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박물관 전시회 도상(圖上) 관람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여유로워지자 유독 전시회 소식에 눈길이 자주 머문다. 얼마 전 대구박물관의 특별전시회에 다녀온 것도 그래서다. [관련 글 : ‘고대마을 시지(時至)’, 수천 년 잠에서 깨어나다]
그러나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 인근 지역이 아니라 서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까운 데는 가볍게 다녀올 수 있겠지만 서울까지는 아무래도 ‘천릿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근 김천구미역에서 케이티엑스(KTX)를 타면 1시간 반 뒤에 서울역에 닿는다. 그러나 이 예사롭지 않은 나들이는 그리 간단치 않다. 오가는 찻삯만 십만 원 가까이 드는 이 나들이를 쉽사리 나서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대신에 나는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나 누리집을 드나들며 전시회 ‘맛보기’로 만족한다.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녀석에게 짬을 내 거기 가보고, 도록(圖錄)이나 자료집을 사거나 리플릿 따위를 챙겨오라고 부탁한다. 현장에 가는 대신 관련 자료를 통해서 전시를 간접 체험하는 셈이다.
도상(圖上)으로 대신하는 ‘맛보기 관람’
지난해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에서 연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이 그랬고, 지난 4월, (사)남도전통문화연구소가 베푼 한창기 20주기 추모 전시회 『뿌리 깊은 나무의 미래』가 그랬다. 아이는 『…나치 부역자들』 전시회에선 자료집을, 『뿌리 깊은 나무의 미래』는 안내 전단(팸플릿)을 한 장 사다 주었다.
국립 한글박물관에서 기획특별전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나는 뉴스를 통해 알았다. 『청구영언』 원본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이자 처음 시도되는 가곡 노랫말 전시라는 이 전시회에 마음이 잠깐 동했다. 그러나 나는 관련 자료를 찾아 읽고 한글박물관 누리집에서 『청구영언』 주해본과 영인본을 내려받아 들여다보는 거로 이른바 ‘뽐뿌’를 다스렸다.
『청구영언(靑丘永言)』(1728)은 조선 후기의 가객 김천택(金天澤, ?~?)이 구전되었거나 개인 문집에 실린 노랫말(시조) 580곡을 한데 모은 책이다. 이 가집(歌集)은 김수장이 엮은 『해동가요(海東歌謠)』(1755), 박효관과 안민영이 엮은 『가곡원류(歌曲源流)』(1876)와 함께 이른바 조선조 3대 시조집의 하나다.
시경 300편을 암송했다는 포교 출신의 김천택은 당대 최고의 가객, 요즘 말로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는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 노랫말이야말로 ‘자연의 참된 모습’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당시 음란하고 저속하다고 평가받던 시정의 노래들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만횡청류(蔓橫淸類)’라 이름 짓고 총 116곡을 『청구영언』에 실었다.
시정의 노래 모은 ‘만횡청류’
‘능청능청 부르는 노래들을 모은 악곡’이라는 뜻의 ‘만횡청류’의 노랫말에는 조선조 후기를 살던 이들의 일상과 유흥 등으로 드러냈던 감성이 생생하다. 우리가 기왕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른바 ‘사설시조’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 ‘창 내고자 창 내고자 이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 요 개같이 얄미우랴’, ‘귀또리 저 귀또리 어엿브다 저 귀또리’ 같은 시조들은 물론이거니와 요즘 같으면 ‘19금’에 해당할 노골적인 성애를 다룬 노래들도 적지 않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노래로는 <해동가요>에 전하는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사설시조가 있다. 이정보는 ‘하층민 삶 안에 자리한 생의 활력’을 발견하고 그들의 ‘비속어를 시어로 이끌어와 시정 바닥 하층민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 ‘시정 풍속 묘사의 달인’이었다.[관련 글 : “간밤에 자고 간 그놈”]
그러나 『청구영언』에 전하는 사설시조는 이보다 훨씬 직설적이다. 또 이들 노래가 보여주는 관능적 에로티시즘과 중세의 도덕적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은 평시조의 그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사설시조 미학의 핵심은 감성의 자유분방한 분출과 시정 세태의 다채로운 반영’(<고전시가선(2007)>)이기 때문이다.
‘19금 노래’ 네 편
‘반 여든에……’는 불혹이 되어서야 여자를 알게 된 사내(노 도령)의 은근하고 진솔한 고백이다. 마흔이 되도록 여자를 알지 못했다면 화자는 아마 가난한 상민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홍글항글’한 상태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모르긴 해도 그것은 뒤늦게 방사의 ‘재미’를 알게 된 화자가 진작 알았다면 기어다닐 적부터 하겠다고 할 만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얽고 검고……’는 가장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서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키 큰 구레나룻 사내의 ‘그것’의 위용을 ‘큰 산이 덮어 누르는 듯’하다고 경탄하는 화자는 여인이다. 여인은 이 사내와 함께 한평생 산다면 그가 비록 시앗을 본다 해도 그걸 시샘할 ‘개딸년’이 없으리라고 단언해 마지않는다. 반가나 여염집 아낙이라면 감히 입도 떼지 못할 얘기를 걸쭉하게 늘어놓는 이 여인은 이른바 ‘논다니’[유녀(遊女)]일까.
‘이르랴 보자……’는 유부녀의 불륜을 목격한 사람이 그 남편에게 이를 이르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다. 아낙은 물 길러 나와 통과 똬리를 우물가에 던져두고 건넛집의 사내를 불러내어 삼밭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눈 것이다. 목격자는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는 ‘끝만 남아’ 흔들리는 걸 보았다며 여인을 어르는데 정작 여인은 실삼을 조금 캤을 뿐이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역시 여느 여염집 지어미로선 꿈도 꾸지 못할 방탕한 일탈의 풍경이다.
‘들입다 바드득……’는 사내가 여인을 안고 희롱하는 장면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글로 질펀하게 풀어내기엔 민망했던지 중요한 장면은 모두 한문으로 옮겼다. 이를테면 ‘흰 살결 풍만하다’는 ‘설부치풍비’로, ‘다리 들고 걸터앉으니’는 ‘거각준좌’라 옮겼다. 여인의 은밀한 곳은 ‘반만 핀 홍모란’으로 비유했고, 남자의 움직임은 ‘진진(進進)’과 ‘퇴퇴(退退)’로, 방사 시의 이른바 ‘진흙 밟는 소리[이리성(履泥聲)]’은 ‘물방앗소리’(수용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가 봉건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18세기에도 엄연히 성리학의 규범이 살아 있었던 시대였다. 노골적인 성행위는 물론 성적 일탈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들 노래를 책에 실으면서 김천택도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청구영언』 ‘만행청류’에서 이를 언급한 까닭이다.
“만횡청류는 노랫말이 음란하고 뜻이 하찮아서 본보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일시에 폐기할 수는 없는 까닭에 특별히 아래쪽에 적어둔다.”
- 『청구영언』 ‘만행청류’ 중에서
김천택은 이들 노래는 비록 ‘남녀상열지사’지만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폐기할 수 없다고 했다. 현실에서 즐겨 불리는 노래를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덕분에 이 18세기의 노래들은 오늘날에까지 살아남았다. 덕분에 우리는 노래에 담긴 현실과 풍자를 통하여 당대 사회와 세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누리집에서 『청구영언』을 내려받을 수 있다
국립 한글박물관 누리집 ‘발간자료’[바로 가기☞]에서는 『청구영언』 주해본과 영인본을 피디에프(pdf)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낯익은 조선 시대의 시절가(時節歌)와 조선 후기의 ‘남녀상열지사’를 만날 수 있다.
한글박물관의 특별전시회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는 9월 3일까지 계속된다. 기간 안에 서울에 들를 일이 있으면 이 전시회를 꼭 찾아보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글쎄, 기회가 닿기는 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2017. 5.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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