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가설 천막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유행가를 배우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전국의 극장은 모두 333개, 스크린은 2,184개다. 대부분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일 터이니 가히 ‘영화의 전성시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겠다. 영화를 보려면 그걸 상영하고 있는 영화관을 찾아다녀야 했던 단관 중심의 과거 극장가는 그야말로 옛이야기가 되었다.
멀티플렉스 시대에 떠올리는 ‘가설극장’
그러나 여전히 영화관이 없는 시군이 적잖다. 군청 소재지가 있는 소읍에 있던 영화관은 대부분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시골 사람들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영화관이 있는 대도시로 원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문화 소외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 경상남도에선 ‘작은 영화관’ 건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우리 어릴 적, 영화관은커녕 마땅한 문화 공간이 전혀 없었던 시골에서 사람들에게 그나마 문화를 누릴 기회를 제공한 것은 흔히 ‘가설(假設)극장’이라고 불렸던 이동 영화관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빌려 커다란 나무 기둥을 세운 뒤 광목으로 두른, 지붕도 없는 그 천막극장이 들어오면 온 동네가 술렁였다.
마을마다 급조한 포스터를 붙이고, 확성기를 단 트럭이 마을마다 돌면서 홍보를 했는데,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문구는 언제나 똑같았다. 국산 영화 한 편으로 ‘문화와 예술’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은 십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어둠 살이 내리기 시작하면 발전기를 돌려 천막 주변에 전깃불을 밝혀서 주변은 졸지에 딴 세상이 되었다. 아이들은 고촉광의 전등불 아래서 숨바꼭질을 즐겼고, 확성기에선 이미자의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졸지에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며 적막했던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활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 가설의 천막극장에서 나는 20세기의 총아, 영화를 처음 만났다. 광목천을 두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은 낡고 닳은 필름 탓에 심심하면 끊겼다가 이어지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나기처럼 하얀 줄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화면 때문에 나는 늘 어디엔가 비가 내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천막 바깥에 설치한 발전기로 생산한 전기가 영사기를 돌렸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적어도 서너 번씩은 정전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더벅머리 형들은 휘파람을 불어댔고, 거기에다 처녀들의 비명이 간간이 섞이곤 했다. 영화에 몰입하고 있다가 갑자기 찾아온 캄캄한 어둠은 낯설지만, 뜻밖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거적때기를 깔고 앉아 보는 영화였지만, 그것은 시골 사람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누리게 된 문화적 호사였다. 이미 도회의 극장가에선 종영한 한물간 영화였지만 그것들은 이미 대중의 검증을 거친 작품들이었다. 눈동냥 귀동냥으로 알게 된 영화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생광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라디오도 대중화되기 전의 일이다.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철 지난 ‘대한 뉴스’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동정을 뒤늦게 확인하면서 어른들은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어둠 살 내리는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조무래기들에게는 ‘월남 소식’이 최고의 뉴스였다.
아이들은 비가 내리는 흑백의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맹호’와 ‘청룡’ 부대 병사들의 승전보에 가슴이 설레었다. 때로 우리는 요란하게 손뼉을 치면서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서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고 있는 ‘국군 아저씨’들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보곤 했던 것 같다.
가설극장에서 만났던 영화 가운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몇 되지 않는다. 연산군이 나오는 사극과 몇 편의 멜로드라마가 떠오르는데 가장 명료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불가사리>라는 괴수 영화다. 그러나 명료한 건 제목일 뿐, 괴수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거짓말처럼 비어 있다. 아마 그때에도 나는 <불가사리>보다는 <하숙생>이나 <맨발의 청춘>과 같은, 요즘 기준으로 치면 ‘19금’ 영화 쪽을 더 선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천막극장에서 만난 영화들
전체 이야기가 분명하게 잡혔던 영화로는 <민 검사와 여선생>(1966)이 남아 있다. 점심시간에 수돗가에 와서 물배를 채우는 소년, 그를 애틋하게 지켜보는 여자 선생님, 법정에서 피고와 검사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모습 따위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인터넷에서 확인해 본 영화의 주연은 김지미다. 여주인공이 눈이 번쩍 띄는 미인인 건 확실한데 그이가 김지미였는지 아닌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여서 기억과 인식의 틈이 꽤 성글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라고 해서 어찌 영화의 등급제가 없기야 했겠냐만, 하여간 가설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것이었다. 키스 신도 드물었던 시기였고 필요하면 극장 측에서 얼마든지 필름을 가위질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맨발의 청춘>(1964)과 <하숙생>(1965)을 비슷한 시기에 보았던 것 같다. 정작 청춘 드라마라 할 만한 <맨발의 청춘>은 심드렁하게 본 대신, ‘배신’과 ‘복수’를 다룬 <하숙생>의 서사가 내겐 훨씬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모두 신성일 주연이었는데 정작 신성일은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조연이었던 트위스트 김(<맨발의 청춘>)과 최남현(<하숙생>)이 인상 깊었다.
<맨발의 청춘>은 깡패 출신의 신성일과 부잣집 딸인 엄앵란의 러브스토리다. 신분 차이로 좌절한 두 사람이 ‘정사(情死)’를 선택하는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별로 몰입이 되지 않았던 것은 어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성일의 주검을 싣고 울면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 트위스트 김의 모습과 시신을 덮은 가마니 밑으로 드러난 벗은 발이 기억에 선명하다.
<하숙생>은 요즘도 방송 드라마로 흔히 만들어지는 ‘배신’과 ‘복수’의 영화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신성일을 버리고 다른 남자(최남현)와 결혼한 김지미 옆집에 ‘하숙생’이 들어온다. 성형으로 말끔해진 옛 애인, 그는 아코디언으로 ‘하숙생’을 연주하면서 그녀를 심리적으로 고문하기 시작한다.
<하숙생>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신파적 요소를 제대로 갖춘 영화였던 듯하다. 뒷날 확인하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KBS> 라디오에서 방송한 드라마가 원작이었다. 주제가인 ‘하숙생’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 요샛말로 치면 ‘국민가요’가 되었다.
두 영화의 주제가는 모두 최희준(1936~ )이 불렀다. 이른바 ‘학사 가수’, 그것도 서울대 법대를 나와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았던 최희준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저음을 갖고 있었다. 펑퍼짐해 사람 좋은 용모라서 ‘찐빵’이라 불렸지만, 그의 세련된 목소리는 매우 지적인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노래 ‘맨발의 청춘’의 가사는 영화의 서사 라인을 그대로 옮겼다. ‘뒷골목을 누비’는 ‘거리의 자식’, ‘내버린 자식’은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거는 ‘사나이’인 것이다. 그것은 ‘맨발’과 ‘청춘’의 의미를 아주 낮은 수준의 차원으로 한정해 버리는 것이었다. 애당초 신파를 넘지 못하는 영화에서 새삼스레 저항과 일탈의 의미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숙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나그네 길’과 ‘벌거숭이’의 삶으로 바라본 비유는 비록 신파였지만 울림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노래는 삶을 ‘정’과 ‘미련’으로만 한정함으로써 떠도는 부평(浮萍)의 삶이 가진 본질에 이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최희준이 부른 영화 주제가들
영화의 주제가였지만 내가 이 노래들을 익히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맨발의 청춘’은 함께 사춘기를 보냈던 한 친구가 휘파람으로 유장하게 들려준 노래다. ‘하숙생’은 일찌감치 대도시로 나갔던 형이 모창으로 불러준 노래였다. 나도 한때 이 노래를 거의 최희준의 음색을 흉내 내며 모창하기도 했다.
최희준은 미8군 무대에서 냇 킹 콜의 노래를 부르며 가수가 되었다. 그가 부른 히트곡들도 적지 않다.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이래, ‘진고개 신사’, ‘나는 곰이다’, ‘팔도강산’, ‘길’ 등은 널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노래 가운데 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노래가 ‘종점’(1966)이다. 유호와 이봉조가 각각 노랫말과 곡을 쓴 이 노래는 실연과 사랑의 파국을 비관적으로 노래한 좀 어두운 노래다. 화자는 파국에 이른 사랑을 ‘청춘의 종점’으로 이해했는데 당연히 거기엔 회한과 절망의 눈물이 흥건하다. 오늘날의 대중가요라면 실연쯤은 아주 ‘쿨’하게 정리하고 말았겠지만, 절망과 비탄으로 노래한 것은 그 시대의 정서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최희준은 1936년생, 그러니까 내년이면 여든이 된다. 그가 서른 살 무렵이었을 때 부른 노래를 흥얼거리던 중학생도 어느덧 곧 60대에 진입하게 된 세월이다. 볼륨을 줄여놓고 그의 노래 ‘맨발의 청춘’과 ‘하숙생’을 들으면서 ‘노래에 깃든 게 세월과 시대’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2014. 7.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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