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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후 20년

by 낮달2018 201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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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리고 20년

글쎄, 쇠귀 선생의 글은 모두 짙은 사색의 향기를 어우르고 있긴 하지만, 그가 쓴 글의 으뜸은 역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 실린 글 ‘비극에 대하여’를 읽고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0년 20일쯤을 감옥에서 보낸다면 이런 깨달음, 이런 인식의 지평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신영복 선생을 만난 게 1988년이다. 87년 6월항쟁의 과실을 어부지리로 챙긴 노태우가 올림픽에 명운을 걸고 있던 때였다. 3월에 4년간 근무한 여학교를 떠나 고향 인근의 남학교로 옮겼다. 전세 500만 원, 재래식 화장실에다 부엌이 깊은 집(가족들은 지금도 그 집을 ‘부엌 깊은 집’으로 부르곤 한다.)에 들었다.

 

그 당시 창간된 <평화신문>을 받아보았는데 그 지면에서 쇠귀의 글을 만났다. 서른셋, 이른바 학습능력도 괜찮고 감성도 위태하게 살아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뿅’ 가서 두고두고 읽고 있는데, 얼마 후 단행본으로 책이 나왔다. 햇빛출판사의 초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거기 실린 주옥같은 글을 나는 되풀이해서 읽었고, 몇몇 구절은 따로 뽑아서 메모해 두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선생의 저작을 나는 빼놓지 않고 읽었다. 서가에 어지럽게 널린 선생의 저작을 꺼내 보니 모두 7권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비롯하여 <나무야 나무야> 2권, <더불어 숲>, <여럿이 함께>, <강의>, <처음처럼> 등. 근간인 <청구회의 추억>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신영복 아카이브 참조]

▲ 쇠귀 신영복 (1941 ∼  )  ⓒ  한겨레

 

며칠 전 <한겨레>에서 신영복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년이란다. 그렇다, 그새 스무 해가 흐른 것이다. 1988년 8·15 특사로 가석방되었을 때 마흔일곱 살이었던 선생이 이제 예순일곱의 은퇴자가 된 것이다. 서른셋, 좌충우돌의 병아리 교사는 쉰을 넘겼다.

 

봉함엽서를 채운 그의 글들은 검열을 받았고 상당수는 그 과정에서 불허되었다. 그 때문에 “검열보다 더 강도 높은 자기검열”을 통과해야 했는데, 일부에서 지적한 ‘전투성 부족’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서신 발송 횟수는 징역 초기 4급일 때는 한 달에 한 번, 2급일 때는 네 번 등으로 제한돼 있었다.

 

“학교에 있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책에서 쉽게 읽히지 않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그처럼 짧은 지면에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압축하고 행간마저 글자 없는 의미 공간으로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일 터다. “괴테도 얘기했듯이, 강조나 과장보다는 (압축에 따른 표현의) 절제가 오히려 깊이 있는 공감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한겨레>(8.28.) 기사 중에서

 

강조나 과장보다는 (압축에 따른 표현의) 절제가 오히려 깊이 있는 공감’을 불렀다는 그의 술회는 그의 저작 중에서 유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언제나 넘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자란 게 낫다.

 

출소 후 20년,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재래”한 데 대해 그는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했음’을 지적하면서 ‘민주·변혁 역량을 아우르는 구심체를 꾸리는 일’이 과제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그는 ‘2008년 체제’가 오히려 그런 과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역사와 변혁의 가능성을 낙관하지 않고 있지만, 역사나 그 발전을 바라보는 선생의 시각은 조급해 보이지 않는다. 변혁의 주체로 바라보고 있는 민중에 대한 선생의 관점은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한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58쪽

 

선생은 우리 사회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며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 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 정부의 정책과 그 지향에 대해서도 그는 “지난 10년간의 변화에 대한 감각, 촛불시위에서도 드러난 젊은이들의 새로운 감각과 문화 의식을 잃어버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나날이 과거를 부정하는 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보수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현 정부와 집권 정당의 발걸음은 바야흐로 눈부신 바 있다. 그러나 그 분주한 발걸음 속에 묻힌 가치들,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덕목은 그것을 얻기 위해 치른 숱한 고통과 죽음들로 말미암아 더욱더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이른바 ‘87 체제’에서 ‘2008 체제’로의 이행이 뜻하고 있는 이 시대, 이 퇴행의 역사적 함의가 깊고도 무거워 보이는 까닭은 전적으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싶다.

 

 

2008.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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