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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추억의 시장기, ‘누렁 국수’를 아십니까

by 낮달2018 2019.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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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대신 ‘누렁 국수’

▲ 칼국수. 우리 집에는 이 칼국수를 누렁 국수라 부른다. 이 사진은 2019년 현재 새로 찍은 사진이다.

 

▲ 2008년에 찍은 사진.

식성은 결국 ‘피의 길’을 따르는 듯하다. 아이들의 식성이 어버이들과 한참 다른 듯해도 결국은 부모의 그것을 따르게 마련이라는 걸 가르쳐 주는 건 세월이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 가운데서 가장 원형적인 형태로 유전되는 것이 미각인 까닭이다.

 

마흔 고개를 넘기면서 나는 아니라고 믿었던 내 미각이 선친의 그것을 되짚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성년이 된 아이들의 식성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이들의 미각이 역시 내가 밟아왔던 길을 꼼짝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우쳤다. 대를 이어 재현되는 피의 정직한 순환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삽십대 중반을 훌쩍 넘기면서부터 나는 국수에 끌리기 시작했다. 굳이 ‘끌린다’고 표현하는 까닭은 그게 단순한 식성의 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냥 ‘먹을 만한 수준’을 넘어서 그것은 문득 아주 까맣게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의 원형을 되살려 준 것은 아니었을까.

 

미각, 그 기억의 원형

▲ 우리 집 누렁 국수. 아내가 밀가루 반죽을 잘 치대고 방망이로 얇게 밀어 잘게 썰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나는 국수를 가려 먹었다. 우리 집에선 늘 ‘누렁 국수’라 불렀던 칼국수를 밀어 먹었다. 봄가을의 선선한 저녁 무렵, 어둠이 깔리는 마당의 살평상 위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땀을 흘리며 먹었던 누렁국수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궁이 불에 구워서 먹던, 국수를 썰고 난 뒤 남는 꽁지 맛은 또 어떠했는가.

 

살평상 한쪽, 찬물이 담긴 함지박에는 커다란 국수 양푼이 떠 있었다. 유난히 누렁국수를 즐기셨지만 뜨거운 음식을 잘 드시지 못했던 선친을 위한 배려였다. 나는 국수보다는 거기 든 감자 따위가 더 좋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역시 ‘밥’이었다. 국수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양친은 방앗간을 운영했다. 도정(搗精)공장은 거의 종일 돌아갔는데, 방아를 찧으러 온 이들에게 우리는 늘 점심을 제공했다. 대체로 적당하게 보리를 섞은 고봉으로 올린 밥 위에다 무나 배추의 생채 따위를 얹은 약식 비빔밥이었다. 된장으로 비빈 그 밥을 볼이 미어지게 먹는 동네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 실국수. 어릴 적 우리는 이 가는 국수를 왜 국수 또는 틀국수라 불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을 돌려야 하는 여름과 가을철에 밀고 드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밥을 해대기 어려워지자 우리 집에서는 가끔은 이른바 ‘왜(倭) 국수’로 밥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처음 본 그 가느다란 면발의 국수는 밀가루를 가져가 읍내의 국수 공장에서 ‘뽑아온 것’이었다.

 

그 왜 국수는 읍내를 다녀온 우리 집 일꾼이 소달구지에서 내리는 사과 궤짝 속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지금은 소면(素麵, 실제 소면은 실제로는 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를 이른다)이니, 세면(細麵, 실국수)이니 하고 부르지만, 그 당시 손국수만을 보아왔던 시골 사람들에게 그 실처럼 가느다란 국수는 ‘왜(倭) 국수’나 ‘틀국수’로 통했다.

 

나는 그 왜 국수를 먹지 않았다. 무엇보다 비린내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멸치 우린 물에서 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국수를 뽑는 과정에서 생긴 비린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젓갈을 넣은 김치를 먹지 않을 만큼 비위 약한 내게 그 국수는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왜 국수는 다시 먹을 일이 없어졌다. 그 무렵부터 동네마다 도정 공장이 생긴 데다 얼마 안 가서 방앗간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왜 국수로 끼니를 챙겨 줄 만한 손님도 없어진 탓이다. 여전히 우리는 선친께서 즐기는 누렁 국수 별식을 즐기곤 했다.

 

잠자던 미각의 원형, 깨어나다

 

왜 국수를 다시 만난 건 서른을 코앞에 두고 첫 발령을 받은 여학교에서였다. 학교 식당에서 국수를 말아 팔았는데, 비린내는 없었지만, 맛이 영 아니어서 나는 엔간해서는 그걸 먹지 않았다. 밥도 시원찮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한사코 국수 먹기는 피하곤 했다.

 

식당에서 파는 국수를 먹으면서 그게 잠자고 있던 내 식성을 불러냈다고 느낀 건 서른 몇 살 적, 포항의 어느 시장 국숫집에서였다. 무엇이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을 일깨웠을까. 부추를 넣고 끓인 실국수였다. 마치 고명처럼 그릇 안에 뜨는 부추를 씹으면서 그 향기와 풍미에 나는 갑자기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 내가 자랑해 마지않는 우리 집 양념장

그것은 내 피에 숨어 있던 원형의 감각, 그 끌림이었다. 아내에게 넌지시 ‘가는 국수를 한번 해 먹을까’하고 제의한 게 그 이후였을 터다. 부모님 밑에서 세 해쯤 살림을 살았던 아내의 요리 솜씨는 이미 우리 집의 미각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었다. 빼어난 음식 솜씨의 큰형수가 잠깐 내고 있었던 식당에서 요리법을 배웠던 것도 아내의 솜씨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 같다.

 

아내는 멸치와 다시마를 우린 국물을 끓여내 식혔고, 볶아낸 돼지 살코기를 당근과 달걀지단 등의 고명과 함께 국수 위에 푸짐하게 얹었다. 그리고 정평 있는 우리 집 양념장으로 간을 맞춰 내었다. 그 감칠 난 국수 맛에 나는 이내 빠져 버렸다.

 

▲ 국수 밀기. 아내와 딸 모녀가 함께 칼국수를 만드는 과정을 찍었다.

평일 저녁 식사로는 무엇해서 주로 주말에 우리는 실국수를 즐겼다. 누대로 이어지는 피의 순환은 놀라운 것이다. 타고난 흰 살결, 여름이면 땀으로 속옷을 적셔내는 체질과 너그러운 성품 등 선친을 빼닮은 아들 녀석은 일찌감치 두 그릇의 국수를 거뜬히 비워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아내표’ 실국수는 이제 우리 집 특식이 되었다. 나는 가끔 친구들이나 제자들에게 이를 대접하곤 하는데, 공치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그 맛을 치하하곤 한다. 경기도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옛 제자 하나는 태어나서 먹은 가장 ‘맛있는 국수’로 아내의 실국수를 추억하곤 하는 정도이니 우리 집 국수를 특식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거나 공연히 입이 궁금해지는 저녁 무렵이면 나는 그 추억의 ‘칼국수’를 떠올리고 아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게 되었다. 함지박 찬물에 띄우고 식혀서 선친께서 땀을 흘리며 드시던 그 ‘누렁 국수’는 내겐 마치 잊고 있었던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십견 때문에 팔 쓰는 일을 꺼리는 아내가 곱게 눈을 흘기며 시작하는 국수 밀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성큼 수십 년 전 고향 집 살평상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에 오르는 느낌이다. 음식 한 가지로 수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근대화 시기를 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의 특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밀가루에다 콩가루를 섞고 날달걀을 넣은 뒤 소금물로 간을 한 다음, 아내는 오래 주무르고 치대서 방망이로 얇게 밀어 잘게 썬다. 수타면을 뽑아내는 중식 요리사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국수판 대신 좁은 도마에서 반죽을 밀어서 얇은 종잇장처럼 만드는 아내의 손길도 예사롭지는 않다.

 

왼쪽, 네 손가락을 얌전하게 모아 쥐고 몇 겹으로 접은 밀가루 반죽을 썩둑 썩둑 썰어서 어머니는 빈 상 위에다 늘어놓곤 했는데, 아내는 대신 플라스틱 소반에다 썬 국숫발을 엉기지 않도록 설렁설렁 펴서 얹어 놓는다. 불행하게도 어릴 적 국수를 미는 어머니 옆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얻었던 국수 꽁지는 기대할 수 없다. 꽁지를 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걸 구워 먹을 데가 없는 것이다.

 

누렁 국수 저녁상에 살아오는 아버지

 

넓적한 냉면 그릇에 담긴 국수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식탁에 오른다. 일상일 뿐이건만, 때론 명치가 뻐근해지는 기쁨이 밀려옴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뜨거운 국수에다 잘 장만해 놓은 양념장을 넣고, 열기를 식힐 겸 김치를 넣어서 먹는 걸 즐긴다. 나는 늘 한 그릇으로 모자라 반 그릇쯤의 국수를 더 먹어야 한다.

 

때론 아내에게 선친께서 그랬듯 ‘국수 식히기’를 청하기도 한다. 아내는 좀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국수 그릇을 띄우면서 뜨거운 음식을 잘 드시지 못했던 시아버지를 추억하곤 한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돌아가신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온 면 지역에 인심 좋기로 으뜸이셨던 분, 모든 자손에게 너그럽기만 하셨던 분, 막내며느리의 복스러운 식사 모습을 보면서 ‘복 받겠다’는 덕담을 잊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선 우리 저녁 식탁에 오셔서 그렇게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가시곤 하는 것이다.

▲ 국수 식히기 뜨거운 국수는 함지박에 담은 물에 띄워서 식혔다.

저마다 다른 식성에 숨어 있는 피의 순환, 시나브로 미각으로 살아오는 피의 기억들을 깨닫는 순간은 기쁘면서도 서글프다. 부정할 수 없는 피의 인연을 통해 가족의 동질성을 새롭게 깨우치는 게 기쁨이라면 새삼 확인하는 어버이의 부재로 자신의 불효를 뉘우칠 수밖에 없음은 슬픔이다.

 

저녁상을 물리면서 나는 생각한다. ‘근기’가 없어 쉬 고파지는 배, 밤참으로 먹는 데도 누렁 국수는 제격이다. 된장 얹은 밥 한술 뜨듯 양념장을 얹고 마치 두부 베어 먹듯 파먹는 한밤의 칼국수, 그것은 이 밀레니엄 시대에도 잊지 못하는 저 전근대의 시장기, 그 아련한 추억의 제의(祭儀) 같은 것은 아닐는지.

 

 

2008. 6. 27. 낮달

 

 

 

추억의 시장기, '누렁국수'를 아십니까

식탁 위 누렁국수를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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