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 ‘묘비명’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의 시는 평범한 일상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 곡진한 삶의 흔적과 체취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발언은 낮으면서도 적지 않은 울림을 갖고 있다. ‘묘비명(墓碑銘)’은 어느 부자의 무덤 앞에서의 상념을 통해 ‘역사’와 ‘시인’을 노래한다.[ 시 전문 읽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기성세대로 편입한 혁명 세대의 우울한 초상을 그리고 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던 그들은 ‘살기 위해 살고’,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옛사랑이 피 흘린 곳’을 지나며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다. [시 전문 읽기]
누구 말처럼 ‘혁명은 끝나고 혁명의 분위기와 그 이삭만이 남은’ 세상은 쓸쓸하고 허전하다. 95년도였던가, 안동에서 베풀어진 안치환과 노찾사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만난 벗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었다. 안치환은 저 비장한 시절의 민중가요가 아니라, 아주 빠른 호흡의 신곡을 경망스러운 대중 가수들과 진배없는 몸짓으로 열창했고 대학생들은 자지러지는 비명으로 거기 화답했기 때문이다.
최루탄과 백골단으로 추억되는 저 한판의 대동제를 상상하고 공연장을 찾아온 한 떼의 늦깎이 운동권 교사들은 쓴웃음을 나누고 헤어졌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젊은이들은 우울한 시대와 그 징표를 노래했던 노랫말보다는 짧고 빠른 박자와 리듬에 더 익숙한 신세대였다는 걸, 이미 혁명의 시대는 ‘거(去)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사람들은 혁명을 잊었고, 혁명의 분위기와 그 이삭조차도 곁눈질하지 않는다. 문학판에서는 애먼 ‘후일담’이 무성하다가 그예 그것마저 시들해졌다. 우리들 옛사랑이 피 흘리던 곳을 스쳐 지나가며 우리는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부끄러워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2005. 10. 26. 낮달
* 덧붙임: 오늘은 공교롭게도 18년간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만주군 출신의 독재자가 그의 오른팔에 의해 목숨을 잃은 날이다. 그때, 나는 인천 부평의 한 부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전 부대원이 출동하는 바람에 밤새 말뚝 보초를 서야 했다.
최근 우리 현대사 학계의 논의는 그 독재의 종말을 가능케 한 정보기관 책임자의 거사가 결국은 유신 시대의 종말을 앞당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다.
아울러 “부마항쟁이 경상도가 아니라 광주 등에서 일어났더라면 전혀 다른 사태가 전개됐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지만, 그 가정은 전혀 틀리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꾸로 광주항쟁이 광주가 아닌, 대구나 부산쯤에서 일어났다면 신군부는 ‘유혈진압’을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인지……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일신의 안녕을 추구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라면 같은 시인의 '늦깎이'는 뒤늦게 삶과 사회의 모순에 눈뜨는 노동자의 모습을 노래한다. 그러나 시인은 <노동자> 대신에 <근로자>라는 어휘를 선택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진 계급의 한계일까, 아닐까.
200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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