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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여섯 해, 직지사도 세상도 변했다

by 낮달2018 201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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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다시 찾은 직지사

▲ 직지사에는 진입로는 물론 경내에도 구부정하게 자라 연륜을 더해가는 소나무숲이 곳곳에 있다.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를 다시 찾았다. 2006년 9월 초순에 다녀간 이후 꼭 6년 만이다. 그때 나는 김천에 사는 한 동료 교사의 부친상 문상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9월이라 아직 나무와 숲은 푸르렀고 하오 다섯 시였는데도 해는 한 뼘이나 남아 있었다. [관련 글 :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

 

모시고 간 선배 교사와 함께 두서없이 경내를 돌아다니다 우리는 이 절집이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데 합의했다. 오래된 산사는 널찍했고, 띄엄띄엄 들어선 전각과 어우러진 숲이 아름다웠다. 그때 쓴 글의 이름이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가 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때인 418년, 아도 화상이 인근 태조산 도리사와 함께 세운 절이다. 절의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직지사는 흔히 ‘사명당’으로 불리는 유정(惟政)이 출가한 곳이다. 서른 살에 주지가 된 유정이 임란 때 큰 공을 세웠고 덕분에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조선 8대 가람에 걸맞게 직지사는 경내 면적만 해도 3만 평이다. 당연히 숱한 전각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 배치가 오밀조밀하지 않고 시원했다. 대웅전 앞뜰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만세루와 범종각뿐이다. 나머지 전각은 경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그 각각의 건물이 마치 숨은 듯 없는 듯, 호젓하게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 직지사 일주문으로 가는 진입로 주변의 숲. 직지사는 적지 않은 숲을 안고 있는 절이다.
▲ 대웅전에서 비로전에 이르는 숲길.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화사하다.

절의 세가 세니만큼 직지사엔 불사도 잦았던 모양이었다. 성보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청풍료(淸風寮), 강원(講院) 남월료(南月寮), 강당 만덕전(萬德殿), 회주실(會主室) 명월당 등은 대부분 2층으로 그 규모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이런 대형의 전각과 부속 건물이 절집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호젓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때문인 듯했다.

 

일주문으로 들어오는, 짧지 않은 진입로부터 숲길이고, 일주문·대양문·금강문·사천왕문에 이르는 비탈길도 늙은 소나무와 단풍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만세루 주변도 운치 있게 굽은 노송들이 이 천년 사찰의 품격을 증언하고 있고, 대웅전 뒤편은 더 볼 것 없이 황악산 솔숲이다.

 

대웅전에서부터 서쪽의 관음전, 사명각, 응진전, 명부전을 거쳐 비로전에 이르는 길 양편도 제법 굵직한 단풍나무가 이어진다. 대웅전 앞뜰 왼쪽에 자리 잡은 범종각 뒤편부터 황악루에 이르는 공간도 숲이고 명월료 뒤편부터 천불암, 내원에 이르는 지역도 마찬가지다.

 

높이나 규모도 만만찮은 데도 전각들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따로 손을 대지 않은 오래된 나무와 수풀들 가운데서 내로라 시위하지 않고 무심히 하늘 한 자락을 비껴 바라보고 있는 듯한 소박한 모습 때문이다.

▲ 요사로 쓰이고 있는 직지사 향적전의 모습. 대나무를 덧댄 문이 이채롭다.
▲ 향적전은 원래 직지사의 공양간이었으나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 서별당과 망일전. ‘여염집’ 같아서 마음에 남은 곳이다. 2006년 9월.
▲ 기와를 새로 얹어서인가. 서별당의 모습은 다른 방향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6년 전과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그때 내 눈길을 오래 붙들어 맨 것은 대웅전 왼편의 향적전(香積殿)과 극락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서별당(西別堂)이었다. 향적전은 직지사의 공양간이고 서별당은 망일전과 함께 서 있는 큰스님의 거처다. 이들은 가지런히 기와를 얹고, 담쟁이덩굴을 휘감은 나지막한 흙담 안에 차분하게 서 있었다.

 

이들 건물이 마음에 끌린 까닭은 절집이라기보다 마치 조신한 규수들을 잘 여며둔 여염집 같아서였다.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한 전각과 달리 이들 건물은 경내에 들어선 나무와 숲과 어우러지면서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질서를 빚어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처 대웅전 앞에 올라 앞뜰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잠깐 헛갈린다. 6년 전의 느낌과는 다른 어떤 이질감 때문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무엇이 있는가. 절집은 어쩐지 좁아진 것 같고, 전각들의 배치도 답답해진 느낌이 있었다. 그게 육 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감각의 틈일까.

 

대웅전 옆 향적전은 예전에 비기면 때를 벗은 듯한 모습이다. 돌담 가운데 대나무를 덧댄 작은 문이 새롭다. 그러나 여섯 해 전의 느낌은 찾기 어렵다. 어쩐지 규모가 좀 커진 것 같기도 하고, 기와도 새로 올린 듯하다. 그러고 보니 담도 한 뼘쯤 더 높아진 느낌이다. 역시 시간의 간극 탓일까.

 

향적전은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는 향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다는 고사에서 온 이름이다. 그러나 직지사 누리집에 의하면 향적전은 요사(寮舍)다. 왼편 담장 위로 솟은 배롱나무 단풍이 화사했지만 담 너머에 고인 적요(寂寥)는 여전하다. 대나무 문이 외부를 차단하고 있지만 담 안의 풍경은 은밀하기보다는 검박해 보일 뿐이다.

▲ 서별당 앞에 선 감나무. 감 풍년은 이 절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향적전에서 사명각에 이르는 좁은 길도 단풍이 한창이었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청풍료와 서별당 사이의 골목 한쪽에 감나무 한 그루가 감을 잔뜩 매달고 서 있었다. 절집 안에서 만나는 감나무는 좀 각별한 느낌을 준다. 이런 무던한 자연스러움이 직지사의 본모습인지도 모른다.

 

이마를 맞대고 ‘기역’ 자를 이루고 있는 서별당과 망일전(望日殿)의 풍경도 예전 같지 않다. 여섯 해 전, 낮은 담장 안팎에는 칸나 따위의 키 큰 화초가 피어 있었고, 발을 드리운 방문 앞 댓돌에는 흰 고무신과 털실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었다.

 

그러나 오늘 서별당엔 육 년 전에 만난 적요도, 드리워진 발 너머에서 묻어나던 무욕의 향기 따위를 느끼기도 쉽지 않다. 담장 안팎에 심은 화초는 여전했지만, 담도 한결 높아진 느낌이다. 한참 만에야 나는 그런 느낌이 새로 인 짙은 빛깔의 기와 탓이라는 걸 깨닫는다.

 

여섯 해 전의 서별당은 바랜 잿빛 기와를 얹은, 말 그대로 소박한 전각이었다. 그러나 날아갈 듯 이어 올린 새 기와가 이 소박한 맞배집을 내리누르며 예전의 질박하면서도 단아한 품격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담도 더 높아졌을 수도 있겠다.

 

달라진 서별당을 만나고 나서는 기운이 빠졌다. 허정허정 산중 다실 쪽을 돌아 시내를 끼고 내려오는데 냇가에 나란히 선 단풍나무의 잎이 맑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원인 남월료에서 한 무리의 승려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가대학 학승들인 모양이었다.

▲ 만덕전 앞 시냇가에 핀 진달래가 시절을 잊고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만덕전 아래 냇가에는 때늦은 진달래가 망울지고 있었다. 거꾸로 되짚어 오는 언덕길에 단풍이 고왔다. 붉고 누르고 푸른 단풍 빛과 산사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입은 원색의 등산복 빛깔이 어우러지는 주말의 산사는 굳이 단풍이 아니라도 좋았다.

 

비록 여섯 해 전의 만남에서 비롯한 기대가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이 절집에만 잘못을 물을 일은 아니다. 그것은 무심히 흐른 육 년의 시간에, 그 시간과 함께 변화무쌍하게 달라진 우리의 안목과 취향에, 시절을 달리하면서 바뀌어 가는 미학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지사의 변화를 말하지만,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그새 정권이 바뀌었고 또다시 연말 대선을 앞둔 시간이다. 그때 동행했던 선배 교사는 몇 해 전 퇴직했는데 얼마 전 찾아온 매우 위중한 병환을 앓고 있다. 1년이 남았다더군, 마치 남 말 하듯 심상하게 뇌까리던 그의 야윈 모습이 직지사 산문 앞에 서서 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모습과 아프게 겹친다. 선생이 너끈히 병마를 이겨내시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2012. 1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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