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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사진첩, 함께한 시간과 가족의 발견

by 낮달2018 2019.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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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첩에 만나는 가족과 세월

▲ 가족 사진첩. 사진으로 찍어 오린 것이고, 아래 사진들은 스캔한 것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귀가하니 아내가 딸애와 함께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권의 사진첩 중 가족사진만 따로 모은, 좀 두꺼운 놈들이었다. 거의 모두 손수 찍은 사진인데도 새삼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늘 사진을 바라보는 것은 그걸 찍을 때의 느낌을 되새기는, ‘감정의 복기(復碁)’ 같은 거라고 생각해 왔다. 10년이나 20년쯤의 시간이라면 그걸 되돌릴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사진이란 놈은 마치 주마등처럼 혹은 파노라마처럼 우리가 고단하게 밟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펼쳐주기도 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걸 어쩔 도리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사진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거기 담긴 한 시절의 풍경들, 거기 고인 감정의 결들을 마치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 몇 남지 않은 아버지의 사진. 그나마 잘린 데다 걸음마를 시작한 손녀가 주연이다.

시골에서 나서 자란 데다 부모님께서도 옛날 사람이라 내겐 백일이나 돌을 기념하는 사진 따위는 물론 없다. 폐경기 무렵에 우연히 얻은 새카맣고 볼품없던 막내여서 굳이 사진을 박아 둘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유년 시절이나 초등학교 적의 사진도 없기는 매한가지다. 중고등학교 때 사진은 드문드문 있는데, 그것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다. 사진 찍기가 일반적인 문화가 되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몸소 사진을 찍은 게 첫애를 낳고 나서다. 형님의 사진기를 빌려 와 몇 날 며칠 동안 아이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이 가족 사진첩의 일부다. 내 것으로 사진기를 장만하게 된 것은 초임지였던 한 여학교에서였다.

 

일제 펜탁스를 월부로 샀는데, 그걸로 한 이삼 년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찍었다. 틈이 날 때마다 아이들 일상을 사진으로 남겼고 그걸 인화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다. 바쁘게 살긴 했지만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산과 강, 내와 들을 찾았으며 그때마다 열심히 아이들을 사진기 앞에 세우곤 했다.

▲ 어머니. 평생 근면과 성실, 그리고 놀라운 자존심으로 꼿꼿하게 사신 분이다.

아내와 딸애가 방안에 가득 펴 놓은 사진첩은 그러니까 그런 한때의 ‘바지런’의 결과물인 셈이다. 사진첩에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시차 없이 재현되고 있었고 마치 거짓말 같은 우리들의 젊음이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천천히 사진첩을 넘기면서 우리는 그 멎어버린 시간을 미소를 머금고 오래 바라보았다.

▲ 세 살 터울의 오누이는 거의 싸우지 않고 자랐다.

사진첩의 갈피 갈피마다 담긴 건 우리가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20, 10……, 사진첩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반복되고 세월은 물처럼 흘러간다. 거기 나날이 달라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우리는 타인처럼 낯설게 바라보았다.

 

몇 장 되지 않는 부모님의 사진은 무심코 지나갈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사진조차 남지 않은 게 마치 그분들이 건너온 팍팍하고 고단한 삶처럼 느껴지니 회한은 깊고 서럽다. (이렇게 쓰는 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곁에 오래 계시다 가신 어머니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훨씬 크다.

 

아버지께선 간암으로 세상을 버리셨다. 아직도 아버지의 모습은 늘 내겐 돌아가실 즈음, 낡은 여름 양복을 걸치고 계신 창백한 실루엣으로만 떠오른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게 “양복을 한 벌 사 드릴걸.”이다. 미욱한 자식의 때늦은 후회는 서글프기만 하다.

 

딸아이가 겨우 걷기를 시작할 무렵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없어진 고향 집 뜰 위를 아장거리는 아이를 찍었는데, 귀퉁이에 손녀를 바라보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우리 내외는 마음이 흥건해진다.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도 마찬가지다. 어느 해였던가, 어떤 계곡에 가서 찍은 사진인데 어쩐지 쓸쓸한 표정을 짓고 계신 듯한 게 마음에 가시처럼 걸려오는 것이다.

▲ 어딘지 모르겠다. 누나의 키가 한뼘은 더 크다.
▲ 겨울, 지금은 없어진 고향 집에서.모처럼 눈이 내렸다.
▲ 안동댐에서 아들 녀석. 이 아이는 지금 군에 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마음도 자별하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 내외의 젊은 시절이니 거기 고인 도저한 세월의 무게를 우리는 성장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어버이가 겪어온, 때론 행복하고 때론 고단했던 세월과는 무관하게 아이들은 온갖 모습으로 자신들의 성장을 증언한다.

 

단칸방 시절의 좁은 방안에서, 전세 살던 단독주택 처마 밑에서 남매는 의좋게 어깨동무를 하거나,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린다. 그 아이들이 입은 어떤 옷들, 내복들, 물고기가 그려진 여름옷, 이를 갈던 때의 딸애가 입은 연보랏빛 원피스, 그런 갖가지 장면 장면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딸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어느 날이었을 게다. 아이는 아비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학교에 좀 오셔야겠는데요. 그게 열 살짜리 계집애의 말 같지가 않아서 잠깐 뜨아해 하는데, 아이는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때 왜 그 애가 울었는지 지금은 잊어 버렸다.

▲ 오누이의 사이는 유난히 좋았다. 셋집(왼쪽)과 대구 달성공원(오른쪽)에서.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애의 울음소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숨죽인 울음은 아이가 세상과 만나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통과의례였을지 모른다. 그처럼 사진은 단지 거기 인화된 순간만이 아니라 그 순간과 이어진 연속적 삶의 장면들을 하나씩 차례차례 떠올리게 해 준다. 때로 사진은 거기 드러난 장면과는 무관하게 한 시절, 한 순간의 기억들을 어렵사리 되살리기도 한다.

 

아들의 초등학교 적의 사진 몇 장은 그 애의 어질고 순한 모습을 뚜렷하게 환기해 준다. 아빠, 우리 먹은 볶음밥 있죠. 그거 보통이었어요, 곱빼기였어요? 벌초를 다녀오는 길에 아이는 뜬금없이 아비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게 보통인지, 곱빼기인지가 궁금했던 건 아니다. 아이는 그런 방식으로 만족스러웠던 식사와 아비에 대한 애정을 넌지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진첩에서 어느 날부터 성큼 자란 아이들의 모습이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사진의 양은 급격히 줄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같이 할 시간도 줄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아진 탓이다. 아이들도 인화된 사진에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원인의 일부가 되겠다.

 

사진을 많이 남겨 주셔서 고맙다는 딸애의 공치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곧 아이들은 새로운 날갯짓으로 우리 곁을 떠날 터이다. 제각기 지아비와 지어미를 만나서 다시 스스로 아비, 어미가 되는 ‘세대의 순환’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버이의 사진첩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한 장 두 장 옮겨 갈 것이다. 그들이 장만한 좀 더 두껍고 세련된 새 사진첩으로.

 

사진첩은 그 시간적 순차성과는 무관하게 한 가족의 역사, 그들이 함께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어찌 거기 고인 게 다만 시간뿐이겠는가. 사진첩의 갈피마다 담긴 것은 한 가족이 공유한 시간과 공간의 결을 통하여 다져진 가족의 유대와 피의 친연성(親緣性)이며, 가족이라는 ‘피의 둥지’를 통해 확인하는 조건 없는 ‘맹목과 본능의 사랑’인 것을.

 

 

2007. 5. 8. 낮달

 

 

너무 사적인 이야기여서 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촌놈이어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세대여서일까. 이런 식으로 자신과 주변을 드러내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고 민망하다.

 

아내는 물론이거니와 딸아이는 위의 사진 외에 다른 사진을 싣는 것을 꺼렸다. 내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아이들 어릴 적 모습을 통한 내 한갓진 회고가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니, 굳이 성장한 아이들 사진을 쓸 일은 애당초 없었던 셈이다.

 

오늘은 무슨 이름 붙은 날이다. 지난 주말에 장모님께 다녀왔으니 따로 찾을 어른이 없는 대신, 딸애가 선물과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아비에게 전화를 걸며 흐느껴 울던 아이는 스물몇 살의 처녀가 되었고, 우리는 그리 대단찮은 꽃 한 송이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어버이 일반’이 되었다. 세월의 힘은 참 세기도 하다.


이 글을 쓴 지 12년이 지났다. 아이들은 30대 중후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주변에 개혼(開婚)조차 못한 이가 거의 없어 아내와 나는 ‘좋은 처부모, 시부모’가 될 준비는 끝났는데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며 농을 하곤 한다.

 

혼인이 필수인 시대는 아니지만, 본인들이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가까운 시간에 좋은 반려를 만나길 바라고 있다. 순서로 보면 우선 딸아이를 여의는 게 우선이니, 2019년에는 듬직한 청년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2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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