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김천시 증산면 평촌2길 불령산 청암사와 수도암 기행
절집을 순례하는 불자도 아닌 사람이 나라 안 절집을 모두 다 섭렵할 수는 어차피 없는 일이다. 이런저런 명찰을 돌아보았거니 하지만, 기실 우리에겐 못 가본 사찰이 한번이라도 디뎌 본 절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인데도 가보지 못한 절로 나는 청암사(靑巖寺)를 든다.
가보지 못한 절, 청암사
김천시 증산면에 있는 이 오래된 절집을 미처 가보지 못한 까닭은 단순하다. 김천에는 직지사만 있는 줄 알고 있다가 이 고찰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멀리 북부 지방에 옮아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가까운 동네로 돌아왔지만 차일피일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청암사를 찾은 것은 지난 10월 초순이다. 가을이 깊다고 할 수도 없고, 단풍이 들기에도 이른 애매한 때였다. 청암사는 구미에선 지척인 듯싶지만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가 아니라 가는 길이 워낙 외지고 구불구불했다.
가야산 북서쪽, 김천시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의 경계에 우뚝 솟은 수도산(修道山, 1,317m)은 불령산(佛靈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이 산 북쪽 중턱, 해발 500미터쯤에 청암사를 품고 있는 골짜기를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한다. 여기서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란 뜻이다.
숙종 비 인현왕후와의 연
직지사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절이지만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이 창건한 이후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은 잊힌 절이었다. 청암사가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건 조선 시대다. 인조 때 화재로 전소한 것을 재건한 이래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와 각별한 연을 맺게 되면서부터다.
궁에서 쫓겨나 서인으로 있던 인현왕후가 이곳 청암사 극락전에서 기거하면서 기도드렸던 인연으로 청암사는 왕실과 가까워진 것이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이후에 불령산 적송 산림은 국가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청암사에 내려와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암사의 사세가 크게 일어난 것은 고종 때다. 당시 주지가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떤 노 보살이 자기 사후에도 3년 동안 염불을 부탁하면서 큰 시주를 하였다. 이 시주로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한 이후, 청암사 극락전에선 염불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암사는 조선 시대 회암 정혜 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 불교 강원(講院)으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이 전통은 고봉(高峰), 고산, 우룡 스님 등의 유명한 강백(講伯, 강사)으로 이어졌다. 1987년에는 청암사 비구니승가대학이 설립되어 백 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는 청정도량이 되었다.
천년 고찰이라고 해도 한동안 잊힌 절로 남아 있었던 청암사는 직지사의 말사다. 그런데도 이 절집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그 울창한 숲과 시내가 어우러진 불령동천의 풍치와 더불어 비구니 스님들의 강원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비구니’에 대한 한갓진 상상
여성 수행자인 비구니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연면하다. 구도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비구든 비구니든 다르지 않을 터인데도 유독 비구니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갖가지 상상으로 얼룩지는 것이다. 남자로서도 쉽지 않은 출가를 감행한 여인들의 ‘파르라니’ 깎은 머리,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상 조지훈 ‘승무’)은 한 여인의 삶에 드리운 곡절을 드라마틱하게 암시하지 않는가 말이다.
실연의 상처를 안고서든, 삶에 대한 절망과 좌절로 인해서든 여인들의 출가는 모든 속가 남성들의 흥미를 돋우고도 남음이 있다. 같은 경상북도에 있고,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더 알려진 청도 호거산 운문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도 비슷한 내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비구니’라는 이름은 여인의 실존,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 일찍이 백석 시인이 노래한 ‘여승’은 일제 강점기 농촌의 몰락과 ‘섶벌’처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현실을 아프게 형상화했다. 비교적 짧은 시 속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된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인들의 상상은 다만 한갓진 일일 뿐이다. 구도의 길이 남녀가 다르지 않은 까닭이고, 운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암사에서도 정작 비구니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비구니들은 선방 깊은 곳에서 저마다의 화두를 붙들고 참선 수행 중인 것일까. 내가 청암사에서 만난 비구니는 해우소 앞에서 청소하고 있는 볼 맑은 이와, 극락교 앞을 지나는 이의 뒷모습뿐이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는 길옆 계곡은 맑고 깨끗했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도 기우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을 냈다. 청암사는 대웅전과 정법루 앞으로 꽤 깊은 시내가 흘러 절집의 공간을 양분하고 있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대웅전이 있는 큰 절에서 극락교를 건너면 범종각이 시내에 면해 있고, 그 뒤 언덕 너머에 극락전과 보광전 등의 전각이 있는 암자다.
청암사 대웅전과 보광전 등의 전각은 대부분 20세기에 조성했다. 1911년의 화재 뒤에 대웅전과 보광전 등을 중건한 것이다. 대웅전 앞뜰에 서 있는 다층석탑도 중건 때 성주 땅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전각과 불탑은 모두 경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운 오후 네 시의 절집은 고요했다. 일백 비구니가 수행 정진하는 공간이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절간에 고인 적요는 아주 조금씩 시간의 켜를 밀어내는 듯했다. 대웅전 앞에 날렵한 품새로 서 있는 다층석탑조차도 그 적요를 어쩌지 못한다. 4m가 넘는 작지 않은 탑인데도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날씬한 몸피 탓이다.
시내 건너 언덕 위에 호젓하게 올라앉은 암자, 마치 여염집처럼 보이는 전각이 극락전, 인현왕후가 복위를 기다리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집인데 측면 두 칸은 2층 누대를 설치한 복합 건물이다. 돌담에다 일각문까지 갖춘 이 전각은 ‘극락전’ 편액만 떼면 심상한 여염집이라고 해도 될 검박한 건물이다.
극락전 왼편의 화려한 단청을 입힌 팔작집이 청암사의 승방, 백화당(白華堂)이다. 그리고 극락전과 백화당 사이의 높다란 축대 위에 올라앉은 청기와를 인 전각이 보광전이다. 이 전각 내부에는 42수(手) 관음보살(청동 관음보살 좌상)을 주불로 모셨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보살이다.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보살피는 의미를 천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형상화하여 천수 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염불로 외는 ‘나무(南無)아미타불 관세음보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로 귀의함)의 바로 그 보살이다.
관음보살의 손에는 중생을 보살피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하나씩 들려져 있는 것으로 형상화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불상이나 탱화에서 천 개의 손을 붙이거나 그리는 때도 있지만, 대개 25개 정도로 줄여서 표현한다. 그러나 청암사 보광전의 관음보살은 42수다. 굳이 마흔둘의 손을 표현하고자 한 뜻은 무엇이었을까를 궁리하면서 어둠 살이 내리는 산길을 되짚으며 우리는 청암사를 떠났다.
청암사 산내 암자 ‘수도암’
청암사와는 10여 Km 떨어져 있는 수도암(修道庵)을 찾은 것은 지난 5월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청암사였지만 수도암에 들렀다가 다른 일 때문에 서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작 청암사를 다시 찾은 것은 다섯 달이 훌쩍 지나서였다.
수도암으로 오르는 계곡은 조선 중기의 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명명한 무흘구곡(武屹九曲) 가운데 일부다. 한강은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 성주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 곳을 무흘구곡이라 이름 붙였다. 무흘구곡의 1곡부터 5곡까지는 성주에, 6곡부터는 김천시에 있는데 이 수도계곡이 바로 7곡부터 9곡에 해당하는 곳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수도암은 형식적으로는 청암사의 산내 암자지만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수도암은 수도산 8부 능선인 해발 1,080m에 세운 암자로 청암사와 같은 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인 도선이 이곳에 절터를 잡고 기뻐하여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곳으로,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이다. 일찍이 우담 정시한(1625~1707)이 수도암을 가리켜,
“절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도 평평하고 넓게 트였으며 가야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봉우리의 흰 구름은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지니 앞문을 열어두고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그 의미가 무궁하여 참으로 절경이다.”
라고 예찬한 까닭을 뒷사람들도 힘들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 청암사와 마찬가지로 수도암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1894년 동학혁명 때와 한국전쟁 때에 전각 대부분이 불탔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건했다. 수도암이 지금과 같이 스무 동이 넘는 큰 가람으로 바뀐 것은 현재 조계종 종정인 법전(法傳)이 15년간 여기 주지를 지내던 때다.
철철이 수행자들이 모여드는 수행처
거듭되는 불사로 절집의 규모가 커지는 게 유익이고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또 퇴락해 가는 절집을 방치해 둘 수 없는 노릇이라면 중수, 중건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지금 수도암에 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약광전·수도선원·관음전·나한전 등이 있고 주차장 쪽에 불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목조 전각이 화마를 피하지 못하는 데 비기면 돌로 조성한 유물은 숱한 난리를 넘기고 살아남는다. 수도암에 있는 세 점의 보물, 도선이 조성했다는 약광전의 석불좌상(296호), 대적광전에 모신 석조비로자나불좌상(307호), 대적광전과 약광전 앞에 나란히 선 두 기의 삼층석탑(297)이 그것이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쌍탑은 수도암 절터가 마치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이라 할 때,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 밖에 쌍탑 사이에 석등 하나와 ‘창주도선국사(創主道詵國師)’라고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수도암은 철철이 수행자들이 모여드는 수행처로 유명하다. 실제로 여기서 정진하며 도를 얻은 스님들이 많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방한암(1876∼1951), 송광사 전 방장 구산(1901∼1983), 현 방장 보성 스님 등이 한 소식을 얻었다.
수행자들은 ‘수도암은 졸음이 적은 도량’이라고 말한다. 참선 정진할 때 큰 장애 중 하나가 수마(睡魔)인데 속인도 수도암에 기도하러 오면 잠이 적어진다는 것이다. 또 도량의 터가 원만해서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도 여기 오면 원만하게 수행을 하고 간다고 한다.
나한의 신통력과 영험, 그리고 중창 불사
수도암 나한전은 십육나한의 신통력으로 여러 가지 영험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다룬 설화는 둘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하나는 공양미에 얽힌 얘기고 다른 하나는 대적광전에 걸쳐 있던 큰 나무를 치우는 이야기다.
어떤 노인이 공양미를 메고 산을 넘어오는데 한 동자가 나타나 ‘수도암 스님께서 짐을 받아 오라’ 했다며 쌀가마니를 받아 어깨에 메고 나는 듯이 산을 넘어갔다. 절에 도착해 보니 쌀가마니는 마루에 있는데 사람은 없어 큰 소리로 부르자 그제야 스님이 선실에서 나왔다. 고맙다고 인사하니 영문을 모르는 스님이 연유를 되묻자 노인은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스님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나한전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나한의 어깨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었다.
어느 노승이 수도암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큰 나무가 대적광전에 걸쳐 있어 비가 오면 빗물이 새고 늘 그늘이 진다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어느 날, 노승이 홀로 수행 정진을 하고 있는데 법당 밖에서 ‘영차, 영차’ 힘쓰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이 나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골칫거리였던 큰 나무가 뽑혀 한쪽에 치워져 있었다. 스님이 나한전에 가보니, 십육나한상의 어깨와 손에 나무껍질과 나뭇잎이 묻어 있었다.
원래 불령산은 수도산이라고 불려오다가 100여 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가 많아서 불령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불령이란 ‘부처님의 영험’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교구 말사인 청암사의 산내 암자에 불과한 수도암이 이처럼 중창 불사를 거듭한 것은 결국 부처님의 영험에 힘입은 것이라고 봐야 할까. 한참 공사 중인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한갓진 암자였던 시절의 수도암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이 절집에 이어지는 불사와 시주를 부처님과 십육나한은 과연 흡족하게 여기고 계실지 말이다.
2013. 1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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