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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동행 - 방송고 사람들(1)

by 낮달2018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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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고 만학도들과의 점심 시간

▲ 점심시간. 밥을 짓고 국을 데우고 각종 반찬으로 어우러지는 화합의 시간이다.

(1) 만남, 2012년 최고의 선택

 

정규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에게 ‘방송통신고’에 대한 이해는 고작 그런 학교가 있더라는 정도밖에 없을 터이다. 학기 중에 계속 학교에 나가는 대신 ‘방송을 들으며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꽤 생광스러운 제도가 있구나 하는 호기심에 그치는.

 

올해 학교를 옮겨 방송고(나는 ‘방통고’로 써 왔는데 공식적으로는 ‘방송고’로 쓴다.) 수업과 담임을 맡게 되기 전까지 나 역시 그랬다. 안동에도 이웃의 공립고 부설 방송고가 있었고, 거기서 수업한 동료들의 얘기를 듣곤 했으나 역시 ‘나의 일’이 아니니 건성으로 듣고는 그만이었다.

 

▲ 방송고 상징

방송고 이(E) 스쿨 누리집을 살펴보니 서울, 부산의 11개 공립학교 부설로 방송통신고등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74년이다. 방송고는 그 설립 취지로 ‘유능한 직업인 양성’,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일반 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교육 대상자에게 고교 교육 기회 제공’, ‘평생 교육의 이념을 확산, 정착과 국민 교육 수준 향상’을 들고 있다.

 

개교 38돌을 맞은 방송고

 

올해 개교 38주년을 맞은 방송통신고등학교는 2012년 3월 현재 총 40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정규 일반계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대학진학률도 꽤 높은 편이어서 2011학년도 졸업생 4,678명 중 1,707명(36.5%)이 대학에 진학하였다. 현재 전국 40개교에 모두 15,072명이 재학 중이다.

 

경북(1,060명)은 서울(3,504명)과 경기(1,876명)에 이어 세 번째로 학생 수가 많은 지역이다. 경북에는 안동(안동고), 포항(포항고), 김천(김천중앙고)과 구미(구미고)에 각각 방송고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 학교에는 학년마다 세 학급씩 모두 9학급, 327명의 학생이 뒤늦게 고교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3학년 담임으로 모두 34명의 학생을 맡았다. 입학식을 치르고 난 뒤의 첫 시간은 은근히 설렜다.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출석을 불렀는데 34명 가운데 열두어 명이 결석이었다. 교실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다리 학생들을 한 바퀴 휘 둘러보니 경륜이 묻어나는 얼굴이 적지 않았다.

▲ 연령대별 재학생 비율(2011학년도 1학기) ⓒ 방송고 이 스쿨 누리집

3학년이어서 일부 편입생을 제하면 모두 지난 2년간 공부를 같이해 온 사이다. 서로를 알 만큼 알 터라 학급 간부를 선출해 달라고 부탁하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NEIS에 접속해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잠깐 살펴보았다.

 

역시 90년대 이후 출생한 이들이 제일 많다. 11명, 그러니까 열아홉에서 스물두세 살까지다. 4·50대 학생들이 시기를 놓친 이들이라면 이들은 정규과정을 거치는 데 실패한 친구들이다. 80년대 출생자는 일곱. 서른둘에서 스물넷까지. 70년대 출생자는 여섯 명. 마흔셋에서 서른넷까지다.

 

나머지가 나와 비슷한 또래라고 할 수 있는 5, 6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다. 60년생 이후가 일곱, 50년대 출생자가 다섯이다. 그중 나보다 한두 해 위인 이가 셋이다. 최고 연장자는 54년생, 우리 나이로 쉰아홉이다. 하긴 신입생 중에는 47년생 ‘여학생’도 있으니 이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반 평균 연령은 약 34세쯤.

 

우리 반 평균 연령은 34세

 

중간에 전출입이 있어 4월 현재 우리 반 학생은 모두 36명이다. 남녀의 비율은 19:17이니 얼추 균형이 맞는 셈이다. 그러나 개학하고 출석하는 날이 네 번이나 있었지만,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학생도 여러 명이다.

 

이들은 전화해도 잘 받지 않으니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들 결석자는 대부분 나이 어린 친구들이다.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왔지만, 아직 피가 뜨거울 때라 공부보다 노는 일이 더 바쁜 것이다. 이들은 학교에 와도 진득하게 수업을 다 하지 않고 적당한 때 꽁무니를 빼 버리기 일쑤다.

▲ 우리 학교 부설 방송고는 3월 11일 입학식을 치르고 2012학년도를 시작했다.

학급 간부 선출은 간단히 이루어졌다. 반장과 부반장, 그리고 총무와 서긴데 서로들 잘 아는 사이라 무리 없이 뽑은 모양이다. 반장은 나보다 한 살을 더 먹은 여학생 봉순 씨. 부반장은 마흔넷의 남학생 태수 씨. 그리고 총무는 쉰둘의 은숙 씨, 서기는 서른한 살의 지영 씨다.

 

아직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어떻게 사는지는 잘 모른다. 본인이 이야기해 주면 다행이지만, 굳이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정규과정의 10대 학생이 아니라 모두가 가장이거나 어버이다. 저마다 다른 삶과 사연은 차차 알게 될 터이다.

 

경건(?)한 수업, 왕성한 자치활동

 

이미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사회생활도 할 만큼 했는지라 이들 ‘나이 든 학생’들에게는 별로 입 댈 게 없다. 20대 초중반의 젊은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도 졸거나 애먼 짓도 더러 하지만 이들 어른은 사뭇 경건하게 수업을 듣는다. 그들이 수업을 얼마나 이해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늘그막에 고등학교를 다니는 이들에게 수업 내용이 정규과정의 그것과 같을 필요는 없다. 알아듣기도 쉽지 않으니 빡빡한 수업은 이들에게 고통스럽다. 그래서 교사들도 기본 사항을 중심으로 좀 설렁설렁 수업한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곁들이며.

 

수업보다 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학생회 활동이다. 전체 학생회에다 학년 학생회, 학급회 등 그 조직도 빵빵하다. 대신 여기 참여하는 임원들은 만만찮은 경비 부담을 지는 모양이다. 연간 활동 계획도 촘촘해서 벌써 행사를 두 번이나 치렀다. 입학식 날 학생회가 준비한 점심을 같이 먹었고, 지난주에는 학생회 임원 엠티(MT)도 있었다.

 

시내의 한 호텔에서 베풀어진 행사에 담임들은 꼼짝없이 불려 나가서 아주 정중하면서도 푸근한 대접을 받았다. 나이로만 치면 학생보다 나이 적은 교사들도 많지만, 이들은 교사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곤 한다. 그걸 민망해하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새삼 확인하곤 한다.

▲ 지난주 시내 한 호텔에서 베풀어진 학생임원회 엠티.
▲ 우리 반 한솥밥 점심시간

우리 반도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학생들이 마련해 준 저녁 식사 모임이 있었다. 반의 좌장인 이 회장께서 주선한 모임이다. 대구 인근의 한 중소기업의 사주인 이 회장(그는 아직 ‘학생’인 사실을 주변에 숨기고 있다.)은 좌장으로 모시기에 과부족이 없는 중후한 노신사다.

 

반주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스스럼이 없어졌다. 진부한 비유지만 ‘같이 늙어가면서’ 굳이 감추고 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그들을 만난 게 올해의 내 선택 가운데 최고라고 말했다. 의례적 수사가 아니라 그건 내 진심이다.

 

한솥밥으로 함께 배우는 시간…

 

애당초 사제의 형식 따위에 얽매일 일은 없다. 그러나 출석 수업일이 고작 네 번밖에 없었어도 교실에서 함께 하는 점심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무관해졌다. 놀라지 마시라. 점심은 교실에서 지은 따끈한 밥을 나누어 먹는다. 늘 점심을 준비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으면 이들은 그게 즐거움이라고 말하곤 한다.

 

4교시가 끝날 때쯤이면 밥솥의 밥은 뜸이 들고, 곧 책상을 붙여서 기다란 식탁이 만들어진다. 준비해 온 국도 데우고, 주로 여학생들이 마련해 온 반찬이 식기에 담겨 나오고, 각종 채소도 식탁에 오른다. 이웃 반에서 부쳐낸 채소전도 가끔 식탁에 오른다. 식사가 끝나면 후식으로 과일과 각종 차가 또 격식을 갖추어 오르는 것이다.

 

이 단란한 점심시간이 모든 방송고 공통의 풍경인지는 모르겠다. 애당초 우리 학교에는 일요일 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에 급식이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누군가. 삶에도 살림에도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 아닌가. 올해 입학한 새내기들도 이내 이 풍속을 모범적으로 따라오면서 점심시간은 늘 사제가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 된다.

 

우리 반 점심을 짓는 쌀은 우리 반의 연령 서열 2위인 택시 기사 규항 씨가 낸 쌀 한 가마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수업 마치기 바쁘게 택시를 운행해야 하는 규항 씨는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인과 함께 뒤늦은 공부를 계속하는 부부 학생이다.

 

식사가 끝나면 성주에 사는 중장비 기사, 믿음직한 준철 씨가 가져온 꿀맛의 참외를 함께 먹는다. 그는 이번에 우리 반 모범 학생으로 추천된, 정말 신실한 젊은이다. 불혹을 넘겼지만 20대, 30대 후배들이 일찌감치 하교한 빈 교실 청소를 마치고 가는 그는 우리 반 시니어 그룹의 막내다.

 

다음 주가 출석 수업일이다. 5월 초순에 중간고사가 있고, 20일에는 교내체육대회, 6월 초순에는 영남권의 방송고 종합체육대회가 부산에서 열린다고 한다. 일요일에 꼼짝없이 부산까지 다녀와야 하는 교사들은 은근히 쫄고(!) 있다.

 

그나마 토요 휴무가 있어 한결 낫긴 하지만 일요일 출근은 사실 부담스럽다. 수업만 맡은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맞추어 와서 수업만 하고 가면 그뿐이지만 담임은 9시 전에 출근해 조례를 하고 수업도 서너 시간 하고 다시 4시 35분의 종례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마다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조심하는 게 다 그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고 있지 않은 나는 방송고 사람들을 통해서 내 소속감을 확인한다. 부담스러워도 은근히 출석 수업일을 기다리는 이유가 거기 있다. 앞으로 일 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해 배우는 게 어찌 그들뿐이랴. 이 늦깎이 학생들을 통해서 나 역시 ‘가르친다’는 일의 본뜻을 시나브로 깨쳐가고 있으니 말이다.

 

 

2012. 4.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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