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로잘린드 마일스 ‘세계 여성의 역사’... ‘지워진 절반’을 복원하다
“역사적 기록이 보여주는 대로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도 여성들이 극도의 성폭력, 즉 그들의 육체는 오직 남자와 관계할 때만, 남자의 쾌락을 위해서만,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 제2부 여성의 몰락(204쪽) 중에서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일명 ‘n번방 사건’)은 ‘인터넷 및 통신 기술’(ICT)을 활용한 성범죄의 급속한 진화와 함께 성범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둔감을 날것으로 드러내 주었다.
이 사건 주범들의 왜곡된 성 의식은 로잘린드 마일스(Rosalind Miles)가 쓴 <세계 여성의 역사>의 기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굴절된 성 의식이 어찌 그들만의 것에 그칠까. 이 책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거기서 비롯한 범죄의 연원이 어디인가를 곰곰히 되돌아보게 해 준다.
“인류를 지탱해 온 ‘위대한 절반’의 사라진 흔적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단 이 519쪽짜리 역사책은 “세계사가 지워버린 가장 거대한 집단, ‘여성’들의 이야기”(출판사 책 소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역사 교과서 ‘인류의 태동’ 편에는 “원시인이 미래를 향해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딜 때 여성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논의를 펼쳐 나간다.
역사의 모든 순간에 여성이 있었다, 다만 지워졌을 뿐
역사는 도구를 사용하여 화살촉을 만든 이도, 동굴 벽화를 그림으로써 예술을 탄생케 한 이도 남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결과는 ‘사냥하는 남성’, 도구를 만드는 남성, ‘원시시대의 대초원을 활보한 남성’이라는 허상을 고착화했다. 저자의 제일성이 “요람을 흔들던 손이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마침내 펜을 들었다. 역사 속에 여성들도 있었다”가 된 이유다.
영국 코번터리 폴리테크닉에 여성학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문학 이론, 여성학, 소설 등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가 주목하는 곳은 ‘사냥하는 남성’의 반대편이다. 거기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발판을 확보하는 과업’을 묵묵히 수행한 여성이 있다. 저자는 “인류의 운명을 열어가는 열쇠는 여성의 노동력과 기술, 그들의 생물학적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수백만이 넘는 여성들이 매일 아침 일어나서 불을 밝히고, 음식을 준비하고, 인간과 동물의 식사를 제공하고, 농작물을 돌보았다. 그들은 집에서 요강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죽어가는 이들과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았다. 또한 집 밖으로 나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신전 계단을 쓸었다. (…) 그러나 바로 이런 이름 없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이바지한 덕분에 인류가 생존했다. 결코 찬양된 적이 없더라도 그것은 소중한 승리다. - 머리말(28쪽) 중에서
지은이는 역사학에서 인류학, 여성학 등 여러 인접 학문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지겨울 정도로 펼쳐 보이면서 우리가 배웠던 역사가 ‘인류’의 것이 아니라 ‘남성’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성은 거기 부재한 것이 아니라, ‘가장 학대받고 지워진 존재’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선사시대의 여성들은 사냥하는 “남성에게 식량을 얻기 위해 의존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입증된 것처럼 사냥(수렵)은 ‘식량 제공 수단으로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부족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식량의 80%를 공급한 이는 낮 동안 쉬지 않고 채집 노동에 나선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사냥하는 남성’이라는 개념은 인류 진화의 전 과정을 남성이 수행한 듯한 착시를 제공하고, 폭력과 파괴에 대한 남성들의 환상을 증폭한다. 그러나 사냥꾼 가설은 사업상 속임수에서부터 아내 구타, 강간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일상적인 공격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인류사에서 ‘성적 도구(재생산 등)’로만 등장하는 여성이 진화 과정에서 성공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진 것은 그 결과였다.
저자는 사냥이 혼자서 하는 모험이 아닌, 집단 전체의 ‘협업’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사냥하는 용감한 사내’를 떠올리지만, 사냥은 구석기 유적이 증명하듯 사냥감과 직접 맞닥뜨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벼랑으로 유인하여 구덩이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사냥 전과 사냥 중, 그리고 사냥 후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기술에 긴밀히 의지했다. 직접 행동이 남성의 몫이라면 사냥한 짐승을 절단하고 운반하는 일과 이를 의복과 천막, 덫이나 장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여성이 맡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사는 어떻게 ‘삭제’됐나
저자는 여성이 최초의 신과 사제, 그리고 시인이라는 신성한 지위를 최소한 2만5천 년 동안은 이어왔다고 말한다. 위대한 여신인 ‘배우자 없는 최초의 어머니’가 모든 신화를 완전히 지배했지만, 이 여신이 가진 권력과 중요성은 역사에서 은밀하게 감추어져 왔다. 거기서 파생된 여성 숭배도 훗날 신화나 이교로 치부되어 사라졌다.
그 시기에 여성은 ▲ 권력을 행사하고 남성은 보통 이에 복종했고 ▲ 돈과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했으며 ▲ 결혼 계약은 여성의 개인적인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을 동반자로 인정했다. 또 여성은 ▲ 육체적 자유를 향유했고 ▲ 여성들의 군대도 남자들처럼 싸웠으며 ▲ 여성들은 최고의 자유를 누렸다.
남성들의 반란은 석기시대에 진입한 약 3500년 전, 생명 잉태를 위한 ‘수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자신의 ‘남근’이 권력의 원천임을 깨달은 남성들은 차츰 여신과 여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최초 단계에서 홀로 존재했던 ‘위대한 어머니’는 두 번째 단계에서 여신의 배우자가 한 명으로 줄어들고, 세 번째 단계에선 ‘남신-왕-배우자’가 여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통치한다. 이 단계에서 ‘여신의 폐위’가 이루어지고 마지막 단계에선 남성-남신 혼자서 군림하게 되면서 여신-어머니-여성은 패배한다. 이른바 엥겔스가 말한 ‘세계사에서 여성들의 전면적인 패배’였다.
남성들이 장악한 권력은 종교의 외피를 입고 신성한 권능을 부여받아 마침내 가부장 체제를 완성해 냈다. 그것은 남성이 신의 지위에 오르면서 여성을 평범한 존재로 끌어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저급한 존재로 만드는 데도 성공한 것이었다.
주요 신앙 체계인 유대교, 불교, 유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하면서 남성들의 지배권을 조장하는 가치관을 확산했다. 여성들에게 출산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여성의 성욕을 부정적으로 바라봐오던 세상이 더 나아가 ‘순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하여 여성은 남편에게 ‘선택’되고 그녀의 남성 보호자에 의해 ‘결혼으로 증여되는 수동적인 관계자’가 됐다. 여성은 결혼에 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고, 결혼 안에서도 보호받지 못했으며 가부장적 법률의 희생자로 인간의 권리뿐 아니라 인간의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그다음 여성에게 가해진 것은 혐오였다. 생식 능력뿐 아니라, 어떤 남성 지배자도 여성을 자신의 집과 부엌, 침실로 들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상, 이들을 통제하려면 여성을 자신의 낮은 지위에 동의하도록 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고안된 도구가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였다.
여성의 ‘질’은 끊임없이 회복되는 에너지의 근원이지만, 남근은 실패하기 쉽고 불충분하며 한계를 갖는다.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얻었지만, 그 사실 앞에서 남자들이 자기 힘을 강탈하는 존재로 여성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역설이다.
여성은 ‘모성’으로 찬양되었지만, 그들을 어머니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전적으로 멸시되었다.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하여 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의 성’을 그들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강제결혼과 신부매매, 정조대 등으로 꾀한 생식기 통제, 여성 할례로 불리는 생식기 절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잊히고 전도된 역사의 복원
역사는 숱한 격동기를 거치면서 전개되었지만, 여성들의 삶만은 한결같았다. ‘남자들의 일은 밤이 되면 끝나지만, 여자들의 일은 밤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21세기에도 변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등 변혁의 시기에 여성들도 힘을 보탰지만, 그 과실은 모두 남자들에게만 돌아갔다.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 시골에서 도시로, 가정에서 공장으로 중심이 옮겨간 산업혁명 이후 여성은 이전에 갖던 “유연한 적응력과 지위, 자기 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여성들을 값싼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고, 직장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고 홀로 자녀 양육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권리를 ‘되찾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 사회와 맞서 그들은 자기 권리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운동가로 변모했다. “우리 여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그들의 발을 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한 노예 폐지 운동가 사라 그림케(Sarah Grirnke, 1792~1873)의 일갈은 절절하다.
지은이는 지워진 여성의 존재를 되살려낸 자신의 작업을 ‘페미니즘’의 역사가 아니고 ‘여성의 역사’라고 역설한다. 그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고답적·사변적 주장이 아니라, ‘잊히고 전도된 역사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그가 긴 논의를 희망으로 마무리하면서 역사에 대한 낙관을 제시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사랑, 투쟁, 일, 이것이야말로 세계 여성들의 과거와 미래, 즉 역사다. (…) 이 위대한 운동 노선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열등한 지위에서 좀 더 나은 지위로, 패배에서 승리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오르기 위한 투쟁이다.
2020. 4.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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