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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글쓰기, ‘종이 위에서 생각하기(think on paper)’

by 낮달2018 201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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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성장과 성찰의 과정

 

좀 민망하긴 하다. 블로그를 열고 나의 블로그 편력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절댄 게 2007년 2월 2일이다. 그때 난 뒤 늦게 인터넷에다 ‘생각의 거처’를 마련한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싶었을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심상한 어떤 장면들도 그것만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듯하다. 그것은 작게는 기억과 시간의 결과물이거나 오롯한 원인이기도 하고, 때로는 시대와 상황의 연속선 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었다.

 

나는 내 무심한 글쓰기가 개인적으로 내 삶에 대한 소박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우리네 삶이 무심한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진실의 편린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글에 무어 대단한 메시지 따위가 들어 있다고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을 맺고 났을 때의 만족감은 쉬 설명하기 어렵다. 더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쓸 적의 생생한 긴장이 되살아나는 글을 다시 만날 때의 기쁨과 즐거움은 내 글쓰기의 목적을 새삼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나의 방식으로 추스르고 갈무리하는 나만의 ‘세상 읽기’인 것이다.

 

그러고도 뭔가 민망하긴 했던 걸까. 나는 글 말미에다 “내 한갓진 글쓰기를 거칠게 고백한 셈인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읽으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까짓것, 그게 내 알량한 밑천인 걸 어떡하겠는가.” 하고 슬그머니 도망갈 구멍도 마련해 두었었다.

 

그리고 2년 반쯤의 시간이 지났다. 헤아려 보니 그것은 2006년 12월 중순 첫 글을 올린 이래 꼭 서른두 번째로 쓴 글이었다. 그리고 2009년 9월 현재 나는 모두 468편의 글을 썼다. 대체로 2~3일에 한 편꼴로 글을 쓴 셈이니 양으로만 치면 땀깨나 흘렸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때, 나는 ‘내일 아침’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했지만, 낯이 좀 두꺼워진 걸까. 이태쯤이 지났는데도 그걸 다시 읽는 기분은 심상하기만 하다. 그 글을 쓸 때의 감정을 그대로 복기하기는 쉽지 않으나, 대충 그런 생각을 그렇게 우물거렸구나 하고 나는 무심히 스칠 뿐인 것이다.

 

글쓰기, 내 속의 혼돈에 질서

 

‘글쓰기’가 ‘성찰’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진실이다. 우리는 늘 시간 속에 존재하며 거기 아롱진 온갖 곡절을 하나씩 접어가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삶의 주름들은 새로운 일상의 무게 앞에서 잊히고 우리는 늘 다른 아침을 맞이하곤 한다. 압도적인 시간의 중력 앞에서 일상의 시름이야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그러나 이것저것 일상과 삶을 기록하게 되면서 나는 이 ‘무심한 글쓰기’가 삶에 대한 일종의 성찰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글쓰기는 그 대상에 무엇이든 간에 그 대상에 관한 글쓴이의 생각과 관점을 정리해 준다. 사람들은 보통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쓴다’고 믿기 쉽지만, 사실 그런 순서로 글을 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은 글을 쓰면서 자신과 주변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거기 내재한 의미와 진실을 깨닫게 된다. 말이 흔들리는 믿음과 사실을 ‘확정’해 주듯, 글은 모호한 경계 부근을 서성이는 감정과 그 결을 명확하게 붙잡아 준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속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

 

애당초 글을 쓰려고 할 때, ‘정리된 생각’들도 글을 쓰면서 그 내용을 새롭게 채워가는 경우도 많다. 때론 애초의 생각을 수정하고 전혀 뜻밖의 결론으로 치달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의 ‘앎’이나 ‘관점’이란 게 얼마나 얄팍하며, 모호한 안개 속에 있는 것인가를 깨닫곤 한다.

 

언젠가 “글을 쓰면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혼란스럽거나 마음의 정리가 필요할 때 글을 쓰는 게 좋다.”고 얘기했더니 아들 녀석도 머리를 끄덕였다. “서양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봐요. ‘종이 위에서 생각한다’(think on paper)고 쓰거든요…….”

 

‘머릿속의 생각’이란 게 그렇다. 그것은 갈래도 여럿이어서 쉬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앞뒤와 인과는 뒤섞여서 어지럽다. 글을 쓰는 것은 그 마음속 생각의 갈래·앞뒤·인과를 하나씩 종이 위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종이 위에 나란히 세워진 생각의 갈래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얌전해지고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을 통해 글쓰기는 필자 자신을 성장케 하는 것이다…….

 

관성의 위기

 

아무도 글을 재촉하지 않는다. 블로그는 공개된 사적 영역이니 말이다.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에 누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겠는가. 그러나 블로그는 공개된 ‘순간’부터 이미 공적 영역으로 ‘진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게 설사 자신의 내밀한 일기장을 공개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방문자 수가 늘어나고,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댓글도 두터워진다. 이제 이건 그의 ‘사적 영역’이 될 수가 없다. 스스로 가꾸고 여미는 사적 영역이 공적인 관계망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물론 원고를 독촉하는 이는 없다. 이는 공개되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블로그가 사적인 성격을 갖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글에 대한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글을 올린 지 사흘, 나흘이 지나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면서도 기분도 칙칙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쫓기듯 글을 쓰고, 성급하게 글 한 편을 올리고 안도하지만, 이미 그것은 ‘성찰’의 과정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간 두어 번 그런 시기가 있었다. 처음 블로그를 열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스승이다. 며칠 동안의 말미를 통해 나는 자신을 돌아보고 곧 자신을 가눌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 느끼는 위기는 일종의 ‘관성(慣性)에 대한 위기’다.

 

글쓰기가 관성에 빠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글쓰기가 어떤 유형으로 굳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정직하게 말하면 ‘그렇다’이기 쉽다. 어떤 내용의 글이든, 긴장을 잃지 않고 써야 하는데 나는 여러 번 긴장이 풀어져 버린 김빠진 글을 끼적대었다. 그뿐인가, 퇴고의 횟수도 줄어들고 글을 맺는 방식도 적당히 안이해진다.

 

글이 ‘관성의 길’로 접어들면 거기서 무슨 중뿔난 성찰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갈 길 바쁜 걸음에 전후좌우를 살피는 건 쉽지 않다. 작가들이 원고 독촉에 시달리면서 쓰는 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필요한 것은 내면의 숙성인 것이다.

 

익은 밤송이가 저절로 벌어지게 하는 것은 햇볕과 바람이다. 일상의 삶에서 마음에 이는 물결을 한 자락의 언어에 싣는 데에 필요한 것도 오랜 성찰과 곰삭은 시간인 것이다. 한가위를 기다리며, 지금 익어가는 것이 과실만이 아니라, 비어 있는 마음이길 소망해 본다.

 

 

2009. 9.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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