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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mother)하세요’, 혹은 ‘엄마 되세요’?

by 낮달2018 2020.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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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의  캠페인 ‘마더(mother)하세요’, 과도한 한글 비틀기

 

· 우리 회사 마더를 소개합니다.

· 자~ 임산부는 듣지 말고… 김 대리 오늘 또 지각이야? 엉?!

· 회사에선 후배지만, 출산은 제가 선배잖아요?

· 애들이 기다리는데 집에 안 갈 거야?

· 육아휴직 1년 동안 잘 키웠네, 회사도 이렇게 잘 키워 줄 거지?

· 아이구! 하나도 안 바쁘다니까~ 부인한테 집중해!

· 고마운 마더들이 있기에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 언제나 마음을 더해주는 당신, 당신이 마더입니다. 마더하세요!

 

오늘 아침 식탁에서 들은 라디오 방송 내용이다.

 

‘우리 회사 마더’, ‘고마운 마더들’, ‘당신이 마더입니다’ 등에 쓰인 ‘마더’가 무엇이라 느껴지는가? 글쎄 알파벳과 초급 영어 이상을 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머니를 뜻하는 ‘mother’를 떠올릴 것이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출근을 서두르면서 나는 “기어코 영어 ‘마더’가 아예 ‘어머니’를 대체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마더’가 ‘어머니’를 대체하다 뿐인가. ‘마더하세요’라는 새로운 ‘동사’를 만들기까지 했네그려. 아마 ‘마더하다’는 ‘어머니가 되다’ 정도의 뜻인가 싶었다.

 

출근해서 동료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광고가 이른바 ‘저출산 극복 TV 광고 마더하세요’라는 걸 알았다. 보건복지부 누리집에 들어가 보고 예의 ‘마더’가 ‘마음을 더하세요’에다 ‘엄마 되세요’를 합성한 말이라는 걸 확인했다. 내 짐작이 그리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  보건복지부의 마더 캠페인 모바일 웹페이지
▲ 마더하세요 TV 광고 동영상

보건복지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마더하세요’는 ‘저출산 문제 극복을 위해 기업의 참여를 독려하고, 남편의 육아 참여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들머리에 소개한 광고는 바로 그런 기업체의 모습을 찍은 동영상 대사인 것이다. 누리집의 동영상을 확인해 보니 마지막 대사는 진수희 장관이 맡았다.

 

잠깐 이런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시작은 역시 ‘마더(mother)’일 것이다. 글로벌한 국제어,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생각하는 것도 글로벌 스탠더드일 수 있겠다. 그런데 영자를 한글처럼 쓴다고 ‘방방 뜰’ ‘국수주의자’들을 고려하여 그걸 ‘마음을 더하다’의 줄임말로 눙쳤다…….

 

긍정적으로 해석해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영어를 한글처럼 쓰면서 두 낱말이 가진 장점만을 취합한 것은 ‘재치 만점’이지 않은가. 마음을 더하면서 동시에 ‘엄마가 되라’는 메시지까지 아주 ‘세련되게’ 덧붙였으니 말이다.

 

영자를 우리말 단어처럼 쓰게 된 것은 우리말을 잊어버린 재미교포만이 아니다. 작고한 한 의상 디자이너는 자신의 세련되고 글로벌한 언어 감각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는 선수였다.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이들은 글뿐 아니라 말속에도 영자를 아주 익숙하게 녹여 넣는다.

 

여느 사람도 마찬가지다. ‘슬림(slim)하다’나 ‘샴푸(shampoo)하다’도 별 무리 없이 쓰인다. ‘낮추다’, ‘높이다’ 대신 ‘다운(down)’과 ‘업(up)’이 쓰이게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마더하다’가 쓰이는 데 필요한 시간쯤이야 금방일지 모른다. 조만간 우리는 새로운 동사로 ‘파더(father)하다’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1. 8.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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