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당시 안동형무소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 열려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가 그 지역성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긴요한 것은 그것을 당대의 삶과 역사로 받아들이는 동시대인들의 공감과 연대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공식적 역사 속으로 편입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광주사태’로 인식하는 동시대인들이 있는 한 광주항쟁이 ‘광주’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광주가 30년의 역사라면,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의 4·3은 60년도 넘은 훨씬 오래된 역사이다. 그러나 여전히 4·3은 제주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공식적으로 보면 4·3은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사건 발발 반세기가 넘어 그 결자해지의 물꼬가 트였다.
역사의 ‘지역성’ 극복은 공감과 연대로부터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시작되었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으로 사과하였다. 이로써 역사는 제 물줄기를 찾는가 했으나 2008년 새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은 반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국 단위의 보수 우파단체가 4·3을 본격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은 지난해부터다.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제주 4·3사건 진상 보고서에서 무장폭동을 주도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대중의 지지를 받고 강력했지만 온건했다’고 평가하여 진압 작전에 참가한 군경은 양민 학살자가 됐다”면서 “친북좌파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훼손시킨 국가 정통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현직 국방부 장관은 아예 4·3을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이라고 정리해 버렸다.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4·3 사건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이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했으며 이들이 1948년 4월3일에 제주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로 기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4·3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런 뜻에서 4·3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4·3의 역사와 진실이 아직도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완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수반되지 않은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답답하다. 해마다 노란빛 유채가 아름다운 제주의 봄을 즐기는 상춘객들로 제주도는 넘쳐나지만, 그 땅과 산에 서린 아픔과 슬픔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이다.
4·3이 제주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은 공감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게 우리가 4·3의 속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지난주다.
지난 12월 19일 오후,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가 펴고 있는 ‘완전한 4·3 해결을 위한 2009 전국 4·3 유적지 순례’가 경상도 북부지방의 소도시 안동을 찾았다.
4·3을 제주도와 한라산에서 펼쳐진 역사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안동 어디에 제주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4·3의 유적이 있단 말인가. 이 의문은 쉽게 풀렸다. 순례단의 목적지는 옛 안동형무소였다. 4·3이 일어나면서 무고한 도민들이 군사재판을 거쳐 뭍의 형무소에 분산수감되었던 것이다.
4·3 당시 전국의 각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무고한 제주도민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지난 1999년이다. 당시의 불법적인 군사회의(군사재판)의 결정적 증거인 제주도민 2350명의 명단이 수록된 ‘수형인 명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명부에 기록된 형무소는 인천, 마포, 전주, 대전, 대구, 목포 등 모두 6곳. 그러나 특별법이 시행되고 희생자신고가 시작되면서 여러 자료를 통해 6곳 외에도 부산, 마산, 진주, 서대문, 영등포 등 모두 15개의 형무소에서 제주도민들의 희생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안동형무소 터에서 베풀어진 진혼제
이 ‘희생’은 물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각 형무소에서 이루어진 재소자 학살을 뜻한다. 북한군에게 쫓기면서 군경은 좌익 혐의 재소자를 즉결처분하였기 때문이다. 도민연대는 안동형무소를 제외한 14개 형무소에서 희생의 흔적을 찾고 그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제를 올려왔다.
안동형무소는 4·3과의 관련성이 밝혀진 15개 형무소 중 마지막 순례지다. 도민연대는 생존자의 증언을 통하여 60명의 전주형무소 수감자 중 일부가 안동형무소로 이감되었음을 확인했다. 안동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송순희(85·당시 제주 남원) 할머니도 이 순례에 동행했다.
60년도 전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되짚어보는 순례여서인가. 며칠째 계속된 한파는 절정이었다. 올해 들어 가장 혹독한 날씨였다. 바늘처럼 매운바람 속에 옛 안동형무소 정문 자리인 안동시 신세동 78번지 일대 골목길 3층 건물 셔터에다 순례단은 펼침막을 걸었다. ‘4·3 당시 안동형무소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
안동형무소는 한강 이남의 형무소 중 한국전쟁 당시 재소자 학살을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형무소로 알려졌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여전히 묻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안동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던 재소자들은 전원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여수·순천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들을 포함, 제주 4·3으로 끌려온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안동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했던 송순희 할머니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새 흐른 세월이 꼭 60년이었다.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나서 그이는 바로 경찰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4·3 당시에 행방불명된 남자는 곧 ‘불순분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이는 군사재판을 거쳐 이 낯선 경상도 땅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형 생존자 송순희의 빼앗긴 삶
그이는 어린 딸을 전주형무소에서 잃었다. 경찰들에게 장작개비로 폭행당하면서 그이의 등에 업힌 아이마저 발을 다쳤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상처는 썩기 시작했고, 결국 아이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그 고단한 시간 속에서도 그이의 뱃속에는 한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송 할머니는 안동형무소에서 몸을 풀었다. 그러나 아이 하나 잃고 얻었던 새 아이도 그이에게는 축복이 되지 못했다.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제주로 돌아갔다가 이내 그이는 새 아이도 잃고 만 것이다. 안동에 끌려올 때 그이는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 안동에서 낳았던 딸이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꼭 예순한 살이 된다.
이전 뒤 주택이 들어서면서 안동형무소 자리엔 터만 남았다. 그이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주택가 뒤편의 영남산만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그이에게 60년도 전에 이 땅에서 보낸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물어보았다.
“여기 형무소 들어오구선 아이 엄마구 아이 기르니까 힘들지는 않았지요. 형무소 들어오면 경찰서 모양으로 힘들진 않았지요. 여기 꼭 한번 오고 싶었어요. 그 예전 양반들 볼 수 있을까 해서…….”
그이는 수감 시절, 자신을 돌봐 주었던 동료들을 회상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6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역사의 상처가 쉬 아물 수는 없다. 그이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4·3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다. 지시대로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가 무차별 총질에 학살당한 사람들, 죽은 어미에 젖에 매달린 아기……. 그이는 과거를 회상하느라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송 할머니는 마치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이의 삶은 순이 삼촌보다는 훨씬 나았던 듯하다. 그이는 새로 꾸린 가정에서 딸 셋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과거의 삶과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순례의 여정에 두 딸이 함께했다. 노쇠했지만, 노인은 유복해 보였고 모두들 그걸 기꺼워했다.
4·3을 우리 모두의 현대사로
진혼제는 찬바람 속에서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4·3 도민연대 공동대표들, 4·3 평화재단, 제주 4·3 희생자유족회, 4·3 연구소 관계자 등 40여 명의 순례단은 조심스레 잔을 올리고, 경과보고를 하고 위패 앞에다 향을 살랐다. 안동형무소 수형 생존자 송순희 할머니가 하얀 국화꽃을 제단에 바쳤다.
제주산임에 분명한 한 접시 귤과 푸르스름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향로 너머 제상에는 떡과 과일 등의 제수가 놓였다. 삽시(揷匙), 식기에 담긴 밥에 숟가락이 꽂히면서 진혼제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찬바람 속에 식어가고 있는 식기에 꽂힌 숟가락은 쓸쓸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시멘트 바닥에 편 매트 위에 신발을 벗고 꿇어앉은 제관들의 귀와 손은 얼어 있었다. 짧게 요약할 만도 한데 경과보고도 제문 봉독도 격식을 갖추어 진행되었다. 가끔 행인들이 진혼제를 흘낏거리며 지나갔지만, 그들은 이 제의를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안동 시민들에게는 4·3은 이름조차도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대구 경북 5·18 동지회의 차명숙 씨, 안동시민연대의 손경식 씨가 행사의 안내를 맡아 준 것이 이 경북의 소도시와 제주 4·3이 만나는 부분이었다. 언제쯤 4·3이 제주나 제주 사람만의 한과 역사가 아니라 이 나라 슬픈 현대사로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때가 되면 진혼(鎭魂)의 제의 없이도 4·3의 원혼들은 영면할 수 있을 것이었다.
2009. 12.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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