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혹은 패배, 그리고 분노
‘땀’이 성공의 열쇠다?
“천재는 1%의 영감,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발언은 숱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질주하고 있는 이들과 그들이 지켜 온 신념을 끊임없이 고무해 왔다. 그리고 한 사회나 시대를 규정짓고 있는 제도나 그 모순과는 무관하게 자기 목표를 이룬 소수의 ‘입지전적 인물’들에 의해 그것이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입증되어 온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에디슨의 발언은,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그 함의(含意)로 이해하는 게 옳다는 지적은 물론 당연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세상은 성공과 승리의 이면에 존재하는 땀의 역할만을 과장해 바라보며, 모든 실패의 원인을 ‘나태와 태만’으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패배를 예비하고 있는 사회적·제도적 결함과 모순 앞에서는 애써 눈을 감는 것이다.
한 사람의 천재나, 승리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의 목록은 만만치 않다. 그가 태어난 사회의 공기와 그 시대 정신에서부터, 그가 가진 선천적 지능과 재능, 후천적 교육과 경험, 외모와 인상, 그를 만들어 온 정치·사회·문화·경제적 상황과 그 변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녹록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목록들은 한 천재나 승리자의 탄생과 그것의 신비성과 위대성을 증명하는 소품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성공과 승리이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상황 변수는 물론, 승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명멸해 간 숱한 조연들의 역할이 아니라는 얘기다.
승리자들은, 그리고 늘 그들 편인 세상은 숱한 실패자를 향해서 그들의 패배가 ‘자신의 무능과 나태’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자기네 승리의 원인은 당연히 ‘땀과 열정’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와 비전’인 것이다.
흔히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여러 종류의 입지전적 ‘성공·승리담’은 그러한 담론들을 확대 재생산 하면서 지극히 ‘특수한 사례’에 불과한 이 이야기들을 ‘보편·일반적 사례’로 부당하게 바꾸어낸다. 예의 저작들은 그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오도하는 셈이고 순진한 독자들은 즐겨 그 허망한 신화에 편승해 잠깐의 대리 만족을 구하는 것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진술은 한 명석한 수재의 발언이지, 누구나 갈고 닦으면 이를 수 있는 일반적 사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명문고와 대학을 우등으로 다녔다는 이의 ‘7막 7장’은 한 사회 엘리트의 출세 과정이었지, 갑남을녀들이 겨냥할 수 있는 삶의 도정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어지는 ‘성공 이야기(석세스 스토리)’ 붐은 그칠 수 없는 서민들의 꿈을 방증하는 것일까.
그러나 세상에는 실패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들의 실패는 99%에 못 미치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다른 유효한 변수들에서 이미 성공하는 사람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어서이기 십상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서민들이 너나없이 진입하는 ‘밥과 술을 파는 식당’은 비슷한 조건으로 동분서주해야 하는 동업자들이 차고 넘치는 ‘레드오션’이니 실패의 가능성은 시작 때부터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게 만약 ‘노력’과 ‘성실’이라면 이 땅의 숱한 서민들은 모두 성공의 성채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변수 앞에서 그것은 이미 무력하다. 성공을 유지하는 게 ‘땀’이 아니라 ‘총알’이라는 사실, 돈을 버는 게 ‘돈’이라는 걸 깨달을 때쯤, 그들은 실패를 인정하고 전을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열쇠는 ‘땀’이 아니라 ‘총알’‘’이다
이명박 내각 후보자들의 재산 명세는 그러한 명제를 명쾌하고 증명해 준다. 그들은 새벽밥을 먹고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제때 밥을 먹지 못한 채 일에 파김치가 되지 않아도 그들이 가진 부동산과 예금은 끊임없이 황금알을 낳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보증하는 변수는 아무래도 든든하고 확실한 자본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계급(계층)’이다. 우리 겨레는 전통적으로 혈연에서는 족외혼(族外婚)을 지향해 왔지만, 계급에서는 철저하게 족내혼(族內婚)을 따랐다. 평강공주와 혼인한 온달이나, 선화를 만났던 맛둥[서동(薯童)]의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이듯 이제 우리 사회의 혼인은 당사자 간의 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계급 간 부와 권력의 확대 재생산 기제로 기능하고 있다. 혼인은 권력과 권력, 또는 부와 권력의 결합으로 이를 통해 피차간의 결핍을 기우면서 그것의 크기를 키우려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양극화’는 바로 이러한 경제력에 기초한 판짜기의 결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사회 정의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악순환의 결과이기도 하다. ‘배가 터지도록 잘 사는 사람’보다 ‘밑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의 수는 훨씬 많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의 심화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 따위는 교과서에나 등장하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는 걸 입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성공신화의 본고장인 미국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최근 <비비시(BBC)>는 빈곤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한테도 부유 계층으로 상승할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미국 사회의 믿음은 점차 신화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인들은 사회 밑바닥 출신이 부를 움켜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것이 유럽 여러 나라보다 높은 경제적 불평등을 견디게 한다고 지적돼 왔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 두뇌집단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하위 20% 소득계층(1분위)에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6%만이 최상위 20% 계층(5분위)으로 상승하고, 42%는 최하위 계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이는 미국 사회의 계층이동 가능성이 1950~60년대에 견줘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분노, 패배의 운명에 대한 거역
미국에 이민한 한국인 중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판 신화의 주인공이 된 이가 드물지 않으니 이런 소식은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한낱 꿈으로 전락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미국이 그러할진대 이 땅의 상황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세상은 모든 상황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서민에게 그들의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길 강요하고 있는지 모른다. 부와 가난의 대물림, 승자독식의 패러다임 앞에서 운명과의 한판 싸움이란 언감생심, 패자와 낙오자의 결기쯤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빈후드’를 그리면서 정권 교체를 결정했던 다수 대중의 선택은 시방 정처를 잃기 시작한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어쩌면 루빈 후드가 아니라 ‘노팅엄의 영주’거나 그의 오른팔 ‘기스본’에 더 가깝다는 걸 눈치채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그 조짐은 미국산 쇠고기로, 보험 민영화로, 한미 FTA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끝난 삼성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는, 그리고 이어진 삼성의 이른바 ‘쇄신 계획’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사실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해 준 듯싶다. 흔히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무리’로 기득권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그 한 줌에 의해 나머지의 삶이 좌우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1:99의 논리가 그나마 적용될 수 있는 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시대의 계층(급) 구조가 아닌가 말이다. 언제쯤 99%에 이르는 절대다수가 1% 소수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에 따른 삶을 살게 될까.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단지 학문적 ‘레토릭’(수사)에 불과한 것인가.
좋다. 세상이 승자의 독식 구조라는 걸 인정하자. 그럼 나머지는. 운명의 그늘에서 주어진 실패와 절망을 되씹어야 하는 패배자들의 분노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분노가 있어야 할 곳은 자명하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맨몸뚱이, 그 숫자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아주 ‘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터이다. 이를테면 선거판의 선택에서, 동네 투표소의 기표소 안에서, 혹은 주류의 수구 언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 다수의 여론으로. 그것은 역사 이래 늘 소수에 의해 규정되어 온 자신들의 삶을 다수의 의지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세상 도처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패배의 운명론에 대한 위대한 거역이 되어야 할 터이다.
2008. 5.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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