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중가요엔 ‘은유’도 사라지고 ‘직설’만 남았다
나는 웬만한 프로그램이 아닌 한 심야에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흥미를 잃은 탓도 있지만 ‘시작은 하되 끝을 보지 못하는’ 시청 습관이 더 큰 이유다. 언제부턴가 초저녁잠을 이기지 못하고 누워 있다 저도 몰래 잠이 든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끝을 볼 자신이 없으면 아예 텔레비전을 꺼버리곤 하는 것이다. 쟁점을 다루는 심야 토론 프로그램도 초반부나 챙겨보는 게 고작이다.
어젯밤 11시쯤에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콘서트 7080’을 맞닥뜨렸다. 귀에 익은 노래라면 한두 곡쯤은 들어주긴 하지만 요즘,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노래도 내게는 낯설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개 잠깐 눈길을 주다가 채널을 돌리거나 전원을 꺼버리곤 한다. 그러나 어젯밤 나는 채널을 고정하고 끝까지 TV를 시청했다.
‘콘서트 7080’, 7·80년대 대학가요제 수상 곡 특집
‘콘서트 7080’은 여름 특집 2편으로 ‘캠퍼스 데이’라는 부제를 달고 7·80년대 대학가요제 수상 곡을 당시 가수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무대에 나와 귀에 익은 노래를 부른 가수 가운데 내가 아는 이는 진행자인 배철수와 중간쯤에 등장한 유열이 고작이었다. 이명우, 정오차, 김성근, 우순실, 김정아, 공민수……. 귀에 선 이름과 낯선 얼굴들 앞에서 나는 내 삶 가운데 어떤 기간이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초대 가수들과 진행자가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서 ‘대학가요제’가 1977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그랬구나…….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같은 해 5월에 나는 입대했고 이듬해 4월에 간신히 첫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1980년 2월에 만기 전역할 때까지 세 해 동안 내 청춘의 시계는 멈춰 있었던 셈이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가수와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모두 반쯤은 낯익고 반쯤은 낯설었다. 1977년 첫 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샌드페블즈)는 귀에 익은 노래였으나 그 노래를 부른 그룹의 이름은 귀에 선 것처럼 말이다.
한 시대를 공유한 아련한 노래들…
낯설긴 하지만 지긋한 연륜이 드러나 뵈는 중년과 초로의 가수들이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들과 내가 한 시대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가시리’, ‘바윗돌’, ‘작은 연인들’,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내가’……. 그 노래들은 내가 희미하게 떠올린 세월 속에서 무심하게 얼굴을 내미는 것 같았다.
그 가운데 어떤 노래는 내가 갓 제대했을 때 대학생이던 조카 녀석이 건네준 테이프에서 듣던 것이었다. 저작권 개념조차 없던 시절, 녀석은 시내의 음반 가게에서 테이프를 녹음했다고 했다. 나는 집에 있던 낡은 휴대용 녹음기로 그것을 재생해 듣곤 했다.
초로의 가수들은 담담히 삶과 노래를 이야기했다. 전직 교사였다가 어떤 소도시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이, 은행 지점장,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술집을 연 이,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건축사로, 교수로 일하고 있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들도 자신들의 삶과 가수들의 삶이 겹치는 부분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 거였다.
그들이 들려준 노래는 모두 좋았다. 거기엔 넘치는 청춘의 열정도, 무심한 세월에 던지는 아쉬움과 안간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엔 한 시대의 삶과 사랑이, 그리고 그것을 넘고자 했던 젊음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삶을 넉넉히 감당한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어떤 ‘여유와 달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의 분위기를 그대로 멋있게 나타낸 곡은 역시 ‘나 어떡해’지요. ‘나 어떡해’라는 가사는 그 시절 정오차 군의 노래(바윗돌)가 금지곡이 되던 70,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고뇌하고 아파했던 젊은이들의 심사를 대변하는 가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1회 대상 곡 ‘나 어떡해’를 이야기하면서 같은 해 금상을 받은 ‘가시리’의 가수 이명우는 그 노래가 당대 젊은이들의 고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숨 막히는 군부독재 시절, 노래는 억눌린 젊음의 출구였다는 뜻일 터였다.
1982년 동상을 받았다는 우순실과 그녀가 부른 ‘잃어버린 우산’도 내겐 낯설었다. 그 제목도 참 생소했다. 무슨 유행가가 ‘분실한 우산’을 노래하는가 싶어서다. 그러나 나는 쉰을 눈앞에 둔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매우 주의 깊게 들었다. 노래가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가사에 주목했다. ‘우산’은 비유였다. 젊은 시절, 그것은 그 여자의 ‘남자’였고 사랑이었다. 사랑의 기억들은 고단한 삶의 ‘위로’이고 ‘힘’이라고, 그리고 그 ‘지나간 이야기들’은 ‘작은 사랑’의 가능성으로 아름답게 남으리라고 여인은 노래했다.
스물몇 해, 우리가 잃은 게 어찌 우산뿐일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고 되받는 이 무미건조한 직설의 시대에 20년 전의 노래 가사는 아주 살갑게 마음에 감겨든다. 은유가 사라진 시대의 노래에 남은 것은 값싼 감상과 탄식의 찌꺼기뿐이다. 그 어이없는 직설 앞에 썰물의 노랫말(‘밀려오는 파도 소리’)은 이미 시에 가깝다. "밀려오는 그 파도 소리에 밤잠을 깨우고 돌아누웠나. / 못다 한 꿈을 다시 피우려 다시 올 파도와 같이 될 거나."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uP8NKp-b3k
1985년 부산 출신의 대학생이 불러 대상을 탄 ‘바다에 누워’의 노랫말은 박해수 시인의 시다. 고교 졸업반이었던 내가 경주에서 열린 어떤 백일장에 나갈 때 그이는 우리의 인솔교사였다. 그해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타고 등단한 그이는 같은 재단의 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주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는 원시의 뒷부분을 잘라버렸다. 잘린 부분을 채운 것은 ‘디비디비딥’이라는 정체불명의 여음이다.
시 ‘바다에 누워’는 선생의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작(1974)이다. 같은 이름의 시집을 낸 것은 1980년이다. 나는 선생의 이력을 26년이 지난 이제야 간신히 갈무리한다. 아, 그런데 이제 나는 선생의 얼굴도 잊었다.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셋. 그 후 대구로 옮긴 선생은 이제 교단을 떠났을까. 스물일곱, 갓 등단한 젊은 시인은 이웃 학교의 여드름투성이의 남학생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리라. 그러고 보면 스물여섯 해가 쏜살같이 흘렀다. 그리고 그 세월은 시방 몇 곡의 유행가로 쓸쓸히 환기되고 있다.
‘잃어버린 우산’을 들으면서 나는 뜬금없이, 우리가 잃은 게 어찌 우산뿐이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2010. 8. 9. 낮달
박해수(1948~2015) 시인은 이 글을 읽었던가, 당시 내 블로그의 방명록에다 흔적을 남기셨다. 거기 남긴 번호로 전화를 드렸던 것 같다. 26년 전의 학생을 어려워하시면서도 선생은 그 옛날을 기억해 주셨다. 언제 한번 뵙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선생은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소식을 지난해에야 전해들었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옛 친구로부터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나는 망연해했다. 향년 예순여덟. 지금도 나는 노래 ‘바다에 누워’를 들을 때마다 선생을 생각하곤 한다.
2019.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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