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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998년 오늘-금강산 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by 낮달2018 2023.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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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98. 11. 18. 동해항에서 현대 금강호가 북한 장전항으로 출항

▲ 1998년 11월 18일 동해항에서 실향민,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 '현대 금강호'가 북한으로 출항했다.

19981118일 오후 544, 동해항에서 실향민과 관광객, 승무원 등 1400여 명을 실은 28천 톤의 대형 유람선 현대 금강호가 북한 장전항으로 출항했다. 분단 반세기, 금단의 땅을 향하여 돛을 올린 금강호는 250분에 북방한계선을 넘었고, 19일 오전 6시 금강산의 관문인 장전항에 닿았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게 된 관광객들은 사흘 동안 구룡폭포와 만물상, 해금강 등을 돌아보고22일 오전 625분 동해항으로 귀환했다. 이후 금강산 유람선 관광은 20039월 육로관광이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분단에 이어 전쟁까지 치른 남북한이 민족의 명산 금강산을 매개로 시작한 이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공이었다. 사업에 관한 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 실향민 출신의 재벌 총수는 남북이 교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금강산 관광, 금단의 땅을 열다

 

그는 19891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했고 19986월에는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 50대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10월에 다시 방북한 그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할 수 있었고 1달 후 마침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것이었다.

▲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은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북한을 방문, 교류의 물꼬를 텄다.

200116일부터 3년 동안은 한국 최초의 호텔식 테마 여객선 설봉호를 이용하여 해로 관광으로 이루어졌다. 금강산 관광이 자리를 잡으면서 금강산 지역은 20021123일에 금강산관광지구라는 특별행정구역으로 명명되었다.

 

육로관광로 이어져 195만명 왕래, 2008년 관광객 피격으로 중단

 

20039월부터는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는 역사적인 육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버스를 이용하는 금강산 관광은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자살, 사스 사태, 민간인 민영미 억류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후 타협 끝에 재개되었다.

 

20056월에 금강산 관광객은 100만 명을 돌파했다. 현대아산은 금강산 권역 개발 계획을 북한에 제안했고 2006년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해금강에서 원산까지를 관광특구로 조성한다는 종합계획으로 교류의 폭을 한층 넓히는 것이었다.

 

20083월부터는 자가용을 이용한 승용차 관광도 가능해졌다. 관광 교류는 꾸준하게 이어져 2008년 말 기준으로 통산 관광객 수는 195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돌발 사건이 이 관광 교류를 멈추어 버렸다.

 

2008711일 새벽, 해변 산책을 하던 관광객(박왕자)이 금지된 구역에 접근하게 되어 북측 군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사고 이후 정부는 이튿날인 12일부터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였고 이후 10년째 관광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 육로관광으로 금강산을 찾을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남북출입사무소.
▲금강산의 모란봉 교예단. 이들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나는 내내 소리 죽여 울었다.

교육부가 실시하는 금강산 교원연수로 내가 금강산을 다녀온 것은 2006년이었다. 설렘과 긴장 속에서 넘었던 군사분계선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1월의 설봉산(雪峯山)은 제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가능하면 빨리 아내와 함께 풍악(楓嶽)을 찾으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이태 후에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내 계획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화회관에서 관람한 모란봉 교예단 공연을 잊지 못한다. 공연이 볼만해서가 아니라, 꿈결처럼 흐른 1시간 30분 동안 내내 눈물을 삼켜야 했다. 무엇이 그리 슬펐는지,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환호하며 손뼉을 쳐대는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내내 소리죽여 울었다.

 

겨레로서 북한의 동포들과의 만났던 금강산을 나는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해원(解寃)의 제의라고 표현했다. 흥청망청하는 자본주의 남한의 배부른 동포로 가난한 사회주의 북한의 키 작고 깡마른 동포를 만난 그 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관련  글 : 2006 겨울과 봄 사이, 금강산 ]

 

관광중단 10년째, 관광재개를 ‘관계 복원의 실마리'

▲ 금강산 부근 고성군의 석호 호수 삼일포. 신라의 사선(四仙)이 삼일간 이곳에서 놀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0년째인 지난 711, 경실련통일협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남북경협 기업의 피해 확산을 막고 한반도 평화 회복을 위해 정부는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관계 회복에 나서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훼손되고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들은 문 대통령이 베를린 평화구상을 통해 비정치 분야에서부터 관계 복원을 이루자고 했음을 상기시키며 금강산 관광이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평범한 주민끼리 만나는 금강산 관광이야말로 긴장 완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핵으로 인한 남북 경색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남북 대화는 재개되어야 한다. 19년 전,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함으로써 오랜 금단의 벽을 허물고 낮추었던 것처럼 지금 중단되었던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는 것은 남북 교류를 잇는 가장 손쉬운 방법의 하나일지 모른다.

 

10년도 전에 나는 뒷날 가을 금강산을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이'(정비석 '산정무한')게 하는 그 단풍산, 풍악을 만나리라고. 미루어 두었던 그 금강산행은 언제쯤이나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 금강산 삼선암. 2019년 열린 남북사진전 '금강산 가는 길'에 북측이 제공한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2017. 11.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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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아산, ‘금강산 관광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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