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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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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운의 목소리로 듣는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

by 낮달2018 2020.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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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 1집>을 들으며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은 여느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 그의 목소리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비장감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을 뜨겁게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는 김구와 장준하와 문익환의 사자후를 대신 토하기도 하고 신동엽과 고은, 조태일과 김지하의 시를 읊조리며 우리를 당대의 가장 뜨거운 현장으로 이끌기도 한다.

 

나는 저서를 통해 그를 알았지만, 그가 뜨거운 낭송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았다. 어떤 경로였는지, 그의 시 낭송 1집 테이프가 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1989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89년이라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내걸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출범한 해다. 교육지표 사건이 아니더라도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 운동은 그에게 빚진 게 많다.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

 

‘진달래 산천’은 6·25로 인한 깊은 상흔을 진달래의 핏빛 이미지 속에서 그려낸, 신동엽 시인의 초기 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민족적 정서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우리 전설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아사달, 아사녀’를 불러냈듯, 이 시에서도 후고구려의 장수들을 끌어내고 있다.

 

시는 ‘진달래’가 핀 길가, 바위 모서리에 머문 ‘나비’ 한 마리를 제시하면서 전개된다. 부근 잔디밭엔 버려진 ‘장총’ 한 자루, 그 옆에 ‘당신은 잠이 들’어 있다. 진달래와 나비, 장총을 내던진 채 잠든 사람이 연출하는 풍경은 평화롭다.

 

그러나 이어지는 연에서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 의형제를 묻던’ 곳이라고 바위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그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으로 갔다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과 온종일 퍼부은 ‘탄환’과 ‘산골 비행기’의 기관포 따위는 이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환기해 준다.

 

내던진 ‘장총’과 ‘잠든 사람’이 연출하던 ‘평화’는 마지막 연의 ‘당신은 피 / 흘리고 있었어요’라는 서술로 쓸쓸히 무너진다. 그는 살아 있지 않은 사람, 거기 고인 고즈넉한 평화는 그것을 할퀴고 간 참혹한 전쟁의 실루엣이었기 때문이다. [ 시 전문 텍스트로  보기]

 

▲ 시인 신동엽(1930~1969)

이 시는 1959년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당시부터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실제로는 ‘목란’으로 불리는 함박꽃나무 Magnolia sieboldii)라느니, 빨치산을 묘사한 것이라는 등 불온성 시비가 일었다. 요샛말로 하면 ‘종북’ 혐의가 상당했다는 건데, 뜻밖에 시비는 더는 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햇가, / 두고 온 마을’의 ‘당신’이 빨치산을 연상케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진달래 산천’은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빨치산의 비극을 경어체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꽃다운 청년의 죽음을 한갓진 풍경에 머물지 않게 한다.

 

빨치산은 우리 현대사가 낳은 분단 모순, 그 비극을 온몸을 졌던 이들이다.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에서 ‘아사달, 아사녀’를 불러냈듯, 후고구려의 장수들을 끌어내어 민족 동일성 회복에 대한 소망을 내비친다. 그것이 화자가 젊은이가 쓰러진 바위가 ‘바람 따신 그 옛날’, ‘의형제를 묻던’ ‘후고구렷적 장수들’을 불러낸 이유다.

 

시를 통하여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래서 간명하다. 그는 전쟁의 비극성을 주목하면서 민족과 무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에 담긴 소망은 분단 60년을 넘긴 오늘에도 여전히 뜨겁고 아프다.

 

 

2007. 3. 12. 쓰고 2020. 3. 12.더하고 깁다


성내운(1926~1989) 교수

충남 공주에서 남. 경성사범학교와 서울 사범대를 거쳐 서울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문교부 수석장학관으로 일했으나 1963년, 모든 국민을 사병처럼 훈련 시켜서 순종형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제3공화국 교육정책에 반대하면서 군사독재 정권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1976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

 

박정희 정권이 1968년 공포한 ‘국민교육헌장’을 기조로 한 교육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1978)을 주도해 투옥.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원이 아울러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교육지표 선언은 당시 유신 독재의 시녀 노릇에 안주해 있던 교사들의 양심을 일깨웠고, 우리 교육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평가된다.

 

197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지만, 11월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언을 주도해서 계엄 정부에 수배당했다가 1980년 사면되어 연세대에 복직했으나 7월에 다시 해직. 이후 민주화 운동과 민중문화 운동, 교육 운동 등에 헌신하였다.

 

저서로 《인간 회복의 교육》(1982) 《세 학교의 이야기》(학민사, 198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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