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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문학 교사의 책 읽기

by 낮달2018 2018.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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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써 온 글이 천 편이 넘었지만, 그 가운데 몇 편이나 '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시 부끄러움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 있긴 하다. 글을 쓴 때와 내용 분류와 관계없이 무난히 읽히는 글을 한 편씩 다시 싣는다.

 때로 그것은 허망한 시간과 저열한 인식의 수준을 거칠게 드러내지만, 삶의 편린들 속에서도 오롯이 빛나는 내 성찰의 기록이다. 나날이 닳아지고 있는 마음의 결 가운데 행여 거기서 예민하게 눈뜨고 있는 옛 자아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까.

 

누구에게나 그렇듯 성장기의 어느 순간인가에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던 왕성한 책읽기의 벅찬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진부한 일상을 일거에 허물면서 무엇이든 가능하리라 믿어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증과 유혹이, 더러는 방광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경이가 있기 마련이다.

 

 유년, 그 목마른 '책읽기'의 기억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게 그 목마른 책읽기의 계절은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던 열한 살 무렵에 찾아왔던 것으로 애매하게나마 기억된다. 교과서 외의 '읽을 거리'가 드물 수밖에 없던 시골에서 열한 살배기 어린이에게서 또래들과 어울려 뛰놀 시간을 앗아간 것은 이미 표지가 너덜너덜해져 버린 묵은 여성잡지와 다달이 배달되던 한 농촌잡지였다.

 

<여원(女苑)>(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같은 이름의, 현란한 상품광고로 반쯤 도배하고 나머지 반쯤은 출처가 모호한 '충격 독자수기''부부의 섹스 트러블' 따위의 선정적 기사로 덕지덕지 기운 잡지를 상상하지 마시라.)이라는 알 듯 말 듯 한 제목을 달고 있던 그 여성잡지는 그때 이미 출가했던 맏누이와 혼기가 꽉 차 있던 둘째 누이가 애독하던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지금도 어느 일간지에 네 칸짜리 만화를 그리고 있는 만화가의 것이라 생각되는 '마드모아젤 쁘띠'라는 만화를 읽었는데, 마드모아젤이 영어의 미스(miss)에 대응하는 프랑스 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물론 훨씬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 막 서른이 되었던 맏형이 구독했던 <농원(農園)>이라는 잡지는 앞서의 여원이 흑백표지의 옹색한 국판이었던 데 비해 천연색의 큼지막한 크라운 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거기서는 왈순아지매의 모습에다 이름만 바꿔 단 정운경의 '팔푼며느리'라는 만화를 읽었다.

 

그러나 그런 만화는 단순한 볼거리 이상이 아니었고, 보다 통렬한 자극으로 열한 살 짜리 초등학생을 압도한 것은 여원에 연재되었던 여류작가 정연희의 '목마른 계절'이나 강신재의 '그대의 찬 손', 그리고 작가가 기억되지 않는 '분수 있는 로타리' 따위의 애정소설 들이었다.

 

삽화와 함께 전개되던 성인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주종인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성인세계의 일단을 엿보고 있다는 가슴 뛰는 만족감과 함께 내 의식의 키가 성큼 자라있다는 착각에 야금야금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것은 연재소설이었고, 따라서 그 나른하고 달착지근한 얘기들의 끝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느 날인가부터 농원은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고 여원은 누렇게 바랜 묵은 잡지였으므로.

▲ 내 서가에 있는 마르께스의 소설들

여름방학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기억컨대, 그 시절의 여름은 유난히 더 더웠던 것 같았고, 툇마루에 앉아서 텅 빈 마당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자면 시간이 마치 느림보처럼 마당 구석을 슬금슬금 기어다니고 있는 듯했다.

 

 점심을 먹고 무료를 견디다 못해 이웃한 학교 운동장을 찾았을 때 만나던, 운동장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땡볕과 울타리를 따라 삥 둘러싼 키 작은 나뭇가지에 빽빽하게 들어붙어 쉬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들, 그리고 어느 순간인가 그 놈들이 연출하던 야릇한 일순(一瞬)의 정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신구문화사판 한국문학 '전집'

 

그 여름의 무료와 권태로부터 나를 구한 것은 역시 책이었다. 그 때, 우리 집 가운뎃방에는 쉰 듯한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초등학교 여교사가 세 들어 있었는데, 본가로 돌아간 그녀의 빈방에 한 질의 문학전집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낸 나는 무모하게 잠긴 방문을 들어내고, 한 권씩 그것들을 가져 와 읽어대기 시작했다.

 

신구문화사(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걸 용하게 기억하고 있다.)에서 펴낸, 좀 어두운 빛깔의 노란색(똥색!)의 하드커버를 한 그 전집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거기서 만난 세계는 나른한 연애담이 아니라 무언가 안전하고 상식적인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하고 불온한, 그러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이른바 전후(戰後) 소설로 일컬어지는 오상원의 '모반(謀反)', 서기원의 '암사지도(暗射地圖)', 손창섭의 '잉여인간(剩餘人間)' 등의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전후의 데카당스와 부조리 속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몽환 속에 깊숙이 침잠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낯선 곳에 혼자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책읽기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학교가 파하면 가능한 시간까지 학교 도서관에 파묻혀 있었는데, 그 때 읽은 작품들에 대한 기억들은 참 애매하다.

 

아마 그때 내가 읽은 책들은 대부분 '세계명작 다이제스트'라는 어림없는 제목을 달고 있었던 덤핑본(지금도 중등학교의 도서관을 둘러보라, 얼마나 형편없는 덤핑본들이 쓸데없이 서가를 채우고 있는가!)이 아니었나 싶다. 그 무렵 나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하루로 빼먹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 일기의 대부분들이 그 당시 읽었던 책에 대한 서투른 감상들로 가득 차 있었던 듯하다.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거의 대여섯 차례나 읽은 코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인간의 조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감명으로 남아 있다. 일제의 침략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을 지키기 위한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저항을 통해서 나는 인간의 '위대성''의로운 분노와 저항'을 통해 완성된다고 믿게 되었던 듯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애매하게나마 나는 '문학'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입학과 동시에 들어간 문학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아'를 의식하기 시작했고, 이어진 소설에만 치우친 책읽기와 끊임없이 '자아와 세계와의 불화'를 테마로 한 시건방진 글쓰기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는 거짓 만족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무렵, 동아리의 친구들에게 거의 '바이블'로 간주되었던 소설이 이동하의 장편, <우울한 귀향>이었다. 삼성문고로 출간(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책의 정가는 160원이다, 세상에!)되었던 그 작품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의 방황과 절망을 꼼짝없이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한 치졸한 일탈들을 얼마나 화려하게 연출하는가가 우리의 주 관심사여서 우리는 깡소주를 마시고 꽁꽁 언 몸으로 도시를 배회하며 제야(除夜)를 꼬박 새우기도 했다.

 

청소년기를 특징짓는 유치한 방황과 거짓 절망 사이에서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세상이 책 속의 그것과는 달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깨달음과 이어지는 무력감 속에서 이태를 허송한 뒤, 대학에 간신히 들어갔고, 곧이어 징집되었다.

▲ <난쏘공> 초판(가운데)과 최신판. 맨 오른쪽 삼성문고 <우울한 귀향>도 세로쓰기본이다.

군대에서, 특히나 모두 18주에 이르는 훈련 기간 동안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활자에 대한 갈증'이었다. '초전박살', '일기당천' 따위의 전투적인 구호로 뒤덮인 살벌한 병영에서 드문 것은 개인적 자유만이 아니라, 활자로 이루어진 '읽을거리'였다.

 

 훈련병에게 주어진 인쇄물은 고작, '군인의 길''야간경계 요령' 따위가 깨알같이 박힌 군인수첩 정도였고, 훈련장과 병영 곳곳을 채운 것은 '야간 전투수칙'이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의 거대한 입간판이었다. 그 질식할 것 같은 병영과 훈련 교장에서 나를 구원해 것은 교장을 굴러다니는 빛 바랜 상품 포장지였다.

 

 연무대의 각개전투 교장에서 진흙땅을 기다가, 꿀처럼 달디단 10분간의 휴식시간에 나는 발밑에서 주워든 라면이나 과자 봉지를 무슨 주문처럼 천천히 읽곤 하였다. 조리법. 500를 붓고 약 5분 정도 끊인다. 라면과 스프를 넣고 약 34분 더 끊인다. 이 때 파, 김치와 계란을 곁들이면 더욱 맛이 좋다…….

 

편식 독서를 넘어서

 

군대라는 폐쇄된 집단사회는 병사들이 그 완고한 수직적 명령체계의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대다 그것에 시나브로 적응할 때쯤이면 전역명령을 받는 그런 곳이다. 전역 신고를 하고 부대 위병소를 나섰을 때야 병사들은 비로소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병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곳이다.

 

33개월에 걸친 군 생활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은 책읽기는 몇 되지 않는다. 불침번 근무 때의 흐린 조명등 아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분노와 고통을 동시에 느꼈고, 이청준의 <작가의 작은 손>이란 에세이를 읽으면서 비로소 '삶과 문학'의 관계를 어렴풋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다시 돌아온 대학생활에서도 나는 '생존'에 바빠서 무언가 문화적인 삶을 전혀 누릴 수가 없었다. 4년간 통학을 했고, 주말은 꼼짝없이 집안일을 하면서 대학의 공기가 낳는다는 '자유'와는 무관하게 살았다. 틈틈이 읽은 여전히 문학 일변도의 책들과 전공 서적들 사이에서 나는 잔뜩 조로(早老)해 있었고, 졸업과 동시에 한 여학교로 부임했다.

▲ 을유문화사판 <황금의 가지>와 그 무렵에 사들인 사회과학 서적들

한 달에 한 번쯤 인근 도시의 큰 서점에서 많으면 일여덟 권, 적으면 대여섯 권의 책을 고르고, 그것의 합계액과 내 능력을 저울질 해보며 보낸 시간들이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무렵에는 내 독서가 가진 편협성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와 인문·사회과학 쪽의 책읽기에 힘썼는데, 그게 내 지성의 균형감각 회복에 얼마만한 이바지를 했는지는 잘 짚어지지 않는다.

 

다만, 어느 해 겨울 화랑교육원의 무슨 연수에 참여했다가, 강의 듣기를 포기하고, 을유문화사 판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그것도 세로쓰기에다 국한문 혼용의!) 상하권을 이 잡듯이 읽었던 게 그나마 기특한(어느 작가는 어떤 칼럼에서 최근에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완독한 걸 '자랑스럽다'고 쓰고 있다. 나는 그의 긍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고전의 완독이란 기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짓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80년대 중반에 뒤늦게 만나게 된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 특히 <베트남 전쟁>을 읽었을 때의 전율과 할라즈의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은 실천적 삶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드워드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나 마르크 블로흐의 <역사를 위한 변명>(그러나 그의 야심적 저작 <봉건사회>는 아직도 내 서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역사와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한 좌충우돌식의 난독(難讀)을 거치면서 나는 내 취향이 <황금의 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인류학의 보고를 훔쳐보는 재미에 몇 년간 푹 빠져 있었다. 마빈 해리스와 루스 베네딕트, 리챠드 리키와 요한슨, 헬렌 피셔를 읽었고 한국의 무속에도 한 동안 잔뜩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 내 서가의 <토지>. 출판사 네 군데서 간행돼 내게도 4종으로 남아 있다. 제1부는 세로쓰기의 지식산업사판. 제3권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 독서의 본령은 문학이어서, 이번 겨울에도 나는 딸애가 읽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 5부를 한번 더 읽었고, 서사 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감동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했다. [관련 글 : 대하소설 <토지>, 25년만에 완간]

 

 박경리, 마르께스, 그리고 신영복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삵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고교 시절, 한 문학 잡지에 연재되던 이 작품을 처음 만난 이래,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곤 한다.

 

80년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었던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파격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삶에 대한 고도의 상징과 은유를 교직(交織)해 내며 '위대한 상상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정확히 8번쯤 읽었다.

88년 평화신문에 실리면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쇠귀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한 순결하고 고귀한 영혼의 맑고 투명하고, 그러나 역사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사색의 깊이를 보여 주는 글이다.

 

 그는 '증오는 그것이 증오를 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 준다면서, 그러므로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일체의 '잡기'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다. 바둑이나 장기는 물론이고, 당구도 쳐 본 적이 없으며, 그 흔한 고스톱도 길을 잘 몰라 더듬거리는 수준이다. 그것들을 익힐 수 있는 조건이나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정작 체계적인 독서나 그것을 통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지도 못했으면서도 늘 '책읽기'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온 덕택이다.

 

 하여, 여전히 나는 도스토엡스키와 토마스 만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문학 교과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 본질과 의미의 언저리만 빙빙 돌며, 천박한 참고서류의 주변 지식만을 주절거리는 수준이다. 정말 제대로 된 책읽기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베스트 셀러 주변만 얼쩡거리고, 줄을 쳐 가며 읽으리라고 작정하고 산 여러 권의 책들을 빈약한 서가에 처박아 두고 있으며, 사십대 중반을 넘으면서 눈은 점점 침침해지고 그저께 읽은 책의 내용이 요령부득이 되고 마는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다.

 

헤밍웨이가 "아무리 애를 써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고작 '도스토옙스키의 현관'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고 갈파했던 그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 현관이 아니라, 그 담밑에라도 언제쯤 나는 서 있게 될 것인가. 언제쯤 나는 제대로 된 책읽기와 제대로 된 문학교사로 서게 될 수 있을까.

 

 

 1998.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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