支像)이 조각되어 있다.

 

같은 탑인데도 시선의 높이와 방향, 배경에 따라 탑이 주는 느낌은 달라지는 듯하다. 멀리서 보면 규모가 작아서 다소 서글퍼 보이는데 정작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나름의 단아한 기품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탑이다. 탑이 대웅전 앞뜰에서 조금 비켜난 담장 앞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중창된 건 탑이 아니라 대웅전이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삼층석탑은 산방산을 오르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굽어보고 있다. 배롱나무 꽃그늘이 화사했다. 누가 타다가 버려둔 걸까. 세발자전거 한 대가 버려져 있었다. 담장 앞 화단에 일렬로 빨간 꽃이 피어 있었고, 그 끄트머리쯤에 미끈하게 생긴 개집 하나가 서 있었다.

▲ 대웅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3층석탑
▲ 주차장 한쪽의 석종형 부도와 비석

주차장 한쪽에는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1기 있다. 지대석을 포함한 높이가 150cm 남짓한 크지 않은 부도다. 탑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만든 건조물이라면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妙塔)이다.

 

부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구니는 열반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비구니는 비구로 환생한 다음에야 해탈할 수 있다니 동서고금을 걸쳐 여성에 대한 관점은 참으로 닮았다. 하기야 세상과 제도의 기준은 늘 사내였으니.

 

선방산을 빠져나오는 굽이굽이, 마을마다 절집과 예배당이 박혀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도 수행과 구원의 여정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길가의 가게에서 물 한 병 사 마시고 부계(缶溪)면 대율리, 돌담길이 아름답다는 한밤마을을 향해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았다.

 

 

2006. 8. 10. 낮달

 


이 절집 이름이 눈과 귀에 낯설지 않은가. 이 글을 쓴 지 4년 뒤에 이 절집에서 수행 중이던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문수 스님(당시 47)이 군위읍 잠수교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2010년 5월 31일이다. 그는 당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정책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산화했다.

 

3년 가까이 선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수행에 전념했던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었는데 그것도 떡 한쪽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만큼 엄격했던 이 수도승의 분신은 일반에는 그냥 한 승려의 돌출 행위로만 비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사롭지 않았던 듯하다.

 

지난해가 문수 스님의 10주기였다. 그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사인>의 기사 한 편을 붙이는 것으로 10주기를 추모한다. [관련 기사 :  아래 참조]

 

2021. 1.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문수 스님의 마지막 하루 - 시사IN

경북 군위군 지보사 입구에는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좌우한다’라고 쓰인 석판이 있다. 5월31일 몸을 태워 소신공양한 문수스님이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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