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군자마을 기행
이 땅 어느 고을인들 저 왕조시대 양반들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겠냐만, 유독 안동 땅에는 그들의 흔적이 두텁고 깊어 보인다. 여기는 이른바 ‘양반의 고장’, 그것도 꼬장꼬장한 ‘안동 양반’의 땅이다. 엔간한 마을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만만찮은 옛집과 정자가 고색창연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당연히 길가에는 ‘문화재’나 ‘유적’을 알리는 표지판이 줄지어 서 있다. 안동에서 산 지 10년을 훌쩍 넘겼으니 내 발길이 인근의 이름 있는 마을, 고택, 정자 따위를 더듬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내 여정을 두고 ‘농반진반’으로 ‘양반들 흔적이나 찾아다니는 일’이라며 마뜩잖아하는 벗이 있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양반’을 이미 화석이 된 전근대의 신분적 표지로만 이해한다. 나는 안동의 고택과 정자를 드나들며 만나는 양반들의 삶의 흔적, 그들 문화의 자취들을 그 시대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바라볼 뿐이다. 양반마을을 둘러보면서 나는 그들만의 문화 따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한 시대를 증언하고 있는 오래된 집과 마을을 국외자의 눈길로 둘러볼 뿐이다.
‘양반’은 전근대의 신분적 표지일 뿐
나는 ‘양반 문화의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그러나 그것의 21세기적 의미를 규정하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 사이에는 훨씬 큰 간극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양반 문화 체험’이나 ‘전통 예절 교육’ 따위의 행사나 교육이 실제로 그 고갱이를 이해하는 것에 얼마나 이를까 하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의 ‘군자마을’도 안동의 하고많은 양반 마을 중의 하나다. 이 마을은 광산 김씨 예안파가 500여 년 세거해 온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金孝盧).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고택과 누정 등 중요문화재를 지금 위치로 옮아왔다. 군자마을 이름도 그대로다.
마을 이름이 ‘군자’가 된 것은 이 마을에서 세칭 7군자라 불리는 이들이 태어난 데서 유래한다. 당시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 선생이 이를 두고 ‘오천 군자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7군자는 효로의 친손·외손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과 아우 김부의, 종형 김부인, 종제 김부신·김부륜, 고종 금응훈·금응협을 이른다. 한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한 이들을 사람들은 ‘오천 칠군자’라 칭송했다는 얘기다.
수몰 후 옮아오긴 했지만 30년이 훨씬 지나서인가, 군자마을은 새로 지은 마을답지 않게 넉넉하고 안온하다. 마을은 도산서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다. 길에서는 마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밋밋한 경사의 진입로를 오르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비교적 널찍한 마당에 이른다.
마을이 낳은 항일 사회주의 운동가 김남수
마당에 차를 대면 정면으로 마을의 모습이 들어온다. 말 그대로 고색창연의 진면목이다. 각 고택은 저마다 알맞은 자리에서 내로라하지 않고 마을의 ‘고색창연’을 연출하고 있다. 마당 오른쪽 끝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항일 애국지사 김남수 선생 기적비’다.
김남수(金南洙, 1899~1945)는 안동이 낳은 걸출한 항일 사회주의 운동가다. 군자리 탁청정 종손의 차남으로 태어난 김남수는 3·1운동 이후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동향의 김재봉, 권오설, 이준태 등과 함께 무산자 동맹에서 활동했다. [관련 글 : 혁신 유림 이은 항일 지식인, 일제와 싸우다 쓰러지다]
그는 풍산 소작인회를 조직하여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한때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 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 철폐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군자마을의 후예가 퇴계를 모신 서원을 철폐하자는 운동을 벌였으니 당시 안동 유림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그 밖에도 형평사 운동과 노동운동 등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제 3차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되는 등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복역했다. 그러나 그는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1945년 3월에 세상을 떠나 조국 해방의 감격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잊힌 이름이었다. 안동에서 함께 항일투쟁에 나섰던 권오설(2005 건국훈장 독립장) 등 동지들과 함께 어둠 속에 잊히고 있었던 그의 이름이 햇빛을 본 것은 2005년이었다. 정부가 뒤늦게 김남수에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한 것이다. 조국이 한 애국지사의 생애를 기리는 데 걸린 시간이 60년이라면 이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군자마을은 500년을 예안 땅에서 세거해 온 광산 김씨 일문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당연히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전통 건축물이 적지 않다. 후조당을 비롯하여 탁청정 종택 등의 고택이 그렇고, 읍청정, 탁청정 등의 누정이 또한 그러하다.
일찍이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에서 ‘군자리는 분명 죽은 공간’이라고 하면서도 군자리의 한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여기에 옮겨진 열한 채의 한옥 중 일곱 채의 사랑채는 마치 고가 모델 하우스 같기도 하고 멋쟁이 사랑채 경연장 같기도 하다.”고 썼다.
‘고가 모델 하우스’ 혹은 ‘멋쟁이 사랑채 경연장’
그뿐만 아니다. 예안파 광산 김씨 종가 후조당에는 수백 종의 고문서와 전적 등이 전해져 온다. 그중 보물로 지정된 고려 시대의 호구단자는 지금 전해지고 있는 호구단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또 임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행군수지>, <향군일기>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요리책인 <수운잡방>도 이 마을의 산물이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의 저자는 규방의 부녀자가 아니라 사대부 탁청정 김유(1491~1555)다. 이 책에는 16세기 안동 전통음식 108가지의 각종 음식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술과 간장, 김치 담그는 요령으로부터 생강·참외·연을 기르는 법까지를 제시해 놓고 있어 당대의 식생활 풍습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종택 왼편에 있는 후조당(後彫堂)은 선조 연간의 문신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이 지었다고 전하는 별당 건물이다. 김부필은 기묘사화 이후 조정과 스승 퇴계로부터 출사를 종용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근본을 두었던 선비다. 별당으로는 규모가 큰데, ‘후조당’이란 현판은 스승이었던 퇴계 이황 선생의 글씨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것으로 그 후 몇 번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73년에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앞서 말한 고려 말기의 호적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교지, 토지문서, 노비 문서, 분재기 등 희귀한 고서와 문집류가 발견된 곳이 바로 이 후조당 대청 천장이다.
절집 전각의 단청에 익숙해진 눈 탓일까. 오래 묵은 나무의 살결 그대로 묵직하고 단순한 부재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택의 인상은 ‘검박(儉朴)’ 그 자체다. 뜰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간결한 단풍잎, 여전히 푸른 댓잎 그림자 아래 문득 중세의 기풍 같은 걸 희미하게 느끼게 해 준다.
군자마을에 있는 또 하나의 종택은 탁청정 종택이다. 탁청정(濯淸亭) 유는 입향조 효로의 아들이다. 이 종택은 조선조 중종 연간에 세운 것으로 앞면 6칸 옆면 4칸의 ‘ㅁ’자 형 건물이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이 종택은 후조당 종택과는 다른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고모에게서 만석을 물려받은 탁청정은 성품이 호방하고 풍류를 즐겨 탁청정을 짓고 여러 명유와 사귀었다. 그 자취는 탁청정에 걸려 있는 여러 시액(詩額)에서 엿볼 수 있다. 정자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영남지방의 개인 정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오른쪽 4칸에 3면이 트인 마루를 깔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정자 앞에는 네모난 연못을 꾸몄다.
탁청정의 대청은 높은 호박 주춧돌에 큰 기둥을 세워 다락을 만들고 둘레는 계자난간을 붙였다. 그 때문인가, 소나무숲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선 탁청정은 다소 위압적으로 보인다. 뒤편으로 돌아 대청을 내려다봐도 그 규모 때문에 어쩐지 ‘정(亭)’이라기보다 ‘누(樓)’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탁청정 오른쪽 옆에 선 낙운정(洛雲亭)이 훨씬 살갑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낙운정은 퇴계의 문인으로 무과에 장원하여 진주목사, 경상좌도 병마사 등을 역임한 후조당의 종형 김부인이 지은 정자다.
낙운정은 낮은 기단 위에 바로 마루를 앉힌 수더분한 형태의 정자다. 탁청정이 입식이라면 낙운정은 마치 앉은뱅이책상 같은 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르는 정자’라기보다는 ‘들어가는 정자’라 하는 게 제격이다. 뒷면을 뺀 삼면에다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묘한 안정감을 보여준다. 군자마을에 들를 때마다 이 정자 근처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까닭도 비슷할 터이다.
낙운정 아래로 주차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정자가 침락정(枕洛亭)이다. 임진왜란 때 영남의 의병대장 김해의 맏아들 김광계가 1672년에 세운 정자다. 정자라고 집 이름을 ‘정’이라고 쓰지만, 사실은 일종의 강당 건물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회를 베푸는 공간이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이 팔작집은 양옆에다 담을 두르고 일각문도 달아 놔서 마치 여염집처럼 보인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인데 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대청 뒤쪽 벽에 ‘운암정사(雲巖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규모가 제법 큰 건물인데도 위압적이지 않은 것은 집을 앉힌 자리가 낮은 데다 앞면을 틔우고 담을 두른 탓이 아닌가 싶다.
다시 주차장으로 쓰이는 마을 앞마당에 오른다. 마을 입구 왼쪽에 ‘숭원각’이라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늘 그렇듯 여기는 굳이 들르지 않는다. 답사자로서는 실격이다. 글쎄, 나는 유물이란 것은 제자리에서 제구실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전시관의 유리 속에 갇히는 순간 그것은 화석이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굳이 전시관을 들르지 않는 이유로 얼마간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숭원각 옆에 좀 신식으로 세련되어 오히려 생뚱맞아 뵈는 돌 조형물이 있다. 임란 당시의 의병장 근시재 김해 선생의 순국기념비다. 39세에 진중에서 병사한 이 의병장은 군자리에 전하는 <행군수지(行軍須知)>와 <향병일기(鄕兵日記)>를 남겼다.
김남수 선생 기적비를 한 바퀴 돈다. 후조당을 비롯한 여러 채의 종택과 정자를 고택 숙박 체험으로 공개하고 있는 군자마을 누리집(http://www.gunjari.net/)에도 이 빗돌과 근시재 순국비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리 보아서 그런가, 마당 가장자리에 치우친 빗돌의 위치도 무심하게 보이지 않는다.
성리학이 아니라 유물론을 신봉한 사회주의자, 한 명문가 후예의 삶과 죽음이 군자마을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군자마을에 무심히 선 고택과 누정, 거기 서린 중세의 역사를 더듬다 마을을 떠나면서 나는 비극의 현대사에 도드라진 역사의 ‘옹이’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2009. 12.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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