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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강화도, 안개, 사람들

by 낮달2018 2020.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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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열린 시민기자 연수 

▲  ‘ 시민 저널리즘 교육의 요람 ’ 이라는  ‘ 오마이스쿨 ’ 은 강화군 불은면 옛 신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다 .

1. 강화도

 

지지난 주에 강화(江華)를 다녀왔다. 초행이었다. 웬만하면 수학여행 따위로도 인연을 맺을 만한 동네였는데 나와 강화는 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화문석(花紋席)과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병자수호조약, 전등사와 마니산, 왕실의 몽진과 고려대장경,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 외규장각과 프랑스의 문화재 약탈, 정족산성과 병인·신미 두 양요(洋擾), 운요호사건 등의 근대사의 일부로 강화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교과서에서 배우고 그림이나 텍스트로 이해한 이미지일 뿐이다. 강화에서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실도 구체적인 공간과 관련지은 이해는 아니며 ‘꽃무늬 돗자리[화문석(花紋席)]’도 마찬가지다.

 

‘강화’란 지명은 꽤 울림이 좋다. 멀쩡한 섬에 웬 ‘강’이란 이름이 붙었는가 확인해 보니 ‘강을 끼고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란다. 여기서 ‘강’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이다. 애초에는 ‘강 아래 고을’이라는 뜻에서 ‘강하(江下)’로 부르다가 나중에 ‘강화’가 된 모양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강화는 인천광역시의 기초자치단체인데, 정작 경기도 김포시 옆에 있다. 땅이 경계가 아니라 바다가 도와 시의 경계인 모양이었다. 강화도는 나라 안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란다. 그러나 1997년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강화는 섬이라기보다는 육지에 가까워졌다.

 

뜻밖의 강화 여행은 <오마이뉴스>에서 실시한 시민기자 연수 덕분에 이루어졌다. 격식을 차리는 곳에 다니는 걸 내켜 하지 않는 편인데도 참가를 결정한 것은 ‘강화’가 주는 울림 때문이기도 했고, 이튿날 서울에서 이웃 블로거들을 만날 기회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당일 서둘러 우등 고속을 타고 강남터미널에 내렸지만, 나는 시간 안에 약속장소에 닿지 못했다. 이 대도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교통 체증을 계산에 넣지 못한 탓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시간이 어긋난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강화행을 포기하고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와 만나기 위해서 만날 장소로 가는 길을 찾고 있는데, <오마이뉴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시장을 보고 들어가는 차가 있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결국 김미선 기자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강화에 들어갔다. 오마이스쿨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넘었다. 나는 강화로 가는 길은 물론이거니와 바다를 건넜는지 어땠는지도 모른다.

▲  학교 진입로 .  눈은 상기도 녹지 않았다 .

‘시민 저널리즘 교육의 요람’이라는 ‘오마이스쿨’이 개교한 것은 2007년 11월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폐교 신성초등학교를 개축한 ‘오마이스쿨’은 시민기자,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각종 언론 교육, 글쓰기 교육, 재충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학교다.

 

문 닫은 학교를 수리해 연 연수원이란 어디 없이 비슷하다. 애당초 학교 건물을 기본으로 만든 공간이니 일단 다소는 허술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점이 오히려 낯설다는 느낌을 상쇄해 버리면서 거기에 쉬 적응하게 하는 것이다. 숙소에 짐을 부리고 강당의 행사에 참여하면서도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썩 편안했다.

 

며칠 전에 전국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시점이다. 길은 대부분 녹아 있었지만, 강화의 시골 마을에는 아직 눈이 그득 쌓여 있었다. 눈은 학교 운동장은 물론이고 학교 아래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마을도 하얗게 덮고 있었다.

 

2. 안개, 사람들

 

‘안개’하면 나는 습관적으로 김승옥의 ‘무진(霧津)’을 떠올린다. 내가 사는 안동도 두 개의 댐 덕분에 가을철에서 이듬해 봄까지 거의 매일같이 안개가 낀다. 그러나 내가 만난 강화의 안개는 상상 속의 무진이나 안동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술을 마시다 새벽 네 시가 가까워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나는 7시가 넘자 일어났다. 세면 뒤에 나는 사진기를 둘러메고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학교는 마치 안개에 포위된 것 같았다.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인 듯 여기저기서 짙어졌다가 옅어졌다가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  안개에 잠긴 마을 ,  안갯속에 떠오르는 전깃줄과 전신주의 실루엣들

교정의 나무들과 학교로 드는 진입로에 상기도 수북이 쌓인 눈 위에 내리는 안개는 무슨 신령스러운 전언처럼 느껴졌다. 자욱한 안개의 띠 저편에 아스라하게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전신주와 전깃줄, 마을과 산의 실루엣들……. 그것은 이 오래된 학교 안의 일상을 마치 몽환처럼 바꾸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섬에서 이루어진 역사의 굴곡들, 한과 눈물, 오욕을 정화(淨化)하는 제의의 절차 같기도 했다. 안개에 묻힌 마을에서 사람들이 대대로 이어온 고단한 삶, 문 닫은 학교를 거쳐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어른이 된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안개 저편으로 떠올랐다가 스러지는 듯했다.

▲  오마이스쿨 안 대강당 .  대부분의 행사는 여기서 치러졌다 .

시민기자와 상근 기자, 그리고 인턴기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이 가진 치열한 현실 인식만큼이나 낙관적인 삶과 세상에 대한 전망을 배우고 깨달았던 것 같다. 만남도 나눈 이야기도 짧았다. 저마다 다른 관심과 지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지만, 젊은 인턴, 시민기자들에게서 나는 ‘삶과 인간에 대한 건강한 시선’ 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강화 여행을 결정할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여행이 통상의 것과는 다른, 연수에 잠깐 참석하는 것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미리 확인해 본 강화의 역사와 거기 서린 삶의 흔적들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냥 스치듯 강화를 거쳐 올 뿐이라는 것도.

 

이튿날,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한 다음 버스를 타고 오마이스쿨을 떠났다. 차창으로 비치는 강화의 한낮을 나는 무심히 지켜보았다. 전등사도 마니산도 정족산성도 밟지 못했지만 나는 강화를 반쯤 알고 강화를 떠나는 거라고 우정 생각했다.

 

형식적으로 내 강화 여행은 렌즈에 담긴 안개 자욱한 학교 안의 풍경 몇 장면으로 갈무리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내가 다시 강화를 찾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첫 강화 여행으로 나는 강화를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오래된 역사의 섬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될 것이었다.

 

 

2010. 1.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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