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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을 떠나며

by 낮달2018 201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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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하여 마련한 24평 작은 집을 떠나며

▲ 이 아파트에서 우리 가족은 14년을 살았다. 좁고 허술했지만 정든 집이었다.

내일모레면 이 도시를 떠난다. 2월 중순쯤에 나올 전보 명령에 앞서 서둘러 이사를 하는 것은 집을 산 이가 하루라도 빨리 집을 비워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월 말까지 수업이 남아 있고 2월 초에도 며칠 간 근무를 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일이다.

 

아침에 아파트 앞 이발소에 가서 마지막 머리를 깎았다. “여기 한 십 년쯤 다녔지요?” 하고 물었더니 늙수그레한 이발사는 “벌써 그렇게 됐나요?” 하고 되묻는다. 예천에서 여기로 옮아온 게 1997년이다. 그해 7월에 준공검사를 앞두고 시공업체의 부도로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예천 서본리의 오래된 국민주택을 떠나 난생처음 내 명의의 아파트에 들었다.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

 

식구들 모두 행복하게 새집에 입주했다. 광고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인생의 첫 집’이었다. ‘ㄴ’자로 꺾이는 모서리에 있는 집이어서 팔리지 않고 있는 걸 분양받았다. 서울 사람들이 들으면 ‘애걔걔’ 소리가 날 만큼의 싼 가격으로 얻은 집이었다. 좁은 데다가 구조가 그리 기능적이지 못해서 좀 불편했지만 ‘내 집’이어서 모두가 행복해했던 집이었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 우리 가족이 얻은 첫 집은 경주 인근 소읍의 150만 원짜리 단칸 전세방이었다. 3년을 살았는데 거기서 둘째를 낳았다. 새로 지은 한옥이었지만 날림으로 지어선지 새벽에 일어나면 방안의 걸레가 끄덩끄덩 얼어 있곤 했다.

 

인근의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옮겨서 1년, 학교를 옮기면서 고향 인근의 소읍으로 옮아갔다. 오래되고 허술한 집이었지만 독채 전세였다. 아이들이 ‘부엌 깊은 집’이라는 부르는 그 집에서 이듬해 나는 학교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4년 동안 나는 해마다 집을 옮겨야 했다. 주로 주인이 써야겠다고 해서 비워주어야 했으니 세입자의 설움이라면 설움이다. 요즘처럼 포장이사 같은 체제가 없을 때다. 이사 때마다 열댓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큰돈 들이지 않고 이사를 끝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녀석들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해직 5년 만에 경북 북부지방으로 특채되었다. 예천역 뒤편의 오래된 국민주택 단지에 전세를 들었다. 낡고 허술한 집이었지만 방이 세 개나 되었고 너른 마당이 있어서 우리는 거기다 고추나 푸성귀 농사를 지어 먹었다. 거기서 산 게 3년 반쯤이다.

 

안동 시내의 이 아파트를 분양받고 입주한 게 1997년 7월이었다. 시공업체의 부도로 우여곡절 끝에 등기를 하게 된 건 한 3년쯤 후다. 나는 입주자대표회의 위원도 지냈다. 거기서 낸 ‘소식지’를 만들다 고발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14년, 아이들이 성년에 이른 집

 

그리고 14년이다. 여기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아이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었으며, 아내와 나는 오십 대 후반의 초로가 되었다. 14년이 지났지만 집은 깨끗하고 성하다. 순전히 아내의 공이다. 중간에 한 번 도배를 하고 장판을 갈았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엔 돈을 들인 덕분이기도 하다. 그 덕분인가 집은 적당한 시점에 팔렸다.

 

이사는 포장이사다. 인근의 이사업체를 불러 가격을 흥정했는데 백오십만 원에 가깝다. 짐이 많다는 게다. 통상 5t 전용 이삿짐 차 한 대 분이면 백만 원 정도로 가능하지만, 우리 집 이삿짐은 7t은 넘으리라는 게다.

 

‘버릴 만한 건 모두 버리고 가라’는 게 주변 지인들의 조언이다. 그러나 막상 버릴 건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1986년도에 산 장식장 하나, 1990년에 산 책장 한 개가 고작이다. 비좁은 아파트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짐 가운데 값이 나가는 것은 거의 없다. 쓸모로 따져도 비슷할 거다. 그러나 막상 그걸 버리는 건 쉽지 않다.

 

어쨌든 그런 가재도구 속에 담긴 건 우리가 건사해 온 세월이고 시간이다. 좋든 싫든 그것들을 이용하면서 아내는 이 허술하고 남루한 살림을 꾸려온 것이다.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한 것들은 이제 새집에 가서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떠난다고 하니까, 어느새 마음이 뜨기 시작했다. 조금 넓고 편한 집으로 가게 되어서일까. 이런저런 짐들을 쌓아놓고 건드리지 않게 되고, 커튼을 떼고 하다 보니 그러잖아도 썰렁했던 집안이 더 퀭해 보인다. 공연히 예전보다 더 춥다고 느끼게 되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이란 참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가. 소액에 분양받아, 14년을 살다가 거기다 몇 천을 더 받아 가는 주제인데 버리고 가는 집이 자꾸 서글퍼지기만 한다니……. 이삿날이 가까워질수록 아내도 마음이 짠해지는 모양이다. 그래도 14년이나 정붙이고 산 집인데, 아이들도 탈 없이 잘 자랐고…….

 

버리고 갈 것들이 어디 있는가…

 

먹먹한 마음도 전염하는가. 아내의 중얼거림을 듣다 말고 오늘 아침부터는 내 마음도 좀 달라진다. 아침에 현관문에 단 디지털 자물쇠의 설명서를 찾아 신발장 위에다 붙여 두고, 작은방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진기와 렌즈 등의 물건을 가방에 챙기고 하는데 기분이 스산해지면서 시나브로 치미는 무엇이 있다.

 

14년이라지만, 고향을 빼곤 가장 오래 산 데가 여기다. 예천까지 치면 18년, 근 20년의 세월을 이 경북 북부에서 보낸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좋은 세월’ 다 가고 이제 늙어가는 일만 남았는데 다시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떠밀려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서운하거나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것이 어디 그런가,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점점 미묘해진다. 공식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작별하기엔 아직 이르다. 여기서 만나고 교유한 사람들에게 건넬 작별의 인사는 차후로 미루기로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갔다 들어오면서 아파트 건물을 멀거니 바라다보았다. 현관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기도 했다. 자 어쨌든, 이별이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질 일은 아니다. 삶의 곡절마다 있기 마련인 숱한 봉별(逢別)의 일부일 뿐이지 않은가. 자못 그렇게 자신 위로하면서 이삿날을 기다린다.

 

2012. 1. 15. 낮달

 


▲ 2012년에 인연을 맺은 북봉산 아래의 아파트에서는 나는 만년을 보내고 있다. 그해 1월말에 꽤 큰눈이 왔다. 아파트 뒷마당 부근.

2012년에 구미로 옮겨 4년을 근무하고 나는 퇴직했다. 그리고 그해 늦여름, 지금의 아파트를 사서 아예 뿌리를 박았다. 북봉산 아래여서 바람이 심하지만, 대신 여름은 시원하다. 보온이 엄청나게 잘되는 집이어서 한겨울에도 난방비가 그간 살았던 집의 반도 들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낡은 아파트지만, 내게 이 집은 최상이다. 처음으로 서재라고 이름 붙인 내 방을 갖게 되었고 어설프지만 ‘북봉재’라는 편액도 달았다. 거기서 보내는 시간이 좋이 8시간은 되는데, 편하기가 이를 데 없다. [관련 글 : 이순 넘어 서재를 꾸미다]

 

글쎄,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어쩌면 이 집에서 나는 삶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를 알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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