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사례’를 ‘보편적 사례’로 포장하는 언론 보도
“‘유학 無 사교육 無’ 여중 1년생 토플 만점”
일요일 오전 인터넷에 접속하자 포털 대문에 걸린 기사 제목이다. 늘 이런 게 뉴스가 되는 세상이긴 하지만 씁쓸한 기분을 어쩌지 못한다. 여중 1학년생이 미국 교육평가원(ETS)이 주관한 지난달 24일 iBT(internet-Based Toefl) 토플시험에서 120점 만점을 받았다는 기사다.
나는 토플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다. 그런 시험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시험에 응시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평균 78점(세계 평균 79점)이라는 한국인의 토플성적을 고려하면 어린 학생이 이룬 성과가 얼마나 ‘대단하고 장한 일’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토플 만점’이 물론 중요하지만, 이 기사가 던지는 더 핵심적인 메시지는 ① 14살짜리 여중생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며, ② 이 학생이 해외 유학이나 영어 사교육의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영어 사교육과 해외 연수가 필수가 되어버린 ‘영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니 이는 ‘대단’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토플 만점, 해외 연수·사교육 없이도 가능하다?
포털 대문에서 이 뉴스를 본 순간 나는 그 뒷이야기가 훨씬 궁금해졌다. 14살짜리 여자애가, 그것도 ‘해외 유학은 물론 사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 중학생이 토플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이 뉴스를 구성하고 있는 게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과 같은 ‘우연’이 아니라면 그 ‘필연’의 증거들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들은 그 아이가 ③ 말도 많던 ‘국제중학교’인 대원중 1학년생이며 ④ 4살 때 영어로 쓴 일기 <나는 특별한 아이인가>(웅진북스)를 펴냈고, 방송 영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영어 신동’으로 불리며 자랐다는 것 등이다. 이쯤 되면 이 기사의 ‘가치’는 반감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그렇지! 난 또 무슨, 강원도 산골 아이라고!
마지막 증거 ⑤ 는 “영어 유치원을 보낸 적도, 과외를 시켜본 적도 없다”던 아이의 어머니가 ‘전직 영어 교수’라는 사실인데 까짓것, 이것쯤은 접어줘도 좋다. ‘딸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접하며 싫증 내지 않도록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라는 그 어머니의 언급도 ⑥ 쯤에 들어갈 만한 배경이 아닌가.
글쎄, 과문하지만 서울에 산다고 해서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를 국제중에다 진학시키려고 하지 않을 터이다. 국제중학교로 진학시킨다는 것은 그 만만치 않은 학비 부담을 포함하여, 아이에게 영어로 진행한다는 수업을 감당할 만한 어학 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수학능력이란 학생뿐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까지 확장된 개념인 것이다.
‘딸에게 해준 가장 큰 것은 많은 영어 동화책을 사다 준 것’이고, 그것은 ‘관심만 있다면 어떤 부모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작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아이어머니는 겸손을 자랑했다. 그러나 영어 동화책쯤이야 누구나 사다 줄 수 있지만, 그걸 읽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아이의 능력이라고만 말할 것인가. 그 어머니의 겸사(謙辭)는 자녀에게 동화책을 사주지 못하는 부모에겐 힐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
이 기사는 해마다 수능시험 최고 득점자를 소개하는 우리 언론 풍토로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소식이다. 최고점을 받은 수험생의 “‘과외’보다 ‘학교 수업’에 충실했다”는 언급은 판에 박힌 얘기이긴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공교육’의 중요성을 환기해 주는 긍정적 의미도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이 기사는 우리 시대의 화두인 ‘영어’가 반드시 ‘해외 연수’나 ‘과외’를 통해서만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강조하는 것으로 새길 수도 있겠다.
‘특수 사례’를 ‘보편·일반적 사례’로 ‘성공 담론의 확대 재생산’
그러나 나는 이런 종류의 기사가 가진 함의는 여전히 ‘승자의 논리’와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승자들은 자신이 거둔 승리는 당연히 ‘땀과 열정’,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비전’의 결과라고 여긴다. 그것은 숱한 실패자를 향해서 그들의 패배가 ‘자신의 무능과 나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흔히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여러 종류의 입지전적 ‘성공·승리담’은 그러한 담론들을 확대 재생산 하면서 지극히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이들 이야기를 ‘보편·일반적 사례’로 부당하게 바꾸어낸다. 예의 저작들은 그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오도하는 셈이고 순진한 독자들은 즐겨 그 허망한 신화에 편승해 잠깐 동안의 대리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진술은 한 명석한 수재의 발언이지, 누구나 갈고 닦으면 이를 수 있는 일반적 사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명문고와 대학을 우등으로 다녔다는 이의 ‘7막 7장’은 한 사회 엘리트의 출세 과정이었지, 갑남을녀들이 겨냥할 수 있는 삶의 도정은 아닌 것이다. 결코, 이들의 성공을 깎아내리거나 시샘하는 게 아니다.
‘훌륭하게’(‘명문대 진학’이 반드시 포함된 개념이다) 세 아이를 길러낸 여성학자가 아이들이 “믿는 만큼 자라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정한 조건과 환경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달동네나 외진 두메산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자란 뭇 아이들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어지는 ‘성공 이야기(석세스 스토리)’ 붐은 그칠 수 없는 서민들의 꿈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어, 또 다른 ‘루저’를 양산하는 ‘표준’이 되다
그러나 세상에는 실패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들의 실패는 99%에 못 미치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유효한 변수들에서 이미 성공하는 사람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어서이기 십상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서민들이 너나없이 진입하는 ‘밥과 술을 파는 식당’은 비슷한 조건으로 동분서주해야 하는 동업자들이 차고 넘치는 ‘레드오션’이니 실패의 가능성은 시작 때부터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사업의 승패를 결정짓는 게 만약 ‘노력’과 ‘성실’이라면 이 땅의 숱한 서민들은 모두 성공의 성채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변수 앞에서 그것은 이미 무력하다. 성공을 유지하는 게 ‘땀’이 아니라 ‘총알’이라는 사실, 돈을 버는 게 ‘돈’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 그들은 실패를 인정하고 전을 걷어야 하는 것이다.
열네 살짜리 여자애가 토플 만점을 받았다는 이 기사는 최근 한 지상파 방송에서 촉발된 ‘루저’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키 180cm를 기준으로 거기 미치지 못한 이들을 ‘패배자’로 규정한 이 황당한 사태는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계급 고착화 현상에 대한 현실적 은유로 읽힌다.
취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우리 시대의 대학 졸업생들이 스펙 확보를 위해 기를 쓰지만 만족스런 성과를 얻는 게 쉽지 않다는 토익과 토플 점수를 생각하면 중학교 1학년생이 얻은 토플 만점은 마치 만화나 신기루처럼 여겨진다. 어느덧 영어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다른 ‘루저’를 양산하는 표준(스탠다드)이 되어버린 것이다.
점수와 경쟁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이 사회진입의 장벽 앞에서 이 땅의 대다수 젊은이는 필연적으로 루저가 될 수밖에 없다. 토플 만점을 받은 아이의 해맑은 얼굴 위에 정처를 잃고 길 위에 서 있는 청년들의 어두운 얼굴들이 겹치는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2009. 11.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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