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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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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과 ‘선취 득점을 올리다’

by 낮달2018 2020.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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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겹말’ 생각

프로야구 경기 중계를 시청하다 보면 진행자가 쓰는 말에 머리를 갸웃할 때가 더러 있다. 흔히 캐스터(caster)로 불리는 이들 전담 아나운서들은 시청자들에게 경기 진행 상황을 중계하면서 그 흐름과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는 등의 구실을 한다. 그런데 어느 한 팀이 먼저 점수를 낸 상황을 전하는 이들의 해설은 어느 채널이든 비슷하다.

 

“○○이 ‘선취점’을 올립니다.”

“○○이 ‘선취득점’을 하는군요.”

“○○이 ‘선취득점’을 올립니다.”

 

겹말, 되는 말과 되지 않는 말

‘선취점’은 “운동 경기 따위에서, 먼저 딴 점수”다.(<표준국어대사전>) 관용구로 ‘선취점을 올리다’가 주로 쓰인다. 그러나 ‘선취(先取)’의 ‘취’가 이미 ‘취하다(따다)’의 뜻이니 뒤에 쓴 ‘득(得, 얻음)’이든, ‘올림’이든 불필요한 겹말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굳이 ‘득점’을 붙여서 말해야 한다면 ‘선취 득점을 하다’ 정도로 쓰는 게 옳다는 얘기다. ‘허송세월(虛送歲月)을 보내다’가 아니라 ‘허송세월하다’가 바른 표현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도 채널마다 ‘선취 득점을 올리다’가 스스럼없이 쓰이는 상황인 것이다.

 

볼 때마다 머리를 갸웃하는 표준말로 ‘모래사장’이 있다. 우리 어릴 적에는 그걸 경상도 사투리로 ‘몰개박실’이라고 했다. 자라면서 적당한 표준어를 찾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내가 사람들이 으레 쓰는 ‘모래사장’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게 겹말이라는 걸 강하게 의식하고 있어서다.

 

‘사장(沙場)’의 ‘사(沙)’가 ‘모래’를 뜻한다는 걸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백사장(白沙場)’으로 타협했지만, 문제는 남았다. 모든 모래가 ‘흰 모래’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모래사장과 비슷한 말로 ‘모래톱’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 널리 알려진 말이 아니다.

 

아마 모래사장도 내가 했던 고민과 비슷한 형태의 낱말 찾기 끝에 나온 선택이 아닐까 싶다. 모래와 ‘사’가 겹치긴 해도 그것만큼 확실하게 그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는. 물론 다수 언중이 그걸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현실론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같은 뜻의 말이 겹쳐서 된 말’, 즉 겹말은 우리 일상에서도 심심찮게 쓰인다. ‘역전(驛前)’에다 굳이 ‘앞’을 붙인 ‘역전 앞’은 널리 알려진 보기다. 비슷한 형식의 겹말로 ‘옥상(屋上) 위’가 있다. 그러나 대개 이 같은 말은 비표준어이다.

그러나 언중들의 일상에서 입에 익어버린 겹말들은 그예 ‘표준어’로 걸러지기도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의 ‘겹말’ 풀이에 나오는 ‘처갓집’과 ‘고목나무’도 그렇다. 처갓집과 비슷한 형식으로 표준어가 된 겹말은 ‘상갓집’, ‘종갓집’이 있는데, 형식은 같아도 ‘초가집’의 경우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다.

 

<표준어가 된 겹말>에서 보듯 적지 않은 낱말이 표준어의 지위에 올랐다. 주로 한자어에 고유어가 이어진 형태의 말이다. 이들 겹말은 아직도 비표준어인 낱말들에 비기면 자연스럽고, 고유어를 붙이지 않을 때는 뜻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송이’나 ‘영지’는 각각 버섯을 뜻하는 글자 ‘이(栮)’와 ‘지(芝)’가 들어 있지만, 그걸로 뭔가 아쉽다. ‘국화’나 ‘매화’도 마찬가지다. 꽃 ‘화(花)’자가 달렸지만 그건 꽃을 가리키기보다는 이름으로 이해되는 까닭이다. ‘양옥집’[옥(屋):집], ‘옹기그릇’[기(器):그릇], ‘완두콩’[두(豆):콩] 따위도 비슷하다.

 

겹말 쓰기는 지면의 낭비

 

아직 표준말로 인정하지 않는 겹말도 적지 않다. ‘고목나무’와 달리 ‘가로수나무’는 비표준어고, ‘생일날’과 달리 ‘8월달’, ‘8일날’도 잘못 쓴 경우다. ‘전선줄’은 되는데 ‘전기누전’은 안 된다. 대체로 함께 쓰인 한자어의 뜻을 새기는 게 분명하지 않아서 생긴 경우가 많지 않나 싶다.

 

‘가죽혁대’에서 ‘혁(革)’이 ‘가죽’이고, ‘뇌리’의 ‘리(裏)’가 ‘속’이라는 걸 쉽게 잇지 못한다. ‘뇌성’의 ‘성(聲)’이 ‘소리’고, ‘악취’의 ‘취(臭)’가 ‘냄새’라는 사실에 둔감하다. ‘취재진’이나 ‘연구진’의 ‘진(陣)’이 ‘줄’, 즉 ‘복수의 사람’을 뜻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안’의 ‘안(案)’이 ‘의안’이나 ‘문제’의 뜻을 담고 있다거나, ‘홍시감’의 ‘시(枾)’가 ‘감’의 한자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겹말이 ‘관형어’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러는 명백한 뜻이 겹치는 게 드러나는 때도 있지만, ‘매(每)’나 ‘각(各)’이 ‘마다’나 ‘낱낱’의 뜻으로 새겨지는 관형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견해’가 ‘보는바 생각’이라는 걸, ‘숙원’의 ‘숙(宿)’이 ‘묵은 것’을 뜻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겹말 가운데 표준어가 된 말은 사전에 표제어로 올랐다. 그러나 사전에 오르지 못한 겹말은 한 단어로 볼 수 없으므로 띄어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우리말에서 띄어쓰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다. 또 표준어가 된 겹말과 그렇지 못한 말을 가르는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점도 혼란스럽다.

 

겹말을 가려 쓰는 것은 언어 운용의 경제 원칙에 부합한 일이다. 글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의미 파악이 명확하다면 굳이 겹말을 사용해 지면을 낭비할 필요가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래저래 글을 쓰면서 낱말의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14. 7.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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