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일 시인의 역사의식, ‘국토 서시’
조태일(1941~1999)의 <국토 서시>를 성내운 선생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다. 조태일 시인을 다시 기억 속에서 불러낸 것은 순전히 성내운 선생의 ‘마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한’ 목소리 덕분이고 턱까지 치받고 올라온 한미 FTA 소식 탓이다. [시 전문 텍스트로 보기]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문예 동아리 방에서였다. 시를 쓰는 친구들이 으스대듯 전해 주던 그의 <국토> 연작과 <식칼론> 따위를 통해서였는데 어렸던 때라 ‘멋있긴 하지만 좀 과격한, 괴짜 시인’ 정도로 그를 기억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시를 새로 들으면서 그가 이미 고인이 됐다는 걸, 그리고 70년대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던 이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1974년 고은, 황석영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설을 주도했고, 1979년 긴급조치 9호로 투옥된 데 이어 1980년 5월에는 계엄 해제 촉구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하고 계엄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다는 사실도.
유신과 뒤이어진 군부독재에 저항한 문인으로 김지하나 고은, 황석영 같은 이만 기억하는 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인지 모른다. 어쩌면 조태일은 동갑내기인 김지하의 그늘에 가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한 저항’을 노래한다. 특히 삶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제도적인 폭력에 맞서서 쓴 ‘식칼론’은 시대적 삶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세와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히 시를 ‘음풍농월(吟風弄月)’식 서정의 영역에 가두고 있던 뭇 시인들의 눈에는 그의 시가 ‘과격하고 불온’해 보였으리라. 서슴없이 ‘피’와 ‘칼’을 노래하는 조태일과 그의 서정은 80년대의 김남주 시인을 통하여 바야흐로 만개하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시가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은 ‘새 역사 전개에 대한 갈망’이다. 전편을 통해 시인은 ‘국토에 대한 사랑’이 ‘필연적’이며 ‘당위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여러 연에 걸쳐 ‘~수밖에 없는 일이다.’는 문장의 반복으로 국토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점층적으로 그것을 집약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국토에 대한 사랑이란 이 땅의 주인, 민중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조용히 발버둥 치는 돌멩이’,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혼’은 곧 ‘민중’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을 위해 시인은 ‘일렁이는 피’, ‘다 닳아진 살결’, ‘허연 뼈’까지 보태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다. ‘육체의 소진’은 그 사랑에 대한 시인의 뜨거운 긍정과 진정성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고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기어 커다란 북을 만들어’(‘그날이 오면’)도 좋다고 절규한 심훈의 정서와 비장하게 이어지는 대목이다.
시인은 민중의 이미지로 소박함, 생명력, 현실적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 등을 노래했다. 그것이 다소 ‘순응적이고 수동적’이라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그 비판이 무색한 것은 시인의 진정성에서 말미암은 깊은 울림 덕분이다.
시인은 갔지만, 그의 시와 민족에 대한 사랑은 그가 태어난 전남 곡성군 태안사 기슭에 건립된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에 남아 있다. 대처승인 태안사 주지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생전에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했다니 그의 말은 그대로 사실이고 역사가 된 셈이다.
나라와 여기 뿌리 내린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결딴낼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거침없는 침탈 앞에 벌거벗고 마주 선 이 땅, 이 ‘어머니 대지’의 순결한 마음과 그 고운 속살을 떠올리며, 성내운 선생의 목소리로 조태일 시인의 ‘국토 서시’를 거듭 듣는다.
2007. 3.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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