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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계절의 미각, 고추 부각과 콩잎김치

by 낮달2018 201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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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부각과 콩잎 김치

▲ 부각

고추 부각

 

나이 들면서 좀 눅어지긴 했지만 나는 입이 짧은 편이다. 어릴 때부터 젓갈 따위는 질색이어서 젓갈을 넣은 김치도 먹지 않을 정도였다. 세월이 약이던가, 이제 아내가 깔끔하게 조리한 멸치 젓갈에도 더러 젓가락이 갈 정도이니 발전이라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좋아하는 반찬은 대체로 담백한 것들이었다. 김이나 오징어채, 멸치나 달걀 조림 따위의 반찬을 즐겼고, 나물류는 대체로 무난하게 잘 먹었다. 스물을 넘기면서 흠씬 빠진 반찬으로 고추 부각이 있다. 풋고추에다 밀가루를 발라 찐 뒤에 바짝 말려서 기름에서 튀겨낸 이 음식이 ‘부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걸 안 것은 십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부각’은 대체로 ‘식물성 식품에 찹쌀풀을 발라서 말려두었다가 필요할 때 기름에 튀겨 먹는 음식’으로 정의되는 우리나라에선 좀 드문 튀김 요리법이다. 부각의 재료로는 가죽나무 순, 깻잎, 들깨 송이, 동백잎, 국화잎, 우엉잎, 풋고추, 감자, 김 등이 쓰인다고 하는데 김과 깻잎을 뺀 나머지는 내게 생소한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름을 이용한 조리법은 주로 기름에 지지는 전유어·전병 등이고, 기름에 튀기는 것은 약과·강정·부각·튀각 등으로 비교적 그 범위가 좁다고 한다. ‘튀각’은 ‘다시마나 죽순 나무순 등을 잘라 끓는 기름에 튀긴 반찬’인데 부각과의 차이점은 ‘찹쌀가루’를 묻히는가다.

 

그러나 우리 집에선 찹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묻힌다. 까닭은 간단하다. 아내는 ‘비싼 찹쌀’을 굳이 쓸 이유가 없는 게라고 정리해 주었다. 또 밀가루든 찹쌀가루든 굳이 그 옷을 입히는 까닭은 잘 튀겨지게 하기 위해서라고 아내는 덧붙였다.

▲고추 부각. 부각용으로는 고추가 좀 크다 .

요즘 집에서는 장모님께서 마련해 준 고추 부각을 먹고 있다. 부각으로 쓰기에는 좀 크다 싶은 놈인데도 맛은 그대로다. 고추 부각은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파와 마늘, 참깨와 참기름이 잘 어우러진 간장에 슬쩍 스치듯 걸치는 것만으로도 간은 해결된다.

 

고추 부각의 맛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다소 자극적인 맛에 길든 이라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표현대로 ‘내 맛도 네 맛도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싹 마른 고추가 부서지면서 입안에 흘러내리는 질감도 그렇고, 마땅히 어떤 맛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담백하고 덤덤한 느낌이 고추에 남은 매운맛과 섞이면서 연출해 내는 미각은 소박하면서도 황홀하다.

 

다소 싱겁게 느껴지는 고추 부각의 맛을 기워주는 게 양념장 맛이다. 모든 음식의 맛은 간에서 비롯한다는 건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을 터이다. 국이나 찌개류의 간 잡기는 맨 간장으로 충분하지만, 특별히 양념장이 필요한 음식이 있다. 이를테면 묵이나 국수 따위가 그런데, 잘 만든 양념장이 그 음식의 묘미를 높여주는 것이다.

 

어디 가서도 나는 우리 집 양념장 같은 맛을 만나지 못했다. 늘 집에서 담그는 간장 맛도 좋지만, 파와 마늘, 참깨, 고춧가루로 잘 버무린 우리 집 양념장은 그 음식의 맛을 한 차원 높여준다. 어디 관광지에 가도 내가 묵을 잘 먹지 않는 이유는 이른바 왜간장에다 파를 숭숭 띄워 내놓은 양념장에 먼저 질리기 때문이다.

▲ 부각용 고추 말리기 . 신문지의 잉크 따위야 좀 배면 어떤가 .

처가에서 가져온 부각용 고추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내가 다시 고추를 쪄 베란다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대바구니에 묵은 신문지를 깔고 널어놓은 고추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흐뭇하기만 하다. 밑에 깔린 신문지의 잉크 냄새가 밸 수도 있겠지만, 까짓것 그게 뭐 대순가 말이다.

 

콩잎은 쓰임새도 많다

▲ 콩잎김치. 콩잎은 쓰임새가 많다 .
▲ 콩잎김치. 낱장을 들여다보면 벌레 먹은 데가 선명하게 보인다.

아직 푸른 연한 콩잎을 삭혀서 만든 콩잎 쌈이 얼마나 황홀한 맛을 선사하는지는 일찌감치 이야기한 바 있다. [관련 글 : 된장녀도 콩잎 쌈에는 반해 버릴걸] 그런데 콩잎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누렇게 익은 다음에도 스스로 그윽한 맛을 우려낸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아내는 콩잎김치를 담갔다. 노랗게 익은 콩잎을 삭혀서 이를 마치 김장하듯, 양념을 발라 차곡차곡 쟁여 놓은 것이다. 얇은 몸피를 나란히 붙이고 누워 있는 콩잎을 젓가락으로 집어 밥 위에 올려 쌈 싸듯 먹게 되는 콩잎김치는 따로 ‘밥도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멸치액젓으로 담근 콩잎이 다소 억세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노란 색감에 뒤지지 않게 상큼하면서도 비릿한 향을 풍기며 입안에서 씹히는 섬유질의 느낌은 가히 경이적이다. 김치와 다르지 않아, 숙성하면 할수록 콩잎김치의 맛은 진국으로 우러난다. 곧 하게 될 김장과 함께 콩잎김치는 겨우내 우리 집 식탁을 정겹게 지켜줄 듯하다.

 

고기나 주변에서 쉬 구할 수 없는 값비싼 나물이 아니라, 가을이면 지천인 콩잎으로 이러한 맛을 창조한 조상들의 미각은 거의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늘 자연과 함께 공존하면서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 섭생의 지혜인 것이다. 이 가을, 우리 가족은 고추 부각과 콩잎김치가 선사해 주는 계절의 미각에 시방 흠씬 취해 있는 중이다.

 

 

2007. 11.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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