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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얼음 낚시, 혹은 파한(破閑)의 시간

by 낮달2018 201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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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낚시 구경

▲  저수지의 얼음낚시 .  앞의 낚시꾼은 마치 옛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어옹처럼 보였다 .

누차 밝혔듯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마땅한 취미도 기호도 갖지 못한, 이른바 ‘잡기’에는 아예 손방이다. 당연히 ‘낚시’도 모른다. 선친께서는 물론, 돌아가신 형님도 낚시광이라 할 만한 분이었고, 중형도 그 방면으로는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벗들 가운데도 낚시를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자연 그들의 낚시 길에 어쩌다 동참할 기회도 있긴 했는데 결과는 ‘역시’였다. 나는 입질조차 없는 수면에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나절을 꼬박 지새우는 그들의 인내와 기다림에 경의를 표하는 편이다. 대신 30분을 견디지 못하고 주리를 틀고 마는 자신은 낚시와는 털끝만 한 인연도 없는 게 확실하다고 여긴다.

 

낚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다. 인간이 최초로 사용한 도구 중 하나가 낚싯바늘의 원조 격인 낚싯고리였다고 한다. 그것은 ‘길이가 2.5cm 정도인 나뭇조각이나 뼈나 돌의 양 끝을 바늘처럼 뾰족하게 깎아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줄에 매단 것’이었다. (네이트 백과)

 

거기에 미끼를 끼워 물에 던진 후 물고기가 미끼를 삼키는 순간 낚시꾼이 줄을 잡아당겨 고리가 목구멍에 걸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후 낚싯바늘이 금속으로 바뀌고 물고기를 유인하는 방법들이 좀 더 정교해진 걸 빼면 고기를 낚을 때 느꼈던 인간의 쾌감과 기쁨을 뜻하는 ’손맛‘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낚시’는 동사 ‘낚다’에서 온 말이다. ‘낚다’나 ‘낚시’는 그 행위의 함의가 만만찮다. ‘낚다’는 단순히 ‘낚시로 물고기를 잡다.’는 뜻뿐 아니라, ‘꾀나 수단을 부려 사람을 꾀거나 명예, 이익 따위를 제 것으로 하다.’, ‘(속되게) 이성(異性)을 꾀다.’, ‘무엇을 갑자기 붙들거나 잡아채다.’ 등으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낚시’도 ‘미끼를 꿰어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작은 쇠갈고리.’라는 뜻을 넘어서 ‘이득을 얻기 위하여 다른 이를 꾀는 데 쓰는 수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흔히 쓰이는 것이다. 흔히 속칭 ‘강태공’으로 불리는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강상(姜尙)의 낚시질은 무엇인가 가시적인 것을 얻으려는 목적을 넘는 매우 ‘형이상학적’이었다.

 

강상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하며 70세에 주 문왕이 그를 발탁할 때까지 소일하며 지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미늘’(낚시 끝의 안쪽에 있는, 거스러미처럼 되어 고기가 물면 빠지지 않게 만든 작은 갈고리.) 없는 낚싯바늘에다, 미끼조차 쓰지 않았다. 그가 낚으려 했던 것은 붕어 나부랭이가 아니라 ‘세월’이고 ‘때’였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낚시’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은 지난 이틀 동안의 나들이 기억 때문이다. 포항 인근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영천을 거쳐 군위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20년 전에 고락을 같이했던 선후배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그래서 형제처럼 지내는 두 동무와 함께였다. 우리는 조직 안에서 한때 ‘3장 1박’으로 불리었던 사이다. 그러나 지난해 ‘1장’이 세상을 뜬 바람에 우리는 졸지에 ‘2장 1박’이 되고 말았다.

▲  오래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정작 아무것도 낚지 못했다 .  그들이 낚은 것은  ' 파한의 시간 ' 이었을지 모른다 .

선후배들과 함께 한 시간은 어떤 부담도 없는 편한 시간이다. 짧은 하룻밤 동안 우리가 나눈 건 세월을 비켜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년 전인 1989년에 20대의 마지막을 보냈던 친구가 우리 모임의 막내였는데 세상에, 그가 어느새 새해면 쉰 고개를 넘는 것이다. 술 심부름을 하거나 모임의 총무를 새로 맡은 후배들의 듬성듬성한 정수리, 새삼스레 더 늙수그레해 뵈는 벗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읽기도 했다.

 

아쉬운 작별 후에 우리는 군위로 향했다. 군위에 사는 진국의 인간성을 가진, 오래 묵은 동지 겸 친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면허조차 없는 이 고집스러운 친구는 군위읍 외곽의 한 마을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그는 본채에다 군불을 지피는 황토방 한 칸을 달아냈다. 그리고 짬만 나면 군불 넉넉하게 넣어줄 테니까 거기서 하룻밤을 묵어가라고 권하곤 했다.

 

포항에서 영천을 거쳐 군위로 가는 길을 꽤 멀고 구불구불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정담을 주고받으면서 쉬엄쉬엄 몇 개의 고개를 넘었고, 의성군 어귀의 어떤 중국집에서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을 들었다.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서 군위읍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내려오던 길이었다.

▲  얼음구멍 .  그 심연 속을 들여다보는 일과 얼음낚시는 어떻게 다를까 .

유난히 의성에는 저수지가 많은 듯하다고 얘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동무들은 오른편의 눈 덮인 저수지와 거기 꽁꽁 언 얼음판 위에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을 발견하더니 이구동성으로 ‘얼음낚시네!’를 외치더니 길섶에다 차를 댔다.

 

앞서 말했듯 두 친구 모두 낚시를 즐기는 치들이다. 내내 운전을 했던 친구 ‘박(朴)’은 ‘어부’로 불릴 만큼 탁월한 고기잡이의 재능을 가졌다. 나는 그처럼 완벽한 ‘투망’의 기술을 보여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나머지 친구 ‘장(張)’은 비록 전문 낚시꾼은 아니지만, 끈질긴 성실성과 인내심으로 ‘박’의 조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친구니 말이다.

 

‘낚시’는 사람들이 즐기는, 하고 많은 취미·기호 활동 가운데 등산과 함께 이미 발군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것은 동호인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관련 산업의 발전과 함께 하나의 독립적 문화를 이룰 만큼 꾸준히 성장해 온 것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낚시는 때로 그 갖가지 유형과 기능별로 마치 독특한 기품(아우라)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

 

논 한 마지기 크기쯤의 저수지에는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한가운데에 한 명, 저편 산그늘에 또 한 명의 낚시꾼이 등받이 달린 의자에 파묻힌 채 각각 정반대의 방향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앞에는 대여섯 대의 낚싯대가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그 살의 끄트머리엔 손바닥만 한 얼음구멍이 뚫려 있었다.

 

낚시에 아무리 문외한이라 한들, 그런 상황이 전해주는 뜻을 모를 수는 없다. 50대로 보이는 두 사내는 얼음구멍에 떠 있는, 빨갛고 노란 찌를 무심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낚시가방 주변에 놓여 있는 넓적한 날을 가진 도구가 얼음에 구멍을 냈을 것이었다. 그리고 각각 그 구멍에다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사내들은 ‘손맛’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낚시 좀 됩니까.”
“아니요, 통…….”

 

낚시꾼들이 나누는 대화는 거기가 거기다. 벗들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고, 좀 겸연쩍은 듯이 낚시꾼은 말끝을 흐렸다. 벗들의 시선을 따라서 나도 눈을 분주하게 움직여 봤지만, 잡은 고기를 담은 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낚시꾼들끼리도 허탕을 치고 있다는 건 겸연쩍은 일인가.

 

며칠간 혹독했던 날씨는 눈에 띄게 풀렸다. 가끔 부는 바람이 꽤 쌀쌀했지만, 햇볕은 눅어 있었다. 나는 산자락 밑에 전을 편 사내보다 못 한가운데 부챗살처럼 낚싯대를 펼쳐 놓은 사나이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의 낚시를 잠깐 방해하고 있는 행인 따위에는 무심하게 자신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고 시종 같은 포즈를 유지했다.

 

사내의 태도는 마치 ‘한 소식’을 얻은 도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는 묶은 꽁지머리, 귀마개에다 운동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상하의는 두툼한 등산복이었고 거의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방한화를 신고 있었다. 뜻밖에도 손은 맨손이었다. 상의 주머니에 찌른 그의 손목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  얼음구멍과 찌 .  낚시에 필요한 집요함과 인내도 도의 요소가 아닐까 .

무엇보다 사내의 모습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자세였다. 그는 등받이 달린 낚시 의자를 얼음구멍에 뜬 찌를 볼 수 있을 만큼만 뒤로 뉘어놓고 온몸의 무게를 거기 싣고 있었다. 마치 잘 때처럼 다리 역시 쭉 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옆에 다가갔을 때, 마지못한 듯 다리를 잡아당겼다.

 

반대편의 사내는 마음이 좀 바빠 보였다. 그는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았고, 다리도 얌전히 끌어모으고 있었는데, 여차하면 낚싯대를 잡아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왼편 못 둑 위에는 그들이 타고 온 듯한 지프 한 대가 서 있었고, 건너편 산자락, 눈이 녹으면서 황토가 벌겋게 드러나 있었다.

 

우리는 잠깐 얼음판 위에서 물끄러미 두 낚시꾼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낚시에의 몰입을 방해한 이 틈입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찌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기 많이 잡으시라고 덕담을 던지고 우리는 그 저수지를 떠났다.

 

그들은 내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꾸어가는 느슨한 삶이, 기를 쓰고 악머구리 끓듯 한 어떤 삶보다 훨씬 넉넉해 보였다. 방심한 듯하면서도 찌를 놓치지 않는 그들의 시선도 결코 강퍅해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쯤 후에 우리는 그 길을 되짚어 지나갔다. 목을 빼고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아마 그들은 빈 망을 쓸쓸하게 챙겨서 떠났을 것이다. 그들의 빈 망에 가득 담긴 것은 어쩌면 강태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심히 낚은 ‘파한(破閑)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방심한 듯, 잊어버린 듯, 잃어버린 듯 의자에 몸을 젖히고 찌들을 무심히 건너다보던 낚시꾼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스러졌다. 그 모습은 마치 옛 그림 속에서 강물에다 낚싯대를 담그고 무심히 하루를 마감하는 어옹(漁翁)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잠깐 자신의 모습을 거기다 겹쳐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2010. 1.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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