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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커피, 나의 호사스러운(!) 기호 생활

by 낮달2018 2019.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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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커피’를 즐기게 되다

▲ 아름다운 커피의 '히말라야의 선물' 머그잔과 도기 드리퍼. 사진은 11년 전에 쓴 게 너무 작아서 새로 찍었다. 아래도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호사나 사치일 수 있다. 빵이 그리운 사람에게 신문이나 음악이 그립다는 사람의 사유세계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삶의 범주와 영역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자의 까칠한 선택을, 생존을 위해 싸우는 민중주의자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한쪽에서 생존의 문제가 다른 쪽에서는 올바른 먹을거리를 위한 선택이 되는 까닭이다.

 

▲ 히말라야의 선물 싱글백

어떤 사람은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 스피커에 수백만 원을 기꺼이 투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승용차 ‘튜닝’에다 수백만 원을 버리기도 한다. 국외자의 눈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낭비지만 당사자에겐 이는 최고, 최선의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생활양식이 계급의 차이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시대가 되었다. 주거 형태에 따라, 책을 읽거나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을 찾는 등의 문화생활을 위한 경비 지출이 그가 가진 교양의 크기를 가늠하는 한 잣대가 되고 그것이 고급소비의 한 형태로 자리 매겨지는 시대라는 뜻이다.

 

21세기로 이미 깊숙이 진입한 시대다. 그러나 여전히 내 삶과 그 주변의 세기는 바뀌지 않았다. 음악회나 전시회 구경이 여간 어렵지 않은 시골이니 애당초 문화생활이 어렵긴 하지만, 최소한이라도 그걸 누리려는 노력 따위도 안중에 없다. 서울이나 인근 대도시에서 베풀어지는 뮤지컬 공연이나 유명 전시회를 다녀오는 이들을 거의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그런 까닭이다.

 

원두커피는 사치인가, 아닌가

 

한 잔에 5천 원이 넘는 커피값을 댓바람에 소주 2병이라는 현실적 셈법으로 환산하는 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카페의 공기 운운하는 건 사치다. 어디 고속도로의 휴게실에 들러도, 구석 자리의 자판기를 찾아 거기서 인스턴트커피를 뽑아 먹는 게 고작인 사람들에게 ‘원두커피’는 사치인가, 아닌가.

 

일행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는 때로 그들을 원두커피 판매대로 이끈다. 이거 마실 만하거든, 한잔해 봐. 다행히 이 지역을 지나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에는 고가의 요란한 브랜드 커피 말고도 1천 원에 마실 수 있는 ‘원두커피’가 있다.

나는 언제나 ‘가~득’을 주문하고 길쭉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천천히 마시곤 한다. 짧든 길든 여행에서 맞춤한 원두커피를 한 잔씩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주말에 딸아이가 끓여주는 ‘히말라야의 선물’을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도 참 행복하다. 평일에 그런 호사를 할 수 없으므로(야간에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주말의 그것이 훨씬 입에 들러붙는지도 모른다. 일요일에는 좀 과하지 않은가 싶으면서도 오전과 오후에 각각 두 잔꼴의 커피를 마시는 거로 주중의 아쉬움을 달랜다.

 

학교에서도 원두커피를 마실 수 없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름다운 커피’에서 파는 ‘히말라야의 선물’ 티백형 커피였다. 한 통에 12개의 티백이 들어 있는데 나는 티백 하나로 커피를 두 잔 우려먹었는데, 간편한 대신, 찌꺼기가 생기는 게 좀 개운찮았다.

 

마침내 학교에서도 드립 커피를 마시게 되다

 

가장 간단한 해결법은 두말할 것 없이 커피메이커를 갖추고 거기서 커피를 우려먹는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는 것은 내 욕구가 그만큼 절박하지 않은 탓이다. 가정용보다 작은 야전용(?) 커피메이커가 있으면 얼마나 생광스러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커피 크림이 들지 않은 인스턴트 설탕 커피만 마셔 왔다.

 

다른 방법으로라도 학교에서 그걸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디선가 지리산에서 원두커피를 즐기는 등산객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깊고 높은 산 위에서 손쉬운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원두커피를 마신다고! 나는 그이에게 이상한 동질감과 함께 존경심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좋아! 이건 기호의 문제야. 나는 거듭 생각했다. 그게 내가 사치와 일상의 경계를 용감하게 빠져나온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대형할인점에서 수동식 커피메이커라 할 수 있는 커피 드리퍼(dripper, ‘액체가 똑똑 떨어지다’는 뜻의 drip을 어원으로 일본에서 만든 영어 같다. 영어사전에는 없고 일본어 사전에서는 검색되는 어휘다.)를 구경한 적이 있었던 나는 싱글백이 떨어져 갈 무렵, 딸애를 시켜 그걸 샀다.

지난 주말에 주문해 받은 ‘히말라야의 선물’ 홀빈을 간 가루 조금, 그리고 이번에 산, 같은 이름의 머그잔, 그리고 드리퍼를 종이가방에 담아서 출근했다. 두 시간 수업하고 잔과 드리퍼를 헹군 다음, 머그잔 위에다 드리퍼를 얹고 거름종이를 깐 다음, 작은 찻숟가락 한 술의 커피를 부은 뒤 끊인 물을 천천히 부었다.

 

첫 번째 만든 커피는 반쯤만 성공이다. 뜨거운 물이 거름종이 위의 드리퍼를 통과하면서 가능한 천천히 커피를 우려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사진의 커피가 바로 반쯤만 성공한 작품이다. 맛에 앞서서 나는 원시적인 방식이나마 학교에서 원두커피를 즐기겠다고 마음먹은 자신을 대견해 하기로 했다.

 

오후의 수업이 빈 시간에 나는 다시 한번 더 커피를 내렸다. 나는 진지한 열의로 거름종이 위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었고, 머그잔에 담긴 커피에서 나는 옅은 향기가 코끝에 아련하게 스며왔다. 이번에 70%쯤의 성공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는 짙거나 옅은 향의 커피를 만들어 마실 것이다…….

 

이상이 오늘부터 내가 즐길 호사(豪奢)의 전부다. 이 정도쯤이라면 ‘호화롭게 사치’하여도 무방하지 않은가. 커피 한 잔 값에서 소주 두 병을 환산해 내는 내 벗들이라 하더라도 이건 용서해 줄 만하지 않은가. 더구나 내가 마시는 커피는 북회귀선 경계지역인 네팔 1,200~2,000m 고산지대의 소규모 커피 농가가 생산해 낸 대안 무역(공정무역) 커피이니 말이다.

[관련 글 : 공정무역, '아름다운 커피' 이야기]

 

2008. 9.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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