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해원(解寃)의 제의(祭儀)’
한 차례 폭설이 지나갔다. 주변의 동료들이 겨레 하나 되기 운동본부의 금강산 산행에 묻어 다녀온 금강산도 설봉(雪峰)이 되었던 모양이다.
지난해 2월에 만난 개골(皆骨)의 추억
그들이 찍어 온 눈 덮인 설봉산에서 눈을 천천히 걷어내 보면서 날씨만큼이나 굳어 있는 남북 교류를 상기하고, 나는 지난해 2월 말에 만난 개골을 우울하게 추억했다. 그러나 미몽에 취한 듯 만난 개골산(皆骨山)의 황량한 골짜기와 금강산 호텔, 고성항 횟집에서 만난 볼 붉은 처녀들의 모습은 기억 한편에서 여전히 새록새록 살아 있다.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관광성 연수와는 통 인연이 없었던지라, 연수 연락을 받고도 나는 “그런가, 금강산엘 간다고?” 하고 심드렁하기만 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7년, 이미 휴전선 월경(越境)은 관광 호사가들에게는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분단 모순 그 질곡과 금단의 현장을 방문한다는 설렘이나 떨림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그런 건조한 감정을 확인하면서 다소 쓸쓸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남북 양측의 출입국사무소를 넘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권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적이긴 해도 거쳐야 했던 출국과 입국신고 같은 절차가 다른 체제, 다른 땅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환기해 주었던 것이다.
북방 한계선을 넘으면서부터 관광 전용도로를 따라 붉은 깃발을 들고 띄엄띄엄 서 있던 키 작은 인민군 병사들, 그들의 검게 탄 깡마른 얼굴과 의도적 무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민족 내부 교류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복합적인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뻗어 있는 전용도로는 주변의 마을과 도로들과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둘러싼 펜스의 아련한 연둣빛은 연도의 잿빛 겨울 풍경과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무슨 동화 속의 풍경 같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60년대의 낡은 흑백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연변의 낡고 오래된, 마치 창고처럼 보이는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행들은 관광 조장의 익살스러운 안내에 가끔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주변의 풍광에 대한 감흥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고 말을 아꼈던 듯하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긴 했지만, 마치 무례한 틈입자처럼 찾아온 관광객의 모습으로 겨레의 남루한 삶을 목도하고 있다는 자각은 결코 개운한 느낌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금강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금강산 온천을 향해 출발하던 셔틀버스 안에서였다. 호텔 주변을 아늑하게 둘러싼 곧고 키 큰 금강소나무 숲으로 난 도로를 가로질러 낯익은 북녘의 글씨체로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적힌 펼침막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차 뒤편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한번 살아보라구.”
물론 나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부터 아슬아슬하게 목구멍을 간질이던 불유쾌함의 정체가 조금씩 그 의뭉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듯해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구룡폭포와 상팔담(上八潭) 산행을 다녀올 때까지 나는 등산로 곳곳에서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과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례한 틈입자 같은 관광객의 모습으로…
우리 지역의 사람 좋은 교사들은 그들에게 ‘안동 간고등어’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거품을 물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그들을 향한 이남 사람들의 선의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부한 비유겠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부자 형과 가난뱅이 아우의 상봉에서 형의 슬픔과 안타까움, 안쓰러움은 충분히 이유 있고, 그만큼 살뜰할 터이다.
그러나 동기간의 정보다는 현실은 훨씬 무거운 법이다. 의심 없이 ‘한 살림 뚝 떼어줄’ 형편이 아닌 다음에야 그 해법은 만만치 않다. 한바탕 눈물 바람 다음에 형제가 맞닥뜨리는 것은 서로 가진 부와 가난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일 자신의 가난과 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인 것이다.
게다가 그 삶의 변수가 ‘이데올로기’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점점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도움을 준다고 하지만,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껄끄럽긴 매일반이다. 더구나 주는 쪽의 다른 가족들의 간섭과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면 오가는 보따리에 자존심이 걸리게 마련인 것이다.
곳곳에 ‘신성하게’ 서 있는 ‘수령님 교시와 흔적’을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충분한 방한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입성 초라한 안내원들의 해설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산을 오르내린 남쪽 관광객들은 새삼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구질구질한 가난이 자신의 여유와 부를 오히려 입증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섣부른 우월감 따위를 말이다.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동정과 연민도 온당치 않다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에게 나와 동료들이 두메산골에 기어든 ‘양복쟁이’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의와 경멸이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우리의 동정과 연민도 그리 온당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조금씩 풀어졌다. 제복을 입고 재바르게 움직이는 ‘접대원 동무’들의 모습을 줄곧 좇아 다니면서 나는 내내 미소를 깨물고 있었을 것이다. 밝은 빨간색 유니폼과 살구색 스타킹을 입고 신은 날씬한 처녀들은 곱게 화장한 모습이었다. 대체로 볼연지를 강조하는 등 붉은 색조가 강해서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촌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처녀들은 매우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냉면 맛은 남쪽과 썩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연히 이것저것 묻고 싶어하는 이방의 손님들을 주의 깊게 응대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이남의 습관대로 냉면을 잘라 달라는 요구에 “평양 냉면은 그냥 드셔야 합네다”라고 대답하는 처녀 앞에서 우리는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들은 무엇보다 진지했고 당당했다.
옥류관 입구에서 발목을 드러내는 짧은 개량 한복에 하이힐을 신은 키 큰 접대원 동무는 점심 맛나게 드셨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그러나 음식 맛보다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했다.
오후에 문화회관에서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1시간 30분이 언제 흘렀는지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공연 시간 내내 나는 울음을 삼켜야 했다. 너무 격하게 목이 메어 와서, 마치 마법에 걸린 듯했다. 무엇 때문에 이리 눈물이 나는지, 기쁨과 감동으로 탄식하면서도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재주를 팔면서도 당당한 그들의 눈물겨운 자존 앞에 나는 울었다
우아하게 왼팔을 치켜들고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답례하던 자그마한 몸집의 단원들, 그들이 짓던 미소,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조형미들, 초인적 기예 앞에 환호하며, 손뼉을 쳐대는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내내 소리죽여 울었다.
나는 지금도 내 눈물을, 내 오열을 설명할 수 없다. 누구는 그들의 초인적 기예 뒤에 숨은 인고의 시간과 그 고통을 떠올리고, 누구는 개인의 삶을 규정해 내는 체제의 억압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편벽한 자본주의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놀라운 기예와 자랑, 말 없는 긍지와 자부가 그들의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뛰어넘으려는 눈물겨운 자존으로 이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배부른 이남의 관광객들에게 재주를 팔면서도 잃지 않는 그들의 당당함이, 그들의 재주 앞에 과장된 찬사를 바치면서도 시혜자의 연민과 동정을 벗지 못하는 남쪽 사람들의 근시가 가슴 아팠다.
마지막 밤, 장단항의 고성항 횟집에서 광어회와 함께 마신 진로소주와 “안동은 창원 지나 있냐?”고 묻던 볼 붉은 접대원 동무들, 그 처녀들의 엉뚱한 질문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강산 호텔의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를 잊을 수 없다. 호텔 로비에 있는 술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스물한 살의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반쯤은 취해서 이렇게 말했다.
“혜영씨, 남쪽에도 예쁜 여자들은 많아. 그러나 그들은 달라. 그들에게는 당신들에게 있는 건강함과 순수가 없어.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의 대답은 나를 간단히 재워 놓았다.
“선생님, 좋은 말씀은 다 골라 하시누만요.”
내가 그녀와 수작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마다 그녀와 격의 없이 어울리는 걸 본 내가 반쯤은 시샘하는 기분으로 “원, 사람들을 경계할 줄도 모르고…”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이렇게 반문했다.
“사람이 왜 사람을 경계합네까? 선생님.”
이튿날, 만물상을 오르는 대신 나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둘러보는 것으로 금강산 구경을 마감했다. 첫날, 나는 일찌감치 마음속에 꿈꾸어 온 금강산을 지워 버렸다. 겨울이라 그야말로 산은 개골(皆骨), 모두 뼈만 앙상해 황량했고, 중첩된 깊은 골짜기와 빛 때문에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 것도 마땅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상으로만 그렸던 금강의 풍광은 훗날 좋은 계절에 다시 만나자고 나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곧 다시 오게 될 거야. 나는 우정 자신을 위로했다.
짐을 꾸려 호텔을 나서면서 나는 함혜영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 또 오시라요.”
“혜영씨 잘 있어요. 내 곧 다시 오지.”
이남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의 도어맨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호텔을 떠났고 오후 세 시께 다시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땅만 이북일 뿐, 금강산 단지를 구성하는 것은 ‘현대’거나 모습을 감춘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세기만의 왕래를 가능케 한 힘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증오와 저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얼마든지 치우쳐도 좋다”
금강산에서의 2박 3일. 나를 포함한 교사들 640여 명이 만난 것은 한갓진 겨울 명산이 아니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온기와 체취였다. 함혜영 같은 접대원뿐만 아니라, 삼일포를 함께 걸었던 구조대 청년의 수줍던 미소를, 거칠고 공격적인 억양의 말씨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동포애를 아무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공정하다기보다 치우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의도된 ‘과잉 친절’과 한겨레라는 핏줄에 기대는 ‘과장된 감동’이 오히려 다른 체제와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단 60년의 세월이 이 땅에, 겨레들의 가슴에 남긴 증오와 저주의 흉터와 생채기들을 아물게 하고 지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얼마든지 더 치우쳐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에 앞서 저마다 핏줄을 관류하는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조그마한 해원(解寃)의 씻김굿이라고 보아도 좋을 터이다.
2007. 1. 9. 낮달
금강산을 다녀온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곧 다시 오마고 함혜영 동무에게 한 약속을 쉽게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금강산이 막힌 것은 불과 이태 후인 2008년 7월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보수 정권 9년 만에 남북 관계는 얼어붙었고 교류를 물론 핫라인까지 끊어졌다. [관련 글: 1998년 오늘-금강산 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남북 평화를 위협하는 걸림돌로 북핵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간이 또 얼마였던가. 다행히 남북의 화해 협력을 통해 항구적 평화를 추구하려는 문재인 정부가 들인 공이 헛되지 않아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교류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2006년 금강산을 떠나면서 나는 곧 아내와 함께, 봄이나 가을에 금강을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황량한 ‘개골(皆骨)’의 풍경이 못내 아쉬워서였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가능하면 빨리 금강을 다시 찾아 거기서 민족의 명산, ‘금강(金剛)’이나 ‘풍악(楓嶽)’을 재회하겠다고 말이다.
내가 찾으려는 건 물론 금강산의 풍경만은 아니다. 나는 금강산 호텔 접대원 함혜영 동무와 수줍은 미소로 삼일포를 함께 걸었던 구조대 청년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비록 거기 없을지라도 또 다른 함혜영이 우리를 맞아줄 터이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거칠고 공격적인 억양의 말씨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동포애를 거듭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2019. 1. 21.
'이 풍진 세상에 > 다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플 만점 여중생 반대편엔 ‘루저’가 우글 (0) | 2019.02.26 |
---|---|
운명, 혹은 패배에 대하여 (0) | 2019.02.23 |
사진첩, 함께한 시간과 가족의 발견 (7) | 2019.01.14 |
‘착한 커피’ 혹은 더바디샵 (0) | 2019.01.04 |
문학 교사의 책 읽기 (0) | 2018.12.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