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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풍경

첫아이 ‘돌사진’ 찍던 그 사진관…추억 돋네요

by 낮달2018 201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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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화본마을에 있는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 화본역. 1938년 문을 연 이 역은 철도 마니아들이 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되었다. 오른쪽 구조물이 급수탑이다.

추억은 과거와 현재, 혹은 슬픔과 기쁨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한 시절의 슬픔과 아픔을 환기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고통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련하게 떠올린다.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두 마음속에 따뜻한 등불 하나 켜지는 것이다.

 

‘추억’을 상품으로 파는 시절

 

사내들이 군대 얘기에 열을 올리는 것도,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들이 그 끔찍한 가난을 입에 올리는 이유도 그것이 지나간 고통을 ‘일별해 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한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시절의 고통과 아픔을 복기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따위 추억을 입에 올리겠는가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절이 바뀌면서 이제는 그 추억을 상품으로 파는 시대가 되었다. 20년도 전에 먹었던 보리밥집이 생겨난 것부터 시작된 이 추억 상품은 21세기 먹을거리 목록에 양푼 비빔밥과 연탄불 고기구이를 추가했다. 추억 상품들이 유독 ‘먹을거리’로 집중되는 것은 미각이 가난했던 시절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었기 때문일까.

 

뜬금없이 ‘추억’ 이야기로 허두를 떼는 까닭은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경북 군위의 화본마을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화본마을 근방에는 꽤 알려진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가 있다. 우리는 폐교된 중학교를 리모델링하여 60~70년대의 거리와 학교 교실을 재현한 이 박물관에서 그 ‘시간의 경계’를 잠깐 넘나들었다.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산성면은 인근 팔공산성의 이름을 땄고 마을의 이름은 동네를 감싸는 산의 모습이 ‘꽃 뿌리’를 닮았다 하여 ‘화본(花本)’이 되었다. 이 화본리 824-1번지에 철도 마니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은 화본역이 있다.

▲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의 화본역. 화본역에는 하루 왕복  3차례씩 여객열차가 선다.

화본 기행은 당연히 이 호젓한 간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화본역을 지나는 철도 노선은 청량리역과 경주역을 잇는 중앙선이다. 안동에서부터 무릉·운산·단촌·업동·의성·비봉·탑리·우보를 거쳐 화본에 이르고 다시 봉림·갑현·신녕·화산·북영천을 지나 영천에 닿는다. 마치 장난감 같은 역들이 촘촘히 이어지지만, 이 가운데 여객을 취급하는 역은 의성, 탑리, 화본, 신녕, 북영천 등 다섯뿐이다.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 ‘화본역’과 화본마을

 

이런저런 이유로 화본역은 이미 유명 역이 되었다. 지난 2일 토요일, 화본역사 부근의 주차장은 이미 외지에서 온 승용차로 채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루 세 번씩 상·하행 기차가 서는 플랫폼은 입장료를 받고 개방 중이었다. 사람들은 한적한 플랫폼에서 철로를 등지거나 철로 저편에 덩그렇게 서 있는 급수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본역이 여객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8년 2월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75년 전이다. ‘경경선(京慶線)’이라 불리던 중앙선 화본역에 세워진 높이 20여 미터의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의 동력원인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 건설된 철도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철도역의 급수탑은 이 땅에서 우울하게 시작된 ‘근대의 표지’였다.

 

화본역을 빠져나와 간선도로를 따라 50여 미터만 가면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가 커다란 현수막과 함께 방문객을 반긴다. 이 박물관은 1954년 개교 이래 3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2009년 3월 문을 닫은 산성중학교 교사를 개조해 만든 것이다.

▲ 추억박물관으로 불리는 “추억의 시간여행!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는 폐교된 중학교를 개조해 만든 시설이다.
▲ 추억박물관에는 지나간 시절의 생활용품 ,  도구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일정한 분류 없이 전시되어 있다 .

어디에도 ‘박물관’이란 명패는 없다. 공식적으로 중앙 현관에 붙은 간판은 ‘추억의 시간여행!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다. 전시한 물건들이 ‘박물관’이라 부를 만큼 체계적이지도 다양하지도 않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이 전시장을 편하게 추억박물관이라 부른다.

▲  6, 70 년대 시골 마을의 밤을 밝혔던 호롱 .

박물관은 학교 교사(校舍)다. 2층 슬레이트 건물인데 개축하면서 모양을 낸다고 그랬을까. 1층 맨 왼쪽 교실 쪽은 전면에 로마자로 ‘HWABON’이란 글자를 입체로 만들어 세워놓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추억’을 찾는 사람들에게 생뚱맞게 로마자를 들이대는지, 원.

 

교사의 중앙 현관을 들어서면 오래된 사진과 그림으로 장식한 복도 저편에서 방문객을 반기는 것은 극장의 출입문이다. 출입문 위쪽의 간판으로 미루어 극장에는 시방 ‘로봇 태권 브이(V)’가 상영 중인 모양이다. 물론 극장은 흡음재를 채운 빨간 출입문 하나로 끝이다.

 

극장 문 왼편은 60~70년대의 초등학교 교실 한 칸, 그리고 거의 골동품이 된 그 시절의 생활용품이나 도구 따위를 체계적 분류 없이 진열해 놓은 공간이다. 복도의 창턱에도, 교실 안의 진열장과 교실 바닥에 대어 놓은 포니 픽업 트럭 안에도 요즘 아이들은 용도도 알지 못할 갖가지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 우리가 흔히 ‘호야’라고 불렀던 철제 남포등.

자석식 전화기부터 타자기, 썰매, 다리미, 호롱, 주전자, 이발기, 램프, 곤봉, 물동이, 석유난로, 물뿌리개가 있고 각종 교과서와 잡지류에다 검은색과 흰색 고무신이, 구슬과 각종 과자류, ‘아이스케키’ 통이 있다. 전시물은 기준이나 분류도 없이 마구 섞여 있는데 이런 잡동사니를 꿰는 열쇳말은 물론 ‘추억’이다.

 

나는 80년대 이후의 물건일 듯한 마라톤 타자기와 클로버 타자기를 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80년에 복학한 이듬해쯤에 나는 클로버 타자기를 할부로 샀고 그것을 전자타자기를 산 1987년까지 썼다. 졸업논문을 그것을 이용해 썼고 초임 시절, 지필 시험 출제도 그것으로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첨단 사무기기였던 타자기는 시방은 흘러간 ‘아날로그’ 시대를 증빙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벌겋게 단 숯을 담아 쓰는 오래된 다리미, 우리가 흔히 ‘호야’라고 불렀던 철제 남포등, 중고생의 머리를 밀어대던 바리캉, 흔히 ‘조로’라 불렀던 함석으로 만든 원예용 물뿌리개, 교련시간에 썼던 플라스틱으로 만든 목총…. 보는 사람들에게야 애틋한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지만 예의 물건들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불려나온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재현된 70년대 골목길과 그 체취들

 

다음 칸에는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해 놓았다. 반들반들 닳은 칠판과 나지막한 교탁, 교탁 양옆에 나란히 놓인 풍금(오르간)…. 물론 이 악기 두 대가 놓인 것은 이곳이 전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릴 적에는 학교에 하나밖에 없는 풍금을 저학년 교실에 날라 주는 것은 키 크고 힘센 6학년 언니들이었다.

 

두 개 분단, 네 줄씩 놓은 책상은 일인용이었다. 한 분단에 열씩 두 분단이니 아이들은 모두 스물이 앉아 공부하는 교실인 셈이다. 낮고 조그만 책상 위와 옆에 걸린 빨간 신발주머니가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이 학교가 문을 닫을 때 아이들은 모두 몇이나 되었을까.

▲ 재현한 초등 교실.  풍금이 두 대나 놓인 이 공간을 채울 아이들이 모자라 숱한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
▲ 무쇠 난로 위에 도시락을 쌓아 놓은 겨울의 교실 풍경.  요즘 아이들은 이런 풍경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지금은 공부할 아이가 없어서 문을 닫았다. 하지만, 한때는 아이들이 넘치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가 공부하던 60년대만 해도 한 교실에 60명도 넘는 아이들이 들어찼다. 책상이 모자라 통로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기도 했고 오전반, 오후반 2부제 수업을 하기도 했었다.

 

교실 뒤편의 게시판에는 아이들이 그린 포스터와 생활통지표, 생활기록부, 각종 상장과 수료증 그리고 육성회비 납부 영수서 따위가 붙어 있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도 납부금이 적잖았다. 납부금을 내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동무들의 모습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교실 한가운데 놓인 건 무쇠 난로다. 그 위에 당시 ‘벤또’라고 부른 노랗고 하얀 알루미늄 도시락이 켜켜이 쌓여 있다. 보온도시락이 나온 건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니, 점심시간까지 식은 도시락을 데우는 일을 무쇠난로가 맡은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락이 놓인 풍경은 초등학교의 것이라기보다는 중·고등학교 교실의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 좁은 공간에 재현해 놓은  6, 70 년대의 골목길 풍경 .  어디선가 그 시절의 체취가 물씬 풍겨올 듯하다.
▲ 허름한 서점 풍경 .  그러나 여기엔 잘 정돈되고 구색을 모두 갖춘 오늘날의 대형 서점에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
▲ 옛 시절의 사진관은 필름은 물론이고 건전지까지 팔았던가. 기억도 아련하다.
▲  이 옛 골목이 환기해 주는 것은 현재가 그 과거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확인이 아닐까 .

중앙 현관 오른쪽은 재현해 놓은 60~70년대의 거리다. 구멍가게, 소리사, 사진관, 연탄 가게, 서점과 만화방, 공중화장실 등이 좁은 골목길에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있다.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든 세트 같은 데 비하면 초라하고 왜소한 공간인데도, 그 좁고 어두운 거리로 자신이 들어서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어디선가 그 시절을 적셨던 습기 같은 게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 같은….

 

그리움, 그러나 아무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

 

관람을 마친 방문객이 교사를 빠져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은 복도 위에 걸린 실사 사진이다. 어느 초등학교의 입학식일까. 60~70명 아이들이 맨 뒤에 선 남녀 교사와 함께 정면을 아주 자못 엄숙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사진이다. 추억의 시간을 일별하고 돌아 나오는 관람객들은 그 오래된 사진을 보면서 수십 년 전에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잠깐씩 찾아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운동장 주변에도 가을이 아주 깊숙이 내려와 있었다. 매표소 뒤편 담장 가에 선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세 발과 네발자전거를 타거나 추억의 과자 ‘달고나’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  어느 때 ,  어느 학교의 사진일까 .  이 실사 사진 속에 관람객들은 자신의 모습을 애써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
▲  옛날과 현재는 단지 이런 차이일 뿐이다 .  운동장에서 젊은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있다 .

“복고는 요즘 트렌드야. 요즘 테마가 ‘그때를 아십니까?’ 같아.”
“그래서 새마을운동도 다시 하자는 거유?”
“글쎄, 말이야. 잘하면 ‘유신 시대’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잖아?”

 

굶주림과 궁핍의 기억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그 고통의 기억을 굳이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니까. 한 인사가 ‘유신 시대’가 더 좋았다고 한 것은, 그에게 그 시대가 ‘고문과 투옥의 세월’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듯이 말이다.

 

흔히들 ‘복고(復古)’적 경향은 각박한 삶 속에서 추억이 깃든 상품을 소비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고자 하는 거로 설명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화본마을을 찾아 그 시절의 삶과 세상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그러한 과거와 단절된 현재다.

 

행여 그리움의 정서가 배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거기로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에서든 이 시대에 70년대의 ‘새마을’을 불러올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2013. 11. 13. 낮달

 

 

 

첫아이 '돐사진' 찍던 그 사진관... 추억 돋네요

경북 군위 화본마을에 있는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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