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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동해 두타(頭陀)산성 샌들 등정기

by 낮달2018 2020.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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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 여행으로 찾은 동해 두타산성

▲ 두타산성의 조망. 두타산의 중턱에 불과하지만 이 조망은 시원하고 훌륭하다.

바야흐로 이 나라의 여가 문화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의복, 장비 등 관련 산업의 융성으로 이어진다. 어쩌다 아무 준비 없이 면바지 바람으로 인근 산이라도 오른 이들은 마치 경쟁하듯 전문 산악인의 복장과 장비로 중무장(?)한 등산객들의 기세에 기가 질릴 지경이 되었다.

 

‘히말라야 복장’은 아니라도 ‘샌들’은 곤란

 

▲ 417만원 ‘등정’복장

오죽하면 “동네 뒷산 오르는데, 등산복은 ‘히말라야 등반용’”이라는 얘기가 떠돌겠는가.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아웃도어 고급품 풀 장착 시 가격’은 417만 원이다. 이쯤 되면 등산도 부자들이나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짚신에서 고무신, 그리고 이른바 ‘지까다비’를 거쳐온 우리에게 수십만 원짜리 고어텍스 등산화는 호사의 극치다. 지금도 시골 노인들은 고무신이나 장화를 신고도 너끈히 산을 타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산행이 여가 선용뿐 아니라 신체를 단련의 맞춤 스포츠가 된 지금 제대로 준비하고 산을 오르는 건 장려할 일이지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에는 준비 없이 떠난 ‘무모한 등산객’들이 없잖아 있다. 산에 오르며 캐주얼 구두를 신은 정도는 양반이다. 90년대 초반에는 아주 늘씬하게 다리를 드러낸 치마 차림에다 하이힐까지 신은 용감한 여성을 백무동에서 장터목에 오르는 지리산 어느 능선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말이다.

 

굳이 준비 없이 산을 오르는 걸 산악인처럼 자못 무겁게 ‘산을 얕잡아 보는 것은 오만’이라고 말할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산을 오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안전하고 편안한 산행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지난 7월 중순, 나는 무엄하게도 ‘샌들’을 신고 두타산(1353m)을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오른 것은 두타산의 초입에 있는 산성까지다. 애당초 여정에 산행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두타산 어귀의 무릉계곡을 거쳐 정동진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다.

 

여정을 고려했으므로 모두 간편한 여행복 차림에다 운동화나 캐주얼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정작 무심코 계곡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일행 가운데 산행을 한다고 여긴 이는 없었을 것이다. 무릉반석과 계곡 옆의 금란정을 곁눈질하며 우리는 무심코 두타산으로 틈입했다고 하는 편이 알맞을지 모르겠다.

▲ 무릉계곡은 호암소(虎巖沼)로부터 무릉반석을 지나 학소대,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는 4㎞ 구간을 이른다.
▲ 두타산으로 오르는 무릉계곡 길. 빽빽한 숲 그늘을 따라 오르는 산길이 시원하고 넓다.
▲ 동해, 삼척지방의 유림의 금란계(金蘭契)를 기념해 건립한 정자 금란정.
▲ 계곡 어귀의 무릉반석. 거대한 너럭바위로 김시습 등 시인 묵객들의 이름과 시가 새겨져 있다.
▲ 삼화사 일주문. ‘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 하여 삼화사란다.

무릉반석 ‘탁족(濯足)’은 엄두도 못 내고 무릉계곡으로 내처 들어갔다. 계곡 어귀의 삼화사(三和寺)에서 잠깐 머물렀다. 이 절집은 642년 자장율사가 열었고 고려 태조 원년에 중창했다. ‘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 하여 삼화사란다.

 

삼화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으나 임란 때와 1907년 왜병의 방화로 인해 불타 버렸다. 이듬해에 중건되었다가 현재의 터로 이전한 게 1977년이다. 천년도 전에 세운 절집이라는데 정작 절집의 분위기가 예스럽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절집 뒤편에 빽빽하게 우거진 솔숲이 선사하는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청기와를 얹은 적광전(寂光殿), 그 오른편에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서 있는 청동 지장보살상, 적광전 앞에 흐드러지게 핀 루드베키아(rudbeckia)의 강렬한 노란 빛이 어우러지면서 절집은 어쩐지 들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이 절집이 고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적광전의 철조 노사나불(盧舍那佛) 좌상과 법당 앞 삼층석탑이다. 각각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과 석탑은 각각 보물 1292호와 12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철불은 최근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명문을 통해 노사나불이라는 것과 8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좌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당한 체구에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이 단정하다. 철불은 통일신라 말 선종이 도입되면서 많이 조성되었고 고려 시대에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 삼화사 적광전. 보물 제 1292호 ‘철조 노사나불 좌상’을 모시고 있다.
▲ 삼화사 삼층석탑.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되는 석회암 탑이다.
▲ 무릉계곡 길. 짙은 녹음과 산의 체취가 남달랐다.
▲ 두타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적광전 앞마당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되는 석회암 탑이다. 높이 4.9m. 높다란 축대 위에 성큼 올라앉은 법당 탓일까. 탑은 초라하고 옹색해 뵌다.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렸는데 2, 3층 몸돌이 1층보다 1/3로 줄어버렸기 때문이다.

 

두타산성에서 끊어진 샌들

 

탑에서 몸돌의 체감은 대중의 시선을 고려해서 이루어진다는데, 이 석탑은 자리를 잘못 고른 것일까. 앉아서 찍은 사진 속에서 탑의 몸돌 체감의 비례는 적당해 보인다. 그러나 서서 찍은 사진 속에선 1층 몸돌의 높이는 쓸데없이 허리를 밋밋하게 드러낸 듯 싱겁기만 하다.

 

절집을 떠나 다시 산을 오른다. 빽빽한 숲 그늘을 따라 오르는 산길이 시원하고 넓다. 짙은 녹음이 연출해 주는 산의 체취가 코끝에 희미하게 와 닿는다. 그제야 정말 너무 오랜만에 산을 찾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사진을 찍으며 산으로 들어갔다.

 

▲ 두타산성에서 끊어져 버린 내 샌들 .

두타산성과 용추폭포로 가는 갈림길에서 나는 주저 없이 산성 쪽을 택했다. 일행은 용추폭포로 올랐으리라 짐작했지만, 굳이 두타산성을 선택한 것은 그쪽의 그림이 훨씬 그럴듯할 것 같아서였다. 거리도 이쪽이 0.5km로 저쪽 길의 반이었다.

 

결정은 쉽게 했지만 길은 만만치 않았다. 가파른 데다가 내가 신은 샌들은 자꾸 미끄러지곤 했기 때문이다. 면바지가 몸에 감기기 시작하고 새삼스레 무더위에 숨이 막혀 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까워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대여섯 걸음 걸으면 한 차례씩 쉬면서 간신히 산성 부근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사이의 통로 너머 산성의 흔적이 보이는 듯했는데, 갑자기 왼발 쪽이 허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이내 내 신발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챘다.

 

밑창과 이어지는 뒤쪽 가죽끈이 떨어졌고 곧 바닥에 붙은 밑창도 일어나 버렸다. 다행히 앞쪽 끈은 그나마 붙어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중턱에 있는 산성 터로 오르는 길은 좁은 데다가 바위 낭떠러지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엉금엉금 기듯이 중턱의 산성 터로 올랐다. 그러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산성 터를 보고 나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허물어졌더라도 제대로 성벽이 남아 있는 오래된 산성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걔, 이게 산성이라고? 거대한 암반 위에 앉은 바위 몇 개, 그 옆에 쌓인 돌무더기가 다였다.

▲ 두타산성 터. 성벽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파르기로 미루어 보면 요새는 요새였다.

그러나 산성터에서 바라보는 두타산 조망은 훌륭했다. 멀리 가까이 암벽이 어우러진 산등성이와 울울창창한 숲이 시원했다. 두타산성은 신라 때 처음 쌓았고 1414년(조선 태종 14년)에 높이 1.5m, 둘레 2.5km의 산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이 산성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아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절벽에 도열시켜 적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군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빨래하던 노파가 이 산성의 사정을 제보하듯이 이방의 계략대로 알려주었더니 왜군은 이기령을 넘어 우회 침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치밀한 계략이어서 왜군들은 성안에서 전멸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성터는 허물어졌으되 선인의 호국정신의 깃든 곳이어서 세웠다’라는 동해시장의 표석만이 남았다.

 

샌들 산행의 교훈?

 

하산이야 어렵지 않다. 비록 신발에 탈이 나긴 했지만 나는 샌들이 벗겨지지 않도록 발바닥에 잔뜩 힘을 준 채 산에서 내려왔다. 계곡 입구 상가에서 신발을 사 신으려 했지만, 상가에 신발류는 보이지 않았다.

 

정동진의 숙소에 여장을 풀고 식사를 하러 나와서 신발가게를 찾았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다. 관광지였을 뿐 거긴 역시 시골이었다. 나는 식당 여주인의 충고에 따라 인근 편의점에서 학생용 삼선 슬리퍼를 한 켤레 샀다. 그리고 나는 끈 떨어진 샌들을 편의점의 휴지통에 벗어 던져 버렸다.

 

나는 그 삼선 슬리퍼를 신고 대관령 삼양목장을 한 바퀴 돌았고, 오대산 월정사를 답사했다. 슬리퍼가 반드시 편한 신발은 아닌 듯했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해 하룻밤을 자고 나자 종아리가 당기기 시작했다. 뒤축이 없는 신발을 신고 다니느라 저도 몰래 거기 힘을 주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 올여름 1박 2일의 여행은 끝났다. 언제나 그렇듯 남은 것은 사진이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찍은 흔들린 사진 속에 내 끈 떨어진 샌들이 있다. 글쎄, 이 어정쩡한 여행이 남긴 교훈은 간명하다. 다시 산행이 낀 여행을 떠날 때는 히말라야 등반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샌들을 신어서는 안 되겠다는 ‘살아 있는’ 가르침 말이다.

 

 

2011. 7.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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