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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진달래와 나무꾼, 그리고 세월……

by 낮달2018 2020.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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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과 진달래, 돌아보는 세월

▲ 진달래가 온 산을 수놓았다. 우리는 어릴 적에 이 꽃을 '참꽃'이라 불렀다.
▲ 할미꽃. 언젠가부터 이 꽃은 산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온산에 진달래가 한창이다. 산등성이마다 들불처럼 타오르던 진달래는 그예 도심까지 들어왔다. 강변에 조성된 소공원마다 선홍빛 진달래가 넉넉하다. 이제 막 꽃잎이 지고 있는 은빛 왕벚나무 물결 끄트머리에 불타는 선홍빛은 외로워 보인다.

 

내게 ‘진달래’는 여전히 ‘참꽃’이다. 봄이면 온산을 헤매며 탄피와 쇠붙이 따위를 주우러 다니던 시절, 만만찮은 봄 햇볕에 그을려 가며 허기를 달래려 보이는 족족 입에 따 넣던 꽃. 산에서 내려올 즈음엔 조무래기들의 혓바닥은 꽃잎보다 더 진한 보랏빛이었다.

 

참꽃, 그 아련한 동화

 

참꽃은 내게 아련한 동화(童話)다. 시골서 자란 이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것은 머물러 버린 유년의 길목을 아련하게 수놓는 추억의 꽃이다. 무덤들 주위에 다소곳이 피어나던 저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은 또 어떤가. 내가 중학교 졸업반일 때, 세상을 뜨신 할머니께선 내가 꺾어온 할미꽃으로 늘 ‘족두리’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참꽃은 무리 지은 군락만이 아니라, 때로는 몇 송이의 외로운 모습으로도 기억되곤 한다. 희한도 하지,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국어 교과서에 나온 동시 한 편을, 거기 삽입된 한 컷의 삽화와 함께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새 학기에 받는 국어책은 단순히 교과서가 아니라 훌륭한 동화책이었다. 나는 한 학기에 배울 내용을 하룻밤 새 다 읽어 치우곤 했던 것 같다. 2학년 때였는지, 3학년 때였는지는 애매하다. 어떤 나무꾼 노인과 진달래 한 송이를 나는 소박한 삽화 한 컷과 함께 만났다.

 

우리네 입에 잘 길든 그 7·5조 율격의 동시는 나뭇짐을 가득 얹은 지게를 진 노인이 그려진 삽화와 함께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노인의 나뭇단에 비스듬히 꽂힌 진달래 한 송이와 주변을 날아오르는 몇 마리 나비 떼. 그것은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의 장면처럼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낯선 나무꾼들의 기억

 

노인이 진 지게도 그렇지만, 나는 나무꾼들을 무심히 바라보지 못한다. 선녀를 지어미로 맞아들이는 불운한 나무꾼 얘기가 아니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나무꾼은 여럿이다. 한겨울이면 그들은 적을 때는 서너 명, 많을 땐 대여섯 명이 넘게 무리 지어 우리 동네를 거쳐 ‘조리봉’이라는 동네의 진산 깊숙이 들어갔다.

 

그들은 오후 서너 시,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면 지게 가득 잔뜩 엄청난 나뭇단을 싣고 우리 동네를 지나갔다. 때로 그들은 지서 앞에서 순경들에게 나뭇단 뒤짐을 당하기도 했는데, 지게 작대기로 지게를 괴어 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들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은 강 건너 고장에서 온 젊은이들이었다. 여전히 호롱불을 밝히고 살던 우리 마을과는 달리 강 건너 동네는 해방 전부터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 나올 때마다 불야성을 이룬 강 건너 저잣거리를 상상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마을마다 장성한 젊은이는 넘치고 일거리와 끼니를 이을 수단은 없었던 목마른 시절이었다. 남의 일을 거들어봤자 품삯은 고사하고 삼시 세 때 끼니를 얻어먹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던 때였다. 마을 앞에 샛강이 있고, 꽤 넓은 백사장 너머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강을 건너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룻배가 있었으니 나룻배를 타고 왔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사내들의 깡마른 몸매, 그은 얼굴빛, 무심한 표정들은 우리 동네 어수룩해 뵈는 청년들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강 건너 저잣거리의 냄새를 느꼈다.

 

지금도 한 짐 가득 진 지게 행렬이 좁다란 들길을 걸어가는 석양의 풍경을 나는 아련하게 떠올린다. 그들의 묵직한 나뭇짐 위에 찔러 넣은 굵은 나뭇가지에 댕그랗게 걸린 도시락 보자기가 흔들리던 광경도 잊을 수 없다.

 

▲  우리나라의 대표적 운반기구 .  양다리 방아와 함께 가장 우수한 발명품으로 불린다 .  사진은 남해신문(왼쪽)과 엠파스 포토 앨범에서

산업화에 묻힌 세월들……

 

강을 건너 이웃 고을의 깊은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던 청년들의 모습은 어느 해인가부터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가끔 내 유년이 이른바 산업화의 시기와 맞물리는 경계에 외롭게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초등학교를 마치는 거로 학력을 마감했던 숱한 큰아기들이 대구의 직물공장 노동자, 이른바 ‘공장뺑이’로 나가게 되면서 시골 마을은 고적해졌다. 아버지의 방앗간에서 일꾼으로 일하던 창식이 형님이 그예 해남에서 온 새댁과 함께 대처로 떠나게 된 것은 그 시기의 정점이었던 듯하다.

▲ 나무 한 짐을 거뜬히 지고 가는 촌부. 이런 풍경을 보며 우리는 자랐다. 사진은 국민뉴스

마을의 처녀들과 젊은이들이 대구로 부산으로 고향을 떠났던 것처럼 이웃 고을로 원정을 다녔던 강 건너 청년들도 대처로 나갔으리라. 해마다 봄이면 사방(砂防) 부역으로 나무를 심는 손길이 바빠지고 ‘애림녹화(愛林綠化)’ 구호가 요란해지면서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 일은 자연스레 줄었다.

 

집집이 연탄이 들어오고 샛강 가녘이 연탄재로 뒤덮인 쓰레기장으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몇 년쯤 후였을까. 이제 간벌한 나무를 말려 장작으로 쟁이는 일 외에 예전처럼 땔감을 구하러 산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을에 벌초하러 가려면 키 높이까지 자란 억새가 무성하고 무시에도 발밑에 깔리는 ‘갈비’(솔가리)가 푹신할 정도다.

 

도심에 피어난 진달래에 이어 학교 운동장 주변에도 철 늦은 철쭉이 봉오릴 틔우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의 인지 속도를 이미 넘어서 버렸는지도 모른다. 진달래를 참꽃으로 부르는 내 오랜 언어 습관도 세월의 변화 앞에선 무력해 보인다. 학교 뒤편의 숲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나는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그 유년의 나무꾼 할아버지와 나뭇짐 위에 꽂힌 한 송이 진달래를 떠올려 본다.

 

2008. 4.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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