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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선산4

구미·선산의 3·1운동 - 네 곳에서 만세를 외쳤다 구미·선산의 3·1운동 - 선산과 해평, 임은동과 진평동 시위 사람들은 제 고장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필요한 이해는 ‘맹탕’일 때가 많다. 특히 역사 쪽으로 가면 총론은 그나마 주워섬기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국가 단위로만 배울 뿐, 향토사는 거기 곁들여진 몇 줄의 사실로만 익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자체가 나름대로 지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단시간의 노력으로 쉽사리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미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등의 행사가 베풀어지긴 했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2023. 3. 2.
온몸으로 불 꺼서 주인 구한 의견(義犬), ‘의구총’으로 전한다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구미에는 ‘의로운 소’의 무덤만 있는 게 아니라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義狗塚)’도 있다. 의구총은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넘어가는 길, 해평면 낙산리 큰길가에 있는 조선 후기 개 무덤이다. 낙산리 삼층석탑에서 10여 분만 더 가면 길 오른쪽의 의구총에 이른다. [관련 글 : 구미 의우총 이야기, 소의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25번 국도 따라 의우총 이어 ‘의구총’도 있다 의구총의 유래담도 1655년(현종 6) 선산 부사 안응창(1603~1680)이 지은 ‘의구전조(義狗傳條)’에 전해져 온다. ‘의구’의 일은 ‘의우의 일’이 있기 오래전에 일어난 일로,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선산부(善山府) 동쪽 연향(延香 .. 2022. 9. 6.
선산(善山) 톺아보기 - 프롤로그 왜 ‘구미’ 대신 ‘선산’ 인가 ‘구미시민’이 된 지 한 주일이 지났다. 구미는 내 고향인 인근 칠곡군 석적읍 옆 동네니 내가 이 지역으로 돌아온 것도 두루뭉술하게 ‘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를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자락은 한편으로 이 지역을 굳이 ‘객지’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한끝과 만난다. 1970년대 초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구미읍이었다. 구미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고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구미로의 ‘귀향’? 내 기억 속의 ‘구미’가 특별한 의미를 새.. 2022. 1. 26.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구미 금오산 채미정(採薇亭) 구미에 들어와 산 지 어느새 4년째다. 선산 골짝을 골골샅샅 훑는 데만 족히 서너 해가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왔건만, 골골샅샅은커녕 아직 금오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블로그의 ‘선산 톺아보기’에 쓴 글도 8편이 고작이니 ‘개점휴업’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採薇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게으름을 돌이켜보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善山)에 있다.”()고 할 때 그 인맥의 출발점이 곧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이기 때문이다. 야은은 목은(牧隱) 이색(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1338~1392)와 함께 여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이다.(.. 2019.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