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만어사의 ‘어산불영(魚山佛影)’ 답사기
지난 주말에 만어사(萬魚寺)를 다녀왔다. 나는 일찍이 밀양 어름에 그런 절집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웬 만어사? ‘만’은 무어고 ‘어’는 무어야, 물고기 만 마리라고? 난생처음 듣는 만어사를 만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전적으로 온 나라의 크고 작은 산을 밟으며 거기 깃든 절과 암자를 찾아온 부지런한 친구 덕분이다.
만어사는 삼랑진읍에서 들어가는 게 쉽다. 그러나 우리는 밀양시 쪽에서 만어산(萬魚山)을 넘었다. 좁고 가파른 임도를 따라 산을 넘는데 기분이 아슬아슬했다. 만어산은 해발 670m의 평범한 육산(肉山)이지만, 삼랑진읍 용전리의 7부 능선쯤에 자리한 만어사 덕분에 적잖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만어산 정상에서 서쪽 비탈로 내려오다가 급하게 길을 꺾자, 중턱에 꽤 널따란 평지가 나타났다. 오래된 느티나무 위쪽에 절집의 지붕만 외롭게 솟아 있다. 차를 대고, 주차장에 내리자, 마치 거짓말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 그 돌의 바다에 우리는 아연 압도당하고 말았다.
흔히 ‘너덜’,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이라 불리는 암괴(巖塊) 지대가 길이 500여m, 너비 100여m에 이르는 계곡에 무슨 전설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의 형태도 빛깔도 예사롭지 않다. 저물녘의 햇살 아래 그것은 마치 살아 꿈틀대는 상어나 고래 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바위들이 ‘만 마리 물고기’, 만어(萬魚)다. 만어사는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 설화의 현장이다. 설화는 가야의 수로왕과 이어진다. 이곳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가 가락국의 옥지(玉池)에 살던 독룡(毒龍)과 사귀면서 뇌우와 우박을 내려 네 해 동안 오곡이 결실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 소리가 난다.
수로왕이 이를 기려 이 산에 만어사를 창건했다. 전설은 그때를 46년(수로왕 5)이라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만어사는 창건 이후 신라 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고려와 조선조에 각각 중창되었다고 한다.
전설에도 불구하고 절집 경내에 가득한 바윗돌은 내력에 대한 궁금증만 더한다. 그래서 새로운 설화가 만들어졌던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해 낙동강 건너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의 땅이라고 일러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온갖 종류의 고기떼가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집이었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숱한 고기들은 크고 작은 바윗돌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전하는 내용이다.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되었다는 서북쪽의 큰 바위는 멀리서 보면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그림자’[불영(佛影)]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불영에 관한 내력’도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이야기는 그러나 전후 맥락이나 상황으로 미루어 절집 아래 가득한 만어석(萬魚石)을 시원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곳 암괴는 지질학적으로 2억 년 전인 고생대 말에서 중생대 초 사이의 퇴적암층인 청석(靑石)이라고 한다. 그것은 수로왕이나 부처님과는 무관하게 거기 ‘있었던’ 바윗돌이다. 거기다 고기와 용, 부처님의 이적(異蹟) 따위를 붙인 것은 세월과 함께 변신을 거듭해 온 사부 대중의 상상력인 것이다.
어산불영 설화에 담긴 관점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고 한다. 하나는 신라가 ‘부처의 나라’였다는 ‘불국토 사상’, 나머지는 용왕과 신화적 통치자(수로왕)도 부처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불교 우위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서로 넘나드는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만어석은 두들기면 맑은 쇳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鐘石), 혹은 경석(磬石)이라고도 한다. ‘철분을 함유해 그렇다’고도 하지만 청석에서 쇳소리가 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절집 마당 아래 아스라하게 펼쳐진 너덜의 바윗돌마다 돌로 두드린 흔적들이 허옇게 드러난다.
친구가 돌을 들고 바위를 두들겨본다. 멀쩡한 돌을 두드리는데도 소리는 돌에서 흔히 나는 둔탁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 목탁이나 종, 혹은 풍경에서 나는 소리로 변주되는 느낌조차 있다. 절을 찾은 이들이 적지 않았건만 그 소리는 너덜에 깔리는 오후의 적막을 무심히 깨는, 아니 오히려 그 적막을 심화하는 듯하다.
바윗돌에서 우러나는 경쇠소리……. 그것은 이 절집이 가진 상상력의 원천일지 모른다. 한 시인이 노래한, 만어사와 만어사의 너덜에 ‘먹 장삼 쓰고 전생의 물결로 다가’온 일만 개 바위, 그 사랑과 그리움도 다르지 않으리라.
만어사에 와서
-꿈 같은 절망 11
유재영
햇빛도 젖은 마을을 어쩌지 못할 때
먹 장삼 쓰고 전생의 물결로 다가와
나를 무너뜨리고 그대를 무너뜨리는
만어사 일만 개 바위들아
사랑한다는 것은 비로소 눈물이구나
낯익은 새털구름에도 흔들리고
달빛에도 마구 쓰러지는 마른 풀잎이구나
바위여, 무슨 인연으로 여기까지 떠밀려와
다시 천 년을 맑은 눈으로 잠을 이루는
물고기가 되었느냐
가린 것 없이 맨몸으로 부활을 꿈꾸며
우리의 젖은 마음을 더욱 젖게 하며
그렇구나, 사랑하는 사람아
잊고 살수록 기억날 일이라면
마침내 그리움의 흰 마침표 되어
만어사 일만 개 바위들을
빈 것으로 채우리라
만어사 말고도 영남 일원에는 동래의 범어사(梵魚寺), 포항의 오어사(吾魚寺) 등 ‘고기 어(魚)’ 자 항렬의 절집이 있다. 항간에는 이를 김해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雙魚文)과 견주면서 가락국 김수로왕과의 관련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세 절집에는 모두 물고기 이야기가 담겨 있긴 하다. 그러나 정작 이들 절집 중에서 만어사를 빼면 수로왕은 등장하지 않는다.
범어사의 이름은 금정산 산마루의 금빛 우물에 놀던 ‘금빛 물고기’ 설화로부터 왔고, 오어사의 ‘내 고기[오어(吾魚)]’는 원효와 혜공의 법력 다툼에서 비롯된 ‘물고기’일 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는 수로왕 강림 신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나 딴 얘기로 보이고 두 선승이 다투었다는 ‘고기’도 법력의 증거일 뿐이다.
‘물고기’는 사찰 장식과 불전 설화의 주인공으로, 부처와 보살의 권화(權化, 중생 구제를 위하여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남) 등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절집 연못에서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원천적 자유’의 상징이고, 풍경과 목어는 ‘수행’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만어사 너덜에 운집한 물고기는 자유와 수행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세상과 중생을 구할 부처님의 권화로 비길 수 있겠다.
앞서 용왕의 아들이 변했다는 높이 5m가량의 뾰족한 자연석인 미륵돌은 이 절집의 미륵전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전각은 미륵돌을 건물 안으로 들여 지은, 밖에서 보면 2층인데 안에서 보면 층이 없고 천장이 하나인 통층(중층) 구조다.
여기 빌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도 생산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미륵돌엔 수태를 꿈꾸는 사람들이 붙인 듯한 동전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이들을 구한다는 이 미래불은 만어산 등성이 가장 낮은 곳에서 사부대중의 바람에 임하였던가.
부처를 믿고 의지하는 민초의 마음은 무애(無礙), 막힘과 거침이 없다. 그들은 절집에 와서도 부처와 무속의 믿음을 구분하지 않는다. 절집마다 토착 신앙을 받아들인 까닭이 거기 있다. 마치 남근석처럼 생긴 뾰족한 바위를 미륵이라 우러르며 거기 ‘기자(祈子)’의 치성을 드리는 이 오래된 믿음을 부처님인들 어찌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랴.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초라한 맞배집에 불과한 대웅전에 비기면 크고 웅장한 미륵전의 모습은 거기 바쳐진 선남선녀들의 기원과 원망(願望)의 결과이리라. 미륵전 앞으로 펼쳐지는 너덜에 가없이 널린 바윗돌의 행진은 마치 거기 나린 부처님의 감화와 이적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뭇 산이 그렇듯이 이 절집에도 돌이 흔하다. 절집은 제법 높은 돌 축대 위에 평지가 펼쳐지는데, 대웅전도 미륵전도, 그사이에 낀 삼성각도 몇 단의 돌 축대 위에 앉았다. 전각들이 그 규모에 비해서 커 보이는 느낌도 그런 구조 때문인 듯하다.
절의 동쪽 대웅전과 삼성각이 선 돌 축대 아래에 보물 466호 만어사 삼층석탑이 서 있다. 고려 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탑이다.
삼성각 오른쪽 산비탈에 박힌 커다란 바위에 ‘아미타부처님(마애석불) 조성 불사’ 펼침막이 붙어 있다. 그 바윗돌에다 아미타불을 새겨 모시자는 불사인 모양이다. 절집의 불사란 거기 바쳐진 사부대중의 기원과 비례하는 걸까. 대웅전 앞 축대 아래 양쪽에 나란히 새로 세운, 전체 경내의 분위기를 생뚱맞게 뒤집고 있는,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진 석등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대웅전 앞마당, 책상에 앉아 불사 시주를 받고 있는 스님 옆으로 해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다시 내려다보는 너덜의 바윗돌이 저무는 햇살 아래 수더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녘과 봄비 내리는 날 만어사 주변에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는 ‘밀양 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언제쯤 만어산 중턱을 두른 운해 속에 펼쳐진 바윗돌의 장관을 만나볼 수 있을까, 우리는 아쉬움으로 어산불영, 그 설화의 산사를 떠났다.
2009. 2. 23. 낮달
작년 12월 10일에 기사 한 편을 쓰고 나서 거의 두 달 보름 만에 쓴 기사다.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쓴 게 2006년 12월 6일이니 뉴스게릴라 입문 2년이 넘은 셈이다. 그런데도 그간 쓴 기사는 고작 58편에 그친다. <오마이뉴스>에는 오백 편, 천 편 이상의 기사를 쓴 고수들이 수두룩하니 이건 명함을 내밀 주제도 되지 않는다.
기사 한 편을 쓰는 데 드는 시간이 내겐 뜻밖에 만만찮다. 문장 하나라도 맘에 차지 않으면 진도가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엔 한갓진 답사기 따위가 기사가 되는 게 신기하기도 해서 부지런히 썼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터는 심드렁해져 버렸다.
무슨 전문 기자처럼 사건·사고 기사를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게 그거’인 답사기 따위나 끼적이고 있는 게 어쩌면 민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깨달음도 아닌,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를 중언부언해서 무엇을 할까, 싶어서다.
이런 얘기를 주절대는 게 민망하긴 하다. 시민기자라는 이름을 걸고 있긴 하지만, 나는 자신을 저널리스트의 자리에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일상의 삶을 글로 기록하기를 즐기는 소시민일 뿐이다.
두 달쯤 지나니, 그래도 글을 쓰고 사진을 고르고, 그걸 편집해 가며 기사를 올리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쓴 글인데, 참……, 좀 민망하다. 감동도 울림도 없는 글을 일종의 관성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글과 관련하여 누군가로부터 말을 듣는 건 즐거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그게 자신의 한계라는 걸 받아들이며 사는 편이니까…….
흰소리는 줄인다. 여기다 댓글을 막아놓은 뜻은 전에도 밝혔듯, 편하게 읽고 가시라는 뜻에서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너희는 닥치라고?” 하고 반문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따로 용서를 빌겠다.
200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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