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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함께 읽기

민들레, 민들레

by 낮달2018 2020.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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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걸어서 출퇴근하면서 자주 민들레를 만난다. 출근할 때는 꽃잎을 오므려 그리 눈에 띄지 않던 꽃이 퇴근할 무렵이면 거짓말처럼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마치 일부러 찾아가 뿌리를 내린 듯 민들레는 인도의 깨어진 블록 틈새에, 간선도로변 점포와 인도의 경계에, 주택가 골목의 담 아래에 옹색하게 피어 있다.

 

민들레는 국화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흔히 백성을 뜻하는 ‘민초(民草)’로 비유되는 꽃이다. 이 꽃은 겨울에 줄기는 죽지만 이듬해 다시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마치 밟혀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는 백성과 견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선원 노동자의 아내가 썼다는 “민들레의 정신”이라는 글이 새삼스러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까닭일 터이다. 지은이는 ‘소달구지와 경운기의 육중한 바퀴 밑에 깔리어도 잠시 누웠다가 어느 틈에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 앉는’ 이 꽃이 주는 ‘경이로운 감명’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너무도 쏙 빼닮은 민초’라는 데 있다고 말한다.

 

1995년에 노동가요 공식 음반 제작위원회가 만든 <노동가요 공식 음반 1>에서 내려받은 민중가요 “민들레처럼”을 들으며 나는 한 시절을 달구었던 열정과 신념, 그리고 투쟁을 생각한다. 그 투쟁의 한복판에서 온몸을 내던진 이 땅의 숱한 민들레 같은 젊음을 생각해 본다.

 


민들레의 정신

 

세상에 하고많은 길가의 잡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일찍 돋아나서 오가는 행인의 발에 밟히는 것이 민들레다. 밟히면 밟히는 족족 곧 문드러져 이승에서의 저의 생명을 주저 없이 마감해 버린다면 무슨 특별한 소감이 있으랴만, 민들레는 사람과 개가 밟고 지나가도, 소달구지와 경운기의 육중한 바퀴 밑에 깔리어도 잠시 누웠다가 어느 틈에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 앉는다. 그러기에 민들레는 자기를 눈여겨 바라보는 사람에게 무한한 삶의 의지와 경이로운 감명을 주는 풀이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언제부터 그렇게 불리었는지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이 ‘민들레’란 이름은 질경이, 꽃다지, 바랭이, 씀바귀, 쑥부쟁이, 방동산이, 냉이, 도꼬마리, 오랑캐꽃 따위와 같이 듣는 귓말이 평범하고 또한 아무렇게나 부르기에 편한 이름을 가져서 더욱 좋다.

 

다른 풀들에 비해 워낙 낮은 키 때문인지 ‘앉은뱅이 꽃’이라 불리는 이름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눈물겹다. 하도 작달막하여 이름조차 앉은뱅이 꽃이 되어버린 민들레는 노란 꽃 색깔 때문에 ‘금잠화’또는 ‘금비녀꽃’으로 불린다.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구석진 곳이나 쓸쓸한 벌판, 습한 밭두렁에 돋아 있는 이 하찮은 존재를 누가 그토록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게 이름 달아 준 것일까.

 

땅바닥으로 양면 톱날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내뻗은 방사상의 잎 한가운데서 움쑥움쑥 솟구쳐 올라간, 한 자 채 못 되는 꽃 대궁 위의 도톰한 황금색 얼굴. 그러나 앉은뱅이 꽃 민들레는 호사스러운 이름의 부질없는 무게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명예와 이익만을 탐내는 속세의 번잡스러운 모습에서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 있고자 하기 때문이다.

 

앉은뱅이 꽃이 금잠화의 이름을 탐내는 그 순간부터 이미 민들레는 제 영혼의 타락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하많은 꽃들이 별것 아닌 허영에 도취되어 게슴츠레 눈을 뜨고, 꼿꼿해진 머리를 들어 덧없는 바람결에 자기의 향내 나는 모습을 우쭐거리며 뽐낼 때, 민들레는 후미진 골짜기, 아직 채 녹지 않은 얼음 조각이 서걱거리는 구석에서 스스로의 높이를 최소한 낮추며 홀로 고즈넉이 사색에 잠긴다.

 

비록 민들레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다 할지라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튼튼한 뿌리의 마음을 가졌다. 아득하고 캄캄한 땅속, 저 깊은 지맥 속에 감추어진 한 모금의 촉촉한 생명수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굵고 실팍한 뿌리를 아래로 아래로 뻗어내렸는가.

 

이른 봄 한 포기 민들레 앞에 앉아서 그것의 뿌리 밑을 파 본 사람은 깨달을 것이다. 키 작은 민들레의 겸허한 모습을. 또한, 땅속 뿌리가 보여주는 그 질기고 강건한 삶의 깊이 있는 철학을. 이러한 민들레도 가까이 눈 여겨 들여다보면 밋밋한 꽃대궁에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붉은 반점을 감추고 있다.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제각기 하나씩의 슬프고도 가슴 저미는 사연들이 감추어져 있듯이.

 

잡초란 잡초는 모조리 이 땅에서 원천적으로 발본색원해야 한다면 독한 화학 제초제를 여기저기 함부로 부리고 다니는 서슬에 숨이 막혀 떼죽음당해버린 그 한 맺힌 서러움. 일없이 민들레를 구둣발로 밟고 서서, 밑창으로 이리저리 좌우를 짓이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그 말로써 이루 다 풀어낼 수 없는 뼈저린 고통의 시간들.

 

▲ 이철수 판화 '민들레'

하지만 민들레는 그 자신의 아픔을 매양 과장하지 않고 부는 바람 끝에 다만 묵묵히 나부낄 뿐이다. 말없이 나부낄 뿐만 아니라 억장이 무너질 듯 길길이 날뛰는 야수와 별반 다름이 없었던 지난 역사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는 오욕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민들레는 오늘도 그들의 씨앗을 무수한 전단처럼 바람결 속으로 띄워 보내는 것이다.

 

그 작고 희뽀얀 솜털들은 제각기 가벼운 날개를 하나씩 달고, 긴장된 표정으로 조국을 몰래 떠나가는 밀사들처럼 일제히 어디론 가를 향해 허공으로 둥실 떠가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포기의 늙은 앉은뱅이 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들의 어린 후손들은 저 산 너머 먼 곳까지 떠나보내는 그 참뜻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정원이나 온실 속에서 자라난 인공화보다 차라리 이름 모를 한 점 들꽃을 더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겉으로 소박하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비범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민들레를 나는 사랑한다. 이 앉은뱅이 꽃이야말로 한국 사람인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너무도 쏙 빼어 닮은 민초이기 때문이다.

 

김정옥(선원 노동자의 아내)

 

 

2008. 4.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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