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그 강 건너 불빛 -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by 낮달2018 2020. 1. 4.
728x90
SMALL

1960년대 여성 듀엣 은방울 자매의 히트곡

▲ 서울 야경. 노래 속 '영등포의 밤'은 이런 풍경이었을까. pixabay 사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한 공중파의 대중가요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가 있다. 주로 흘러간 옛 노래를 다루는 이 프로그램은 시대별·주제별로 옛 노래를 들려준다. 저 시기에, 저런 주제의 유행가가 저렇게 많았던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는 노래가 나오면 공연히 그 노래가 떠올려주는 옛날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래에 담긴 ‘세월’, ‘시간의 자취’들

 

유행가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 삶과 사랑에 대한 대단한 성찰이 담겼을 리는 없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가장 대중적인 주제의 삶과 사랑을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노래할 뿐이다. 그런데도 유행가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 노래에 담긴 세월과 시간의 자취 때문이다.

 

▲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1967, 지구레코드)

사람들은 대중가요를 단순히 리듬과 멜로디로서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했던 한 시대의 공기,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으로 복기해 낸다. 노래를 통해 복기해 내는 그 시대의 공기에는 역사적·사회적 상황보다는 개인적 삶의 굴곡이 짙게 깔려 있기 마련이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만난 유행가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그때, 흔히 ‘삐삐선’이라 부르는 가느다란 깜장 전선으로 날라져 온 같은 제목의 라디오 연속극은 11살의 시골아이에게 새로운 ‘신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나는 다락방에 납작 엎드려 잡음투성이의 드라마를 들으면서 주제가였던 첫 번째 대중가요와 만나고 있었다. [☞관련 글 : 노래여, 그 쓸쓸한 세월의 초상이여]

 

하여 ‘섬마을 선생님’은 내 유년과 그 성장의 길목을 지켜 주었던 추억의 일부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내가 이미자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지만, 그이가 애절하게 부르던 노래 속의 섬 처녀와 총각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시나브로 유년에서 소년기로 진입하고 있었던 셈이다.

 

본격적인 유행가의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다. 중학교 입시를 마친 다음 주어진 겨울방학 내내 우리는 밤마다 마을 뒤편의 외딴집에 모여 놀았다. 그 집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살고 있는 동무의 집이어서 우리는 거기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무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때, 같은 마을의 여자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불렀던 노래를 나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눈물을 감추고, 소양강 처녀, 새벽길, 마포종점, 유정 천리, 누가 울어, 불타는 연가 따위가 우리들의 애창곡이었다. 그 노래들이 모두 당시의 히트곡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일부는 훨씬 오래전에 나온 노래였지만 우리가 뒤늦게 배운 노래였다.

 

11살에 만난 서울, 전차의 기억

 

내가 그 시절의 유행가를 익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3년 터울의 형 덕분이었던 것 같다. TV는 물론이거니와 라디오조차 귀한 시대여서 미디어를 통해 대중문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였으니까. 다른 동무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가사 텍스트로 보기]

그 무렵에 나온 최신 가요는 ‘소양강 처녀’나 ‘새벽길’, ‘마포종점’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수십 년이 흐르면서 ‘소양강 처녀’는 거의 국민가요로 등극했고, ‘새벽길’은 아직도 60대의 애창곡으로 널리 불린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적인 노래로 남아 있는 것은 ‘마포종점’이다.

 

가사에 나오는 대로만 우리는 ‘마포종점’을 이해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마포’도, ‘종점’도 ‘전차’도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부드러운 여성 듀엣의 애조 띤 가락은 우리를 낯선 대도시 깊은 밤으로 데려갔던 것 같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서울 전차는 대한제국기인 1899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되었던 운송 수단이다. 서울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자정 부로 운행을 중지하고 폐지되었다. 거의 80년의 세월이다.

 

내가 서울 전차를 처음 본 건 1966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물론 서울에 간 것도 난생처음이다. 6학년이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워낙 작은 학교인 데다 형편상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선 4·5학년 아이들도 데려가기로 했는데 아이들의 희망을 받는 게 아니라 형편이 되는 학부모를 설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형편 되는’ 축에 속했음은 물론이다.

 

출발 당일의 풍경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우리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꼭두새벽에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넜다. 강 건너 경부선이 오가는 약목역에서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우리는 일반 승객들 틈에 끼어서 앉거나 서서 서울로 향했다. 기차의 선반 위에 올라가 잠을 청하던 6학년 형들의 모습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러구러 도착한 번화한 도시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고궁과 비원, 창경원 등을 들렀던 것 같다. 도심의 여관에서 묵었는지 버스를 타지는 않았고, 열을 지어 시내를 걸어 다녔다. 그때 우리는 드넓은 도로에 마치 미끄러지듯 가고 있는 전차를 보았다. 궤도에 대한 기억은 없다. 옛 사진을 보니 있었던 것 같기도 하긴 하다.

 

‘마포종점’을 함께 부른 동무들 중에 서울을 다녀온 아이는 나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3년 전에 들렀던 대도시 서울을 떠올리고, 그 도시의 한 편에 있다는 마포와 영등포를 그리고 있었을까. 노래는 우리에게는 미지의 공간이었던 도시의 얼개와 거기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었다.

▲ 서울의 전차. 나는 이 전차를 본 일이 없다.
▲ 1960년대의 당인리발전소.(왼쪽 끝 건물)

우리가 그때 ‘종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든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마지막 지점’이라는 의미만으로 ‘마포종점’을 이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종점의 사전적 의미는 ‘기차, 버스, 전차 따위를 운행하는 일정한 구간의 맨 끝이 되는 지점’이다.

 

도시적 삶, ‘강 건너 불빛’

 

그러나 자매의 슬픈 고음이 노래하는 ‘종점’은 상시로 버스와 전차 따위가 다니는 도시의 일상, 그리고 그곳을 배경으로 한 삶과 사랑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우리 같은 시골뜨기들이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어떤 복잡다단한 삶의 결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마포도, 영등포도, 당인리와 여의도 비행장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도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슬픈 이별과 그리움을 마치 우리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사랑도 이별도 한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비에 젖어 선 밤 전차’처럼 홀로 남겨진 사람을, 그의 첫사랑이 떠나간 종점, 마포를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그때도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호롱불을 켜놓고, 옹기종기 앉아서 ‘도회의 사랑과 이별’을 그리며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볼일을 보러 방 밖에 나오면 멀리 강 건너 약목(칠곡군 약목면)의 번성한 불빛이 아련했다. 아마 우리는 그것은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으로 이해했음이 틀림없다.

 

그해 봄, 나는 고향을 떠나 인근 대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했다. 버스를 이용하는 등하굣길은 전쟁 같아서 ‘콩나물시루’라는 표현으로도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도회의 버스 운행 구간에는 각각 종점이 있지만, 거기서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과 이별’은 몽상 같은 거라는 걸 깨우쳤다.

 

‘종점’의 의미는 그러나, 비유로서는 좀 어둡다. ‘마포종점’보다 한 해 앞서 발표된 최희준의 노래 ‘종점’은 실연, 사랑의 파국을 비관적으로 노래했다. 화자는 파국에 이른 사랑을 청춘의 종점으로 이해한 것이다. 당연히 거기엔 회한과 절망의 눈물이 흥건하다.

 

그런 ‘종점’의 서정에 비기면 같은 통속적 정서에 기대면서도 ‘마포종점’의 그것은 그나마 절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첫사랑을 잃은 아픔은 감정이입에 의해 추억의 공간, 마포종점으로 전이된다. 그래서 ‘마포는 서글퍼’지는 것이다.

▲ 박애경(1937~2005)과 김향미

은방울 자매는 1954년 박애경, 김향미가 결성한 우리 가요계의 대표적인 원조 여성 그룹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삼천포 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 ‘쌍고동 우는 항구’ 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나는 ‘마포종점’ 외의 노래는 잘 모른다.

 

성장의 길목을 수놓은 추억의 노래

 

은방울자매는 1989년에 김향미가 이민을 가는 바람에 새 멤버 오숙남을 영입하게 된다. 원년 멤버인 박애경이 2005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의 근황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들을 전혀 구별하지 못한다. 내가 은방울자매를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만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이니 말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한 바로는 이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67년이다. 그러나 이듬해 서울 전차는 폐지되었고, ‘마포종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았다. 내가 다음뮤직에서 받은 노래는 2010년에 나온 박춘석 작품집에 실린 것이다.

 

그때 밤마다 모여 유행가를 부르며 놀았던 옛 동무들은 요즘 아들딸 혼사 치르느라 바쁘다. 드문드문 청첩이 날아오는데 나는 단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핑계로 가서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했다. 여자 동무들은 대부분 할머니가 되었고 남자 동무 중에도 할아버지가 된 녀석들이 드물지 않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개혼(開婚)도 못한 이는 나뿐인가.

 

‘마포종점’은 단지 1960년대의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내 성장의 길목을 수놓은 추억이다. 그것은 또 그 통속적 성격과는 무관하게 우리 세대가 어설프게 시작한 대중문화와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마포종점’을 깔아놓고 가끔 그 60년대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이 한갓진 회고와 시간의 복기는 단지 ‘나이 듦’의 증거일 뿐인가.

 

 

2011. 12. 5. 낮달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