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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예천 금당실, 그 ‘골목 안 돌담길’

by 낮달2018 2020.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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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

▲ 예천군 용문면사무소 앞에 '용도천문'이 새겨진 바위가 서 있다 .

예천은 내가 경북 북부지방과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다. 1994년 복직하면서 나는 예천의 한 시골 학교로 임지를 지정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꼭 4년 반을 살았다. 그러니 예천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는 처지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최근 여러 매체에 자주 소개되고 있는 ‘금당실’ 마을에 대한 기억은 좀 모호하다. 용문면에 있는 마을이라면 마땅히 내겐 구면이어야 하는데 막상 ‘금당실’이 어디쯤이었는지 막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를 찍었다는 ‘병암정’까지 이야기하면 이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니, ‘초간정’이 아니고 ‘병암정’이라고?

 

묵은 기억을 깁기 위한 여행

 

크리스마스에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난 것은 순전히 내 허술한 기억을 깁고 메우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거기가 맨 거기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예천 들머리에서 국도를 거치지 않고 영주로 빠지는 입체 도로가 새로 나 있었다. ‘끊임없이 길을 넓히거나 새\길을 내는 공사를 통해서 유지되고 있는 나라’라는 친구의 비아냥거림이 허튼소리만은 아닌 셈이다.

 

금당실의 행정 구역상 이름은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다. 마을 모습이 ‘물 위에 뜬 연꽃 형국’[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금당(金塘)’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여기에 ‘마을, 고을’을 뜻하는 ‘-실’이 붙은 것이다. 금당실은 풍기 금계촌과 함께 정감록에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피병(避兵) 피란지’로 지목한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다.

 

이 마을에 구한말의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살면서 고관들이 자주 오가면서 ‘금당 맛질 반(半)서울’이란 말이 생겼다. ‘맛질’은 금당실 마을과 붙어 있는 대제리, 제곡리, 하학리를 아우르는 옛 이름이다. 함양 박씨, 원주 변씨 등이 세거해 온 금당실에는 이들 가문에서 남긴 사괴당 고택, 추원재 및 사당, 반송재 고택 등이 있다. 마을은 2006년 문화부에 의해 ‘생활문화 체험 마을’로 선정된 뒤 유교 문화권 개발로 정비되고 있다.

▲ 기와집을 둘러싼 담장은 흙과 볏짚을 이겨 회반죽처럼 썼다 . 사괴당 고택의 담장 .
▲ 돌로 쌓은 우물 . 금당실은 돌이 매우 흔한 고장인 듯했다 .
▲ 기와 얹은 돌담길 , 맨 돌담길이 공존하는 곳이 금당실이다 .

금당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서 나는 옛 기억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었다. 용문면사무소가 있는 이 동네를 적지 않게 스쳐 지나갔으면서도 금당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만 해도 이 마을은 조용한 시골 마을에 그쳤기 때문이다. 또 십승지 따위의 풍수에 무심한 탓도 있었을 터였다.

 

면사무소 앞 ‘용도천문(龍跳天門, 용이 천문에서 뛰논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서 있다. 아마 ‘용문’을 그런 글귀로 설명하려 한 듯한데, 글쎄다. 어떤 까닭인지 예천에는 ‘용(龍)’자가 성하다. ‘용문’이 있고 ‘용궁(龍宮)’이 있고 ‘회룡포’가 있으니 말이다.

 

면사무소 앞에 차를 대고 마을 구경에 나서려는데 뭔가 좀 난감하다. 어디로,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가 막연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노인 한 분을 붙들고 여쭈었더니 이 어른도 난감한 모양이다. 글쎄, 저리로 동네를 한 바퀴 도시든지…….

 

금당실, 그 미로 같은 골목길의 돌담들

 

면사무소 앞 게시판에 마을 지도라도 그려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우리는 동네 한복판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이 골목 저 골목을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다녔다. 뜻밖에 시골 마을에 골목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게다가 골목길은 그냥 골목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시원하다. 미로처럼 이어진 금당실의 골목은 무려 7km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마을이 ‘물 위에 뜬 연꽃’ 형국이라고 한 이유가 짚이는 듯도 하다. 전체적으로 마을은 아주 널찍한 데다가 막힌 데 없이 툭 터져 있는 평지이다. 골목길마다 이어지는 돌담은 요샛말로 하면 이 마을의 ‘콘셉트’ 같다.

 

돌이 흔한 마을이었던가. 온갖 모양의 돌담이 골목을 이리저리 가르고 있고, 끝나는가 하면 다시 또 다른 모양의 돌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가 주변의 기와 얹은 담장도 돌담이긴 마찬가지다. 크기에 따라, 또는 담장의 두께에 따라, 그리고 집의 모습에 따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변 풍경에 살갑게 녹아들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마을의 돌담이 모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생활문화 체험 마을’로 선정되면서 허물어진 곳은 다시 쌓았고, 새로 쌓은 곳도 없잖아 있으리라. 그러나 거기 특별히 인공의 흔적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다. 여러 모양의 돌담은 마을의 고샅길을 넉넉하게 이어주고 있다.

 

자세히 보면 돌담은 두 가지 형식을 따른다. 주로 고택을 둘러싼 기와 얹은 돌담은 볏짚과 황토를 이겨 회반죽(모르타르)처럼 써서 쌓았다. 새로 복원한 미끈한 초가집을 싼 돌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돌담은 대부분 돌만으로 쌓아 올린 순수한 돌담이다.

▲ 금당실 마을의 고샅길과 돌담들. 골목은 넓으면서도 미로처럼 복잡하다.

‘전통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금당실은 ‘하회’나 ‘양동’ 같은 양반마을과는 다르다. 마을 안에 오래된 고가가 손꼽을 정도이기도 하지만, 관리되어온 마을은 아닌 까닭이다. 세월에 따른 마을의 변모는 거의 감추지 않고 드러나 있다.

 

사람 사는 마을, 신구의 부조화쯤이야…

 

고샅길의 돌담이 싸고 있는 가옥은 기와와 초가만이 아니다. 빨갛고 파란 원색의 페인트를 칠한 최신식의 슬라브 양옥 건물이 있는가 하면 ‘아트 기와’라고도 하는 조잡한 ‘플라스틱 기와’를 얹은 집도 있다. 주인이 떠나 무너질 듯한 폐가가 있는가 하면,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신식 기와집도 있다.

 

그게 눈에 거슬릴 만큼의 부조화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관리’되고 있는 하회에도 그런 류의 부조화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마을의 고색창연을 위해서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구경 온 이들이야 한번 둘러보는 거로 넘치지만 주민들의 삶은 이 터에서 오래 이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오히려 곳곳에 새로 복원한 초가가 오히려 더 생뚱맞다. 복원된 초가의 황토로 마무리한 반듯하고 미끈한 벽면은 옛 초가들이 담고 있던 세월과 정감을 유감없이 무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잿빛으로 바래 가고 있는 짚으로 엮은 지붕이 예스러움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복원된 초가를 빙 둘러 쌓은 흙 섞인 돌담은 기와 대신 이엉을 얹었다.

 

금당실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 있다.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조선 숙종 대의 문신 갈천 김빈(1621~1694)이 살던 집인데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를 보여 준다. ‘반송재’라는 이름 그대로 사랑채 앞에 키가 나지막하나 가지 무성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사괴당(四槐堂) 고택은 이 마을 원주 변씨의 입향조인 변희리의 증손인 사괴당 변응녕이 터를 잡고 산 집이다. 앞이 트인 ‘ㄷ’자 형의 정침(正寢)과 앞쪽에 일자형 문간채가 있다. 오른쪽 날개 동쪽에는 2층의 대문채가 특이하다. 대문은 잠겼는데 거기 무슨 ‘다원’ 간판이 걸려 있었다.

▲ 반송재 고택. 사랑채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 복원된 초가. 미끈하고 반듯한 초가가 오히려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마을 위쪽에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아들 영이 1665년에 세웠다는 사학의 공간 추원재(追遠齋, 민속자료 82호)와 사당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인 강당은 조선 중기 건축의 전형적인 구조라고 한다. 추원재 앞에 새로 세운 ‘함양 박공 숭모비’는 오히려 사족 같아 보인다.

▲ 면사무소 앞의 용문정미소. 지금은 없어진 우리 집 방앗간을 닮았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출발했던 면사무소 앞 공터다. 한길로 이어진 길가에 ‘용문정미소’가 서 있다. 어딜 가도 정미소 앞을 쉬 떠나지 못하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다. 방앗간의 모습은 늘 거기가 거기다. 함석으로 덮은 지붕과 바람벽, 커다란 쇠문 따위가 지금은 없어진 고향 집과 공장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한때 시골에선 가장 번성했던 곳이 ‘술도가’라고 불렀던 양조장과 방앗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함께 그것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짐 자전거 양쪽에다 플라스틱 말통을 주렁주렁 달고 달리던 술도가 일꾼이나 소달구지 가득 방앗거리를 싣고 마을을 오가던 방앗간 머슴도 이젠 옛말이 된 것이다.

▲ 병암정. 정자치고는 꽤 큰 건물인 데다가 암벽 위에 있어 다소 위압적이다.
▲ 예천 권씨의 별묘. 병암정 오른편에 있다.

병암정(경북 문화재자료 제453호)은 금당실에서 나와 예천읍으로 가는 길목 성현리에 있다. 경치로 말하면 인근에서는 이 정자가 압권이다. 하긴 KBS 드라마 <황진이>를 촬영한 곳이니 오죽하겠는가. 병암정은 1898년에 금당실에 살던 법부대신 이유인이 천변의 암벽에 세운 정자다. 처음엔 ‘옥소정’이었는데 예천 권씨 문중에서 매입하여 병암정으로 바꾸었다.

 

예천 권씨 문중에서는 병암정을 조선 전기의 학자 권오복의 학덕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자 오른쪽의 별묘(別廟)는 원래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면서 사당만 이곳으로 옮겨 권맹손, 권오기, 권오복, 권용을 모시고 있다.

 

정자는 정면 4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자로서는 작지 않은 규모인 데다가 높다란 암벽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있어 다소 위압적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담장 때문에 추녀 아래 정자의 현판이 겨우 보이는 정도다. 담장 밑 암벽에는 ‘屛巖亭(병암정)’ 석 자가 새겨져 있다.

▲ 여름의 병암정 풍경은 남다른 풍정을 자아낼 듯하다. ⓒ 오마이뉴스 하주성

여름엔 연꽃이 피었을 정자 아래 연못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래도 암벽 위의 정자, 연못, 연못 안의 작은 산, 갈대 등과 어우러진 병암정의 풍경은 빼어나다. 뭇 시인 묵객들의 시심을 흔들 만한 풍정인 것이다. 그러나 한말에 지어진 이 정자는 예천 지역의 독립운동가 중산 권원하(1898~1936) 선생과의 연이 깊다.

 

병암정과 권원하 의사, 혹은 역사와 삶

 

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한 뒤 군정서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예천에서 신문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에는 예천 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폈다.

 

선생이 낙향해 기거한 곳이 이곳 병암정이라 한다. 그는 용문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한 민세 안재홍, 몽양 여운형 선생 등과 교우하였다. 신간회, 교직원 사건, 소작인 사건, 민중 소요 사건, 대동 국권회복단 사건 등 수많은 항일사건에 앞섰던 선생의 삶은 옥살이, 예비검속, 출감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가 193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아홉. 조국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로부터 9년이 모자랐다.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봄이 오면 다시 찾으마고 정자와 연못에다 약속하고 발길을 돌린다. 병암정 어귀의 길목에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어디 없이 땅을 파 뒤집는 일로 나라 안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새길을 내고, 새 다리를 내고, 멀쩡한 강바닥을 파헤치는 일이 한창이다.

 

경남 함안에서는 하천 부지를 빌려 하우스 농사를 짓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여론과 야당·시민단체의 반발이 심상찮은데도 권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세월 앞에서, 역사 앞에서 겸허히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혹은 우리 시대를.

 

 

2009. 12.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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