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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by 낮달2018 2020.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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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사불산(四佛山)에 깃든 두 산사, 윤필암과 대승사

▲ 윤필암 전경 . 오른편 산봉우리에 보이는 바위가 사불암이다 .

문경시 산북면은 예천과 충북 단양을 이웃으로 둔 조그만 산골짜기지만, 공덕산(913m)과 운달산(1058m)에 유서 깊은 옛 가람 두 곳을 품고 있는 동네다. 예천 문경 간 도로에서 단양으로 빠지는 길을 십여 분 달리다 이르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골라 가다 보면 또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편으로 가면 들게 되는 운달산 김용사(金龍寺)와, 오른편 산길을 올라 만나는 사불산 대승사(大乘寺)가 그곳이다.

 

사불산(四佛山)은 공덕산의 다른 이름이니 그 이름 속에 이미 만만찮은 설화를 품고 있다. ‘천강사불(天降四佛) 지용쌍련(地聳雙蓮)’의 대승사 창건 설화는 삼국유사(권3 탑상 4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에 아래와 같이 전한다.

 

“죽령 동쪽 백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 되는 큰 돌이 사방에 불상을 새겨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법화경>을 독송하는 망명(亡名 ; 이름을 밝히지 않은) 비구를 청하여 절을 주관케 하였더니,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돌에 공양하여 향화가 끊이지 않았다. 산을 역덕산(亦德山), 또는 사불산이라 하였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나왔다.”

▲ 윤필암의 사불전 . 마치 성곽처럼 높이 앉았다 . 오른편 암벽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

물론 그 바위가 사불암이다. 사불산 중턱의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진 이 바위의 네 면에 부처님 모습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겨우 윤곽만 알아볼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바위는 사불산에 깃든 모든 절집과 암자로부터 기림을 받고 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대승사에 조금 못 미친 곳에 고려 우왕 때 창건한 참선 도량 윤필암이 있다. 현재는 비구니들의 수도 도량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이 암자의 법당인 사불전(四佛殿)에는 불상이 없다. 불상을 모신 자리에 설치한 유리를 통해 비치는, 사불암에 새겨진 네 분의 부처님이 있는 까닭이다.

▲ 윤필암 사불전의 풍경(風磬)

1380년 창건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을 거듭해 온 윤필암은 1980년대 초에 모든 전각을 새로 지었다. 아스팔트를 깐 길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오래된 소나무와 잡목 숲 사이를 지나 이 암자에 이르면 그 낡고 그윽한 풍경과 윤나는 기와지붕의 새 전각들이 자아내는 부조화가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윤필암에서 그나마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은 사불전 뒤편 암벽에 세워진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다.

 

사불산 중턱에서 윤필암을 거쳐 대승사에 이르는 가파른 아스팔트 산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은 키 큰 소나무와 바위와 단풍나무 사이의 잡목을 뚫고 뱀처럼 꼬부라지면서 번번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마치 이 골짜기를 거쳐 간 숱한 납자(衲子)들의 끝없는 수행의 길을 닮았는지 모른다.

▲ 윤필암 주변의 숲 . 나무는 겨우살이를 위해 몸피를 줄이고 있다 .
▲ 사불산의 숲길 . 끝없이 사라지는 이 길은 납자들의 수행의 길을 닮았다 .

사불산의 숲은 아름답다. 좁은 길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 펼쳐진 불그스레한 낙엽 빛이 초겨울 특유의 잿빛 풍경을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윤필암 사불전이 높다란 성곽처럼 길손을 맞는다면 대승사의 모습은 훨씬 그윽하고 차분하다.

 

2단의 돌 축대 위에 가지런히 쌓은 암키와 담장 안의 대웅전은 지붕과 현판만이 보인다. 꽤 너른 뜰에 비긴다면 대웅전은 좀 왜소해 보인다. 역시 갓 인 듯 윤이 나는 구운 기와지붕이 생경하다. 587년 개산(開山) 이래 여러 차례 중수·중창해 온 대승사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고, 1922년과 56년에도 대화재를 겪었다.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1966년 삼창(三創)한 이후의 것이다.

▲ 대승사 전경 . 고즈넉한 산골 마을처럼 편안해 보인다 .
▲ 대승사 대웅전 . 꽃살문이 아름다웠고 , 추녀에 새긴 용 조각이 특이하다 . 뜰 좌우의 돌 구조물이 정료대다 .
▲ 대웅전 왼편의 전각 . 대청에 유리를 단 여닫이문이 마치 여염집 같다 . 대승사엔 이런 전각이 여럿이다 .

대웅전 앞뜰은 탑 하나 없이 허전한데, 목련 두 그루와 정료대(庭燎臺 ;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에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함.) 두 기가 외롭게 서 있다. 탑 대신 목련이 서 있기는 비슬산 용연사도 같은데, 처음 대승사를 찾았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목련이 피어 있을 때였는데, 절집이 주는 분위기에서 일본 색 같은 걸 막연하게 느꼈었다.

 

낯선 조경 탓이었을까. 그 까닭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대웅전 좌우의 건물들은 외양이 일본식 집을 닮아 있었다. 두 채의 건물들은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청에 유리창을 끼운 미닫이문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윤필암도 마찬가지였다.

 

산 중턱에 지은 절집의 겨울나기가 힘들어서였을까. 하얀 주련(柱聯) 사이, 칸마다 네 짝씩의 높다란 유리 미닫이문을 얌전히 닫아 건 건물은 마치 여염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웅전 현판 아래에는 ‘어린이 마음, 부처님 마음’이란 펼침막이 걸려 있다. 어린이의 마음이 어찌 부처의 마음뿐이겠는가. 그것은 예수의 마음이기도 하고 공자의 마음이기도 하리라.

▲ 대웅전 좌우 추녀에 달린 용 조각 . 각각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었다 .
▲ 대웅전의 아름다운 꽃살문 .

대웅전에는 단청이 군데군데 벗겨진 꽃살문이 아름다웠다. 대웅전 건물은 기둥 위는 물론이거니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栱包)를 꾸며 놓은 다포 집인데, 공포 사이마다 부처님을 그려놓았다. 또 지붕 좌우의 추녀 아래에는 왼편에는 물고기를, 오른편에서는 여의주를 문 용을 조각해 두었다.

 

대승사에는 두 점의 보물이 있으니 하나는 금동보살좌상(제991호)이고, 나머지는 대승사 목각탱 부(木刻幀 附) 관계 문서(제575호)다. 금동보살좌상은 대승사 선실의 주존불이고 목각탱은 원래 부석사에 있던 것으로 그 소유권을 두고 얼마간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윤필암 뒤편 산 중턱에 자리한 소박한 민가 모양의 암자 묘적암(妙寂庵)엔 오르지 못했다. 묘적암은 여말의 고승 나옹(懶翁) 화상이 요연(了然) 선사를 찾아가 출가한 곳으로 그가 행한 많은 이적(異蹟)이 상기도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가 지어 후대에 구비전승된 노래 ‘서왕가(西往歌)’는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주장되기도 할 만큼, 가사 장르 형성 초기의 양상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 대승사 일주문. 사진을 찍은 각도 탓인가. 어쩐지 낯설고, 불안해 뵈는 구조다.

나옹의 한시라고도 하지만, 더러는 당나라 스님 한산(寒山)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작자를 알 수 없다고도 하는 노래를 떠올린 하산길, 나옹의 시는 바야흐로 푸르스름한 이내가 번져가는 사불산 기슭에 꿈결같이 양희은의 ‘한계령’ 노랫소리와 뒤섞여 넘실거리는 듯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2006. 12. 18. 낮달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문경 사불산에 깃든 두 산사, 윤필암과 대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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