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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콩국수의 추억과 미각

by 낮달2018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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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수의 계절

▲ 콩국수에는 국수 본연의 맛뿐 아니라, 콩물이 주는 신선하고 담백한 맛의 여운이 있다.

콩국수의 계절이다. 콩국수를 한번 해 먹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제 저녁 식탁에 아내는 콩국수를 내놨다. 하얀 냉면 그릇에 담긴 콩국수의 면은 지금껏 우리 집에서 써 왔던 소면(小麵)이 아니라 적당한 굵기의 중면(中麵)이다.(여기서 쓰는 소면, 중면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 실려 있는 ‘소면’은 고기붙이를 넣지 않았다는 뜻의 素麪뿐이다.)

 

콩국수의 계절

 

▲ 19세기의 조리서 <시의전서>

콩국수의 면이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맛이 바뀌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역시 콩국수에는 굵은 면이 어울린다. 노란빛이 맛깔스레 뵈는 국수가 콩 국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은 보기에도 역시 좋다. 아내는 왜 진작 이놈을 쓰지 않았을까.

 

아내는 삶은 콩과 함께 참깨와 땅콩을 갈아 넣었다. 음식점 콩국수에 비기면 훨씬 담백한 맛이다. 콩국수 전문점에서는 우유를 넣기도 한다는데 그래선지 맛이 다소 요란스럽다. 자극적인 서양 음식에 길든 혀를 위무하기 위해서일까.

 

콩국수는 한국의 전통 음식이다. <위키백과>에서는 콩국수를 19세기 훨씬 이전부터 먹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1800년대 말에 나온 조리서인 <시의전서(時議全書)>나 <주식방문(酒食方文)>에 콩국수 관련 기술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콩국수는 차갑게 식힌 콩 국물에 국수를 넣어 먹는 한국 음식이다. 국물은 물에 불린 대두를 삶은 후 껍질을 제거한 후 갈아서, 베에 걸러 준비한다. 베 보자기에 걸러 남은 콩 찌꺼기는 비지로 찌개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국수는 밀가루에 역시 콩 국물을 섞어서 반죽하여 만든다. 주로 여름에 먹으며, 국수에 계란 반숙을 얹고, 토마토 조각이나 오이채를 얹어서 먹는다. 고소한 맛을 살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소금이나 설탕(광주·전남 지방)을 뿌려 먹는다.

 

한국에서 언제부터 콩국수를 먹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세기 말에 발행된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깨국수’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아, 19세기 훨씬 이전부터 먹어온 음식이라 추정된다. 믹서기가 나오기 전에는 맷돌에 콩을 갈아서, 국물을 준비하였다.

 

    <위키백과>

▲ 면발이 가는 국수를 '소면(小麵)'이라지만 소면(素麪)은 고기를 안 넣은 면이다.

 

광주·전남 지방에서는 설탕도 쓰는 모양이지만, 우리 지방에서는 소금 간을 해 먹을 뿐이다. 고명으로는 역시 오이채가 제일 어울린다. 음식점에 가면 옛날 냉면처럼 달걀이나 토마토 조각을 얹어주기도 하지만 담백하게 먹는 콩국수에 굳이 달걀을 얹을 일은 없겠다.

 

콩국수를 즐기는 편이지만 내게 콩국수는 그리 친숙한 음식은 아니다. 나는 자라면서 콩국수를 먹어 본 적이 없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 주신 국수는 ‘누렁 국수’라고 불렀던 칼국수가 다였다. 국수 맛을 제대로 깨닫기 시작한 건 마흔이 가까워서였다. 그리고 어머니 대신 아내가 해 주는 국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콩국수 맛의 여운, 그리고 청양고추

 

콩국수를 처음 만난 것도 삼십 대의 마지막 무렵이었을 듯싶다. 해직 시기였는데 집회가 잦았던 대학교 근처의 분식점에서 어느 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콩국수를 시켰다. 국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으므로 어떤 국수든 가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면을 만 콩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맛을 만난 기쁨에 겨워했던 기억도 아련하다.

 

▲ 콩국수에 어울리는 청양고추

콩국수에는 국수 본연의 맛은 맛대로 살리면서 콩물이 선사하는 절묘하고 개운한, 그리고 담백한 맛의 여운이 있다. 콩국수에 우리의 먹을거리가 지녀야 하는 모든 덕성이 갖추어져 있는 듯 느끼는 것은 그것이 인공의 맛을 일체 배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수를 먹은 다음 마시는 국물은 마치 후식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얼음까지 띄운 콩국수에는 청양고추가 맞춤한 짝이다. 맵싸하게 시작해 얼얼하게 혀뿌리를 마비시키는 듯한 청양고추의 매운맛은 콩국수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 매운맛은 다시 구수하고 걸쭉한 국물이 중화시켜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맛본 콩국수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은 예천의 한 분식집의 것이다. 소면에다 말아주는 콩국순데 청양고추를 ‘낫게’(경상도 말로 ‘넉넉하다’는 뜻이다.) 주는 데다 조그만 공기에다 조밥도 같이 주는 집이었다. 조밥은 국수의 부실한 근기를 보충하기에는 ‘딱’이었다.

 

정작 안동에 살 때는 자주 다니던 국숫집이 따로 없었고 가끔 밀양 가는 길에 들르던 국숫집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에는 긴늪 유원지가 있고, 그 사거리에 생 칼국숫집이 있다. 여름방학에 친구를 찾아 밀양에 들를 때마다 우리는 그 국숫집에서 콩국수를 먹었다.

 

친구 장(張)도 청양고추를 곁들인 콩국수를 즐겼는데 드물게 둘의 미각이 공통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밀양에 장(章)이 살아 있을 때 이야기다. 장성녕은 2008년 2월에 돌아갔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어느새 6년이 훌쩍 흘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늦둥이가 이제 고3이 되었으니.

▲ 콩을 진하게 갈아넣어 만든 콩국수

장과 함께 우리 ‘3장 1박’이 함께 나누던 시절의 기억도 아련하고 쓸쓸하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1)] 50대 초반의 사내 넷이 술을 마시고 함께 들었던 산외면의 낡고 좁은 모텔방, 거기서 보낸 한여름 밤을 기억한다. 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다.

 

밀양, 콩국수의 추억

 

우리 3장 1박은 1989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지역의 사학에서 해직된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5년 후 복직, 다시 4년 후에 합법화. 다시 15년이 흘렀는데 어저께 법원 판결로 전교조는 다시 ‘법외노조’가 되었다. 이 소식을 확인하며 장성녕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무심히 생각해 본다.

 

음식은 미각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공기와 추억까지 아우르며 떠오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몇 해째 걸렀던 밀양행을 올여름에는 재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경북과 경남의 동료들이 참여했던 ‘장성녕 선생을 생각하는 모임’이 오랜 장정을 마쳐야 할 듯하기 때문이다.

 

다음 로드뷰로 찾아본 긴늪 네거리는 여전하다. 상호가 긴가민가하지만, 우리가 늘 들렀던 생 칼국숫집도 그대로다. 달라진 건 장성녕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고, 이제 우리가 한때 젊음을 던졌던 ‘교원노조’가 다시 법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의 퇴행 앞에 의기소침할 일은 없다. 안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추구했던 고갱이야 결코 변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2014. 6.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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