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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항구와 마도로스’, 기억 속의 노래들

by 낮달2018 2020.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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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대중가요와 유년 시절

▲ 부산항 전경 . 내륙의 시골 소년에게 이 항구는, 항구의 사랑과 이별은 대중가요를 통해서 다가왔다 .

생전 처음으로 유행가라고 듣고 배운 게 이미자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이었다는 얘기는 일찌감치 한 바 있다. (☞ 바로 가기) 나는 그걸 삐삐선으로 공급되는 이른바 ‘유선 앰프 라디오’의 연속극을 통해서 배웠다. 애절한 이미자의 노래가 환기해 주는 남도의 정서 앞에 나는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조바심을 느끼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남녀 혼성반이었던 학급이 남녀로 갈렸다. 새로 구성된 학급은 낯설었다. 인근 마을 아이들로 구성되었던 4학년 때까지의 학급과 달리 그보다 훨씬 먼 마을의, 키도 크고 인상도 다분히 고약한 사내아이들이 한 반이 된 것이다. 벌어진 잇새로 침을 갈기거나 거친 욕설을 예사롭게 쓰는 이 새 동무들 앞에서 나는 좀 긴장했던 것 같다.

 

낯선 5학년, 낯선 친구들, 낯선 노래들

 

‘낯선’ 5학년이 시작되었다. 그만그만한 계집애들과 아옹다옹하는 일이 다였던 4학년 때와 달리 이 새로운 해에 나는 비로소 내가 ‘남자’라는 성적 정체성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되었다. 단단한 체격의 남교사가 우리 ‘우물 안 개구리’들을 새롭게 ‘남자’로 벼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간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던 ‘힘의 균형’을 파괴하는 일을 자신의 첫 과업으로 삼았다. 아이들 사이에 한 번도 검증되지 않았던, 그러나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던 ‘힘의 서열’은 방과 후 교실에서 벌어진 ‘비무(比武)대회’를 통해서 깨어졌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면 책상을 뒤로 밀어 비무장(比武場)을 만들었고 거기서 더러는 싱거운, 더러는 불꽃 튀는 혈투를 구경해야 했다.

 

요샛말로 하면 ‘짱’과 그에게 도전하는 ‘넘버 투’의 대결은 심판인 담임교사의 판정으로 가볍게 뒤집혔다. 어제의 짱이었던 과수원 동네의 아이들은 풀이 죽었고,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아랫동네의 아이들은 단지 몇 방울의 피로 패권을 차지했다. 한 동족 마을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황(黃)씨 성을 쓰는 집안 형제들이었다.

 

나는 그 불꽃 튀는 비무장의 구경꾼이었다. 담임은 내게도 도전할 상대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공부에는 뒤지지 않지만, 힘을 쓰는 데는 별 재주가 없는 모범생 학급 반장이었기 때문이다. 뒤에 나는 이들 새로운 강자들과 친해졌다. 이들은 공부도 남들에게 그리 빠지지 않는 편이어서 이내 학급의 에이 클래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는 동네는 엄청난 규모의 미군 부대가 있는 읍과 인접해 있었다. 아마 이들은 도회의 공기를 우리보다 훨씬 가깝게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여름에도 이들은 우리가 입는 반바지 대신 긴 면바지를 입음으로써 우리 같은 ‘애송이’들과의 차별을 분명히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매료시킨 것은 이들이 부르는 유려한 휘파람과 아주 멋들어지게 불러댄 낯선 유행가들이었다. 나는 이들이 뿜어내는 낯선 정서와 능숙한 바이브레이션으로 소화하는 대중가요 앞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도대체 저들은 어디서 저런 노래를 배우고 익히는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내게 멀고 아득한 어떤 곳이었다.

 

단지 읍과 가까운 동네에 산다는 게 그들이 ‘나와 다른’ 까닭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능숙하게 불러대던 그 시절의 대중가요가 그들을 우리와 다른 아이로 보이게 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 그들에게는 저 도회의 문화를 전수해 줄 형들이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물론 훨씬 뒷날의 일이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이들 동네를 드나들면서도 나는 그들의 집에 보물처럼 모셔져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무심코 보아 넘겼었다. 내게 열아홉 살이 많은, 아버지 같은 형님이 있었던 데 반해, 이들에게는 위로 줄줄이 서너 살 터울의 형들이 있었다.

 

트랜지스터라디오, 시골과 도회를 잇는 메신저

 

이들은 정작 본체보다 더 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소형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우리 집에 있었던 금성사의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단지 형님 방에 가구로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도 동무들과 나를 가른 요인이었다.

▲ 초기의 금성사 라디오. 그러나 시골의 보급률은 형편없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밝히고 살던 시절이었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 밤 깊도록 라디오를 들으며 형들은 유행가를 익히고 그걸 통해 도회의 삶을 배웠으리라. 이를테면 트랜지스터라디오는 60년대의 가난한 농촌과 도시, 그 문화를 잇는 메신저 구실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내 동무들은 그 라디오가 교습해 주는 신문화의 세례를 형들의 일상을 통해서 복제해 왔던 것이었다.

 

선택적 기억 탓일 거다. 그 시절의 노래 가운데 유난히 ‘항구’를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항구가 굳이 유행가의 배경이 되는 이유야 뻔하다. 항구엔 배가 있고 배는 항구를 떠나게 돼 있었으니, 그곳은 ‘이별’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 정지상이 한시 ‘송인(送人)’을 통해 이별을 노래한 이래 포구는 유구한 이별의 공간으로 노래 되어 왔다. 이별은 ‘떠남’과 ‘보냄’으로 구체화하는데 포구는 가장 맞춤한 별리(別離)의 공간이었다. 더구나 눈앞을 가로막는 물은 정인들 사이 단절의 상징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비 내리는 고모령’ 따위의 유행가에서 보듯 자연 공간으로서 유력한 이별의 장소는 ‘고개’ 또는 ‘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신문물의 유입과 함께 훨씬 더 극적인 공간으로 등장한 것이 ‘역’과 ‘정거장’이었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대전 블루스’에 등장하는 애틋한 이별도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랑이었다.

 

역이나 정거장이 국내용 이별의 장소였다면 근대 이후에 등장한 항구는 훨씬 이국적인 국제용 이별의 장소로 널리 불렸던 것 같다. 훨씬 더 현대화된 이별 공간으로 ‘공항’이 있지만 내 기억으론 그것이 등장하려면 70년대를 기다려야 했으니 말이다.

 

부산, 항구의 사랑과 이별

어쨌든 새로운 내 동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모두가 ‘부산항’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저 남도의 항구 부산은 마치 그들의 고향마을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그때 아이들이 즐겨 부른 노래는 ‘무역선 오고 가는 부산항구 제1부두……’로 시작하는 ‘아메리칸 마도로스’ 따위였다.

 

아이들은 노래 가사를 적당히 비틀거나 바꿔 불러서 그러잖아도 주눅이 든 우리들의 야코를 죽이곤 했다. 그들은 ‘무역선 오고 가는’을 ‘무역선 왔다 갔다’로 비틀거나 ‘미르치(멸치) 꽁치 팔짝 뛰는’으로 바꿔서 불렀는데 그러는 그들의 모습은 꼼짝없이 낯선 바닷가 건달의 모습이었다.

 

부산은 그렇게 내게 다시 다가왔다. 부산을 처음 가 본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부산과 남해안을 도는 수학여행이었는데 아이들 숫자가 적어서 4·5학년도 끼워서 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용두산공원에서 난생처음으로 먹었던 김밥 맛과 얇게 썬 나무 도시락에서 나던 얄궂은 냄새로만 부산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부산은 다른 고장에 살던 아이들에게 ‘영도다리’나 ‘바다’의 이미지로 떠오르는 도시다. 그러나 그게 다다. 바다는 ‘파도’나 ‘갈매기’ 따위의 정형화된 이미지로 다가와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약하기 쉽다. 나는 새 동무들이 부르는 노랫말 속에 포함된 ‘제2부두’나 ‘마도로스’, ‘무역선’ 같은 낱말을 통해 부산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마도로스’는 네덜란드 말 ‘matroos’에서 온 단어로 주로 ‘외항선의 선원을 이르는 말’이다. 마도로스는 긴 파이프 담배를 물고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보헤미안 같은 존재로 내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를 통해 ‘마도로스’가 왜 ‘죄 많은’지를 이해했고, ‘항구의 아가씨’의 눈물도 이해하게 되었다.

 

부산항을 노래한 유행가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는 ‘잘 있거라 부산항’이었다. 그 노래에 펼쳐진 사랑과 이별에 나는 잔뜩 매료되었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미스 김’과 ‘미스 리’에게 안녕을 고하는 뱃사람의 고독과 사랑에 연민을 느낄 지경이었다.

 

노래로 만난 새로운 세계와 그 인식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동무들의 노래를 통해서만 그 노래를 익혔을 뿐이다. 한 번도 원곡을 들은 적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동무들의 경쾌한 저음으로 기억되는 노래였다. 내 황씨 친구들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주 가볍게 ‘항구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해 주었다.

 

‘온다는 기약이야 있으랴만은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 마라 버리지 마라’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였다. 반복된 리듬에 숨은 곡절과 사연에다 나는 가능한 상상력으로 덧칠을 해댔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쓸쓸하게 뱃전에 서서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는 마도로스가 되어 있곤 했다.

 

그것은 시골뜨기 소년이 유행가를 통해 접촉한 첫 번째 외부 세계였다. 나는 새 동무들이 즐겨 부른 노래를 통해서 비로소 나 밖의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벼리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하면 그것은 유치하고 진부한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감성과 상상력의 어떤 내밀한 부분에 가해진 충격적 경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가끔 ‘잘 있거라 부산항’ 노래를 부른다. 가능하면 낮은 목소리로.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한 시골 소년의 상상력과 그것을 무화해 낸 무심한 세월을 생각해 본다. 그 세월 속에 스러져 간 꿈과 삶의 곡진한 사연들도 생각한다.

 

이제야 그 노래를 부른 이가 백야성이란 사실을 확인한다. 다음(daum) 뮤직에서 내려받은 백야성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잘 있거라 부산항’ 노래의 원형은 지금 대구에 살고 있는 내 황씨 친구에게 있다.

 

얼마 전 그와 전화로 안부를 나누었다. 언제 한번 내려와 대포라도 한 잔 나누자고 내 어릴 적 동무는 말했다. 그러자고, 그러마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이다. 그를 만나서 한잔 술을 나누고 어디 노래방 같은 데서라도 그의 옛 노래를 오래오래 듣고 싶다.

 

 

2010. 6. 20. 낮달

 

 

* 덧붙임 : 다음뮤직에서 내려받을 수 있는 ‘잘 있거라 부산항’은 대체로 세 종류다. 백야성의 것과 주현미의 것, 그리고 주현미와 한 남자 가수가 부른 것이 그거다.

 

백야성이 발표한 250여 곡 가운데 3분의 1이 바다와 관련된 노래인데 그의 노래는 무대에선 인기를 누렸으나 방송은 거의 타지 못했다고 한다. 노래와 창법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방송금지곡으로 묶인 탓이다.

 

주현미가 부른 노래의 분위기가 내 어릴 적 그 노래에 더 가깝긴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지나치게 간드러진다. 부득이 백야성의 노래를 올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노랫말에 담긴 아련한 추억을 제외하면 이 이의 노래도 내 기억 속의 노래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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