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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배웅, 다시 한 세대의 순환 앞에서

by 낮달2018 201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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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 이상선 여사(1934~2015. 10. 17.)

▲ 장모님께서는 지난 10월 17일 세상을 떠나 이틀 후에 흙으로 돌아가시었다. 향년 83세. 편히 쉬소서.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지지난 토요일이다. 창졸간에 맞닥뜨린 당신의 죽음 앞에서 가족들은 당혹을 쉬 떨치지 못했다. 서럽게 통곡하는 아내를 달래면서 나는 뜻밖에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 놀랐다. 나는 마치 미리 준비해 왔던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장례의 전 과정을 챙겼다.

 

장모상을 치르며

 

맏사위 노릇 이전에, 이미 나는 내 부모님과 맏형님, 그리고 장인어른까지 가족들의 임종을 잇달아 겪어온 바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진작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깨우쳐 버린 것이다.

 

여러 개의 장례식장이 경쟁하면서 예전처럼 바가지 상술로 욕을 보는 일은 없어졌다. 병원 부속 장례식장과 전문장례식장이 서비스 경쟁까지 벌이니 상가로서는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애당초 처가 인근의 농협장례식장으로 가려다가 시내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오히려 편할 듯해서 몇 해 전에 장모님이 입원하기도 했던 병원 부속 장례식장과 계약했다.

 

예전 같으면 수백만 원에 이르렀을 분향소·접객실의 대여료를 받지 않았고, 식사, 도시락, 장의차, 영정, 조화 등 일체의 장례서비스가 유족의 뜻에 따라 일괄해 이루어졌다. 수의나 관도 적정 가격대의 것으로 유족이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았기에 아내는 영정사진을 마련해 놓지 못한 것도 마음 아파했다. 아내가 가끔씩 영정사진을 한 장 찍어두자고 해도 흘려듣고 말았던 결과였다. 딸애가 내 컴퓨터의 사진 폴더를 뒤진 끝에 지난해 생신 때 찍은 사진을 찾아내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첫날, 오후에 급하게 만들어 온 영정과 국화꽃으로 꾸민 빈소를 지키면서 나는 문상객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골인데도 모두 그만그만하게 살아온 터라 일가친척과 이웃들도 많지 않고, 자식들의 손님들도 얼마나 되랴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일 밤부터 손님이 끊이지 않다가 다음날에는 아침부터 손님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밀어닥쳤다. 나는 잠깐 머리를 갸웃했었는데, 나중에야 그게 장모님께서 이승에 남긴 당신의 삶의 흔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단체로 온 문상객들은 대부분 당신과 세 딸이 나가는 교회의 교우들이었다.

 

열아홉에 출가하여,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온 당신의 한평생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한 가정을 건사하면서 집안의 경제까지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길은 얼마나 가혹했던가. 배운 것은 없어도, 당신의 삶은 늘 여유와 너그러움이 넘쳤다.

 

해직 사위에게 용돈을 쥐여 주던 어른

 

문제의 핵심을 직관으로 이해하고 결정한 일은 흔들리지 않고 추진하는 등 당신의 과단성은 인근에서 ‘치마를 둘렀을 뿐 사내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데 경우에 어긋남이 없었고 옳은 것은 옳은 대로 그른 것은 그른 대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분이었다.

 

장모님께서 산 희생의 삶은 더 이를 게 없다. 자식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여든이 넘어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다. 그러면서도 어떠한 상황에도 자식들의 가난과 어려움을 비관하지 않으셨다. 젊은 시절, 해직되어 벌이를 못 하고 있는 맏사위에게 늘 딸 몰래 용돈을 쥐여 주시던 이가 장모님이셨다.

 

해직 기간이 4년 동안이나 이어져도 당신께선 한 번도 내 해직을 탓하거나 걱정하시지 않으셨다. 당신께서 내 해직의 의미를 이해하셨던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당신께서는 어떠한 상황에도 자식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으신 것이었다.

 

늘, 곧 좋아질 거다, 벌이가 없는 사위 때문에 당신 딸이 대신 벌이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찌 걱정이 없으셨을까. 그러나 장모님께서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시며 용기를 북돋워 주시곤 했다.

 

별로 살가운 성격이 되지 못하면서도 처가 일에, 장모님을 위한 일이라면 아끼지 않고 나선 것은 당신의 사랑에 부응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20여 년 가까이 살던 북부지방에서 고향 근처로 솔가한 것도 만년의 당신을 보살펴 드려야 한다고 믿어서였다. 당신께서는 그런 맏사위에 대해서 믿음과 애정을 아끼지 않으셨다.

 

2006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장모님께서 보여주신 결단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선영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장모님께서는 장례를 화장으로, 그리고 따로 무덤을 남기지 않는 방식을 고집하셨고, 집안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관철하셨다. [관련 글 : 흙 혹은 나무로 돌아가기]

 

무덤을 남긴들 누가 그것을 관리하겠느냐.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일, 묘에 묻히면 어떻고 산등성이에 뿌려진들 어떠냐……. 그때 이미 당신께선 우리의 장묘문화가 가진 문제점을 꿰뚫고 있으셨다. 장인어른은 선영의 모친 산소 밑 소나무 주변의 흙으로 돌아가셨다.

 

두어 해 전에 집안에서 선산의 어느 산비탈에 땅을 마련하여 가족 묘원을 만들면서 처조모를 비롯하여 장인어른까지도 그리로 모셔갔다. 따로 산소를 쓰지 않았으니 장인어른은 유골을 뿌렸던 나무 밑 흙을 옮겨갔다. 봉분 없이 평장을 하고 표지석도 세우지 않고 묻은 묘원에는 잔디를 심었다.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가신 길을 따랐다. 김천에서 화장하고 장인어른 옆 묘역에 미리 묻어 놓은 표지석을 들어내고 모셨다. 그리고 바쳐진 몇 송이 국화로 당신께서는 이승과 하직하셨다. 뒤늦게 교회에 나가 기른 돈독한 신앙심이 당신을 평안케 할 것이었다.

 

장모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우리 내외는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건, 1985년, 무려 30년이 흘렀다. 그리고 어머니가 2002년에, 장인어른이 2006년에 각각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마지막 한 분, 장모님마저 흙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장례를 치르면서 보니 내가 자식들 가운데 제일 위였다. 처남도 손아래니 꼼짝없이 어른 노릇을 해야 했다. 장인 장모의 동기간 가운데에도 여든이 넘은 분이 있고, 부산의 처숙도 병환이 깊으시다. 당장이야 건강하다고 해도 노인들의 그것은 모르는 일이니, 부음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한 세대의 마감, 황혼은 우리에게로

 

그것은 단지 노인들 몇 분의 삶이 차례로 마감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개인의 생몰이 아니라 한 세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젊다고(달리 말하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우리 윗세대가 저물고, 그 황혼은 시나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이상운 작가가 쓴 아버지의 간병기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 간다>(문학동네)를 읽으면서 나는 간병하는 아들이 아니라, 그 대상인 아버지의 시선으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받아들이는 것과 무관하게 시나브로 우리는 다음 세대의 부양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  상실의 아픔과는 무관하게 감나무에 달린 감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을 찍어냈다 .

시대의 진전에 따라 간소해진 데다가 기독교식으로 치르다 보니 장례는 좀 쓸쓸하게 끝나버렸다. 따로 봉분을 올리지도 않으니 산역(山役)도 없고, 삼우(三虞)도 생략이다. 장례를 마치고 친지들은 떠나고 자식들만 집으로 갔다. 집에 남은 고인의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거기서도 딸들의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유품 하나하나에, 당신께서 딸네들에게 주려고 만들고 있는 콩잎과 깻잎 김치 따위를 들여다보다가도 아내와 처제들은 눈물 바람을 그치지 않았다. 혼자 생활하신 처가에는 곳곳에 고인의 흔적들이다.

 

발인예배 후 장례식장을 떠나기 전에 나는 빈소에서 꽃 한 송이를 바쳤었다. 그리고 처가 현관의 댓돌 위에 서서 마당 한쪽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마른 눈물 한 방울을 찍어냈다. 이제 편히 쉬세요. 남은 자식들이 당신의 짐을 대신 지고 가겠습니다. 편안히, 제발 편안히 쉬시길…….

 

 

2015. 10.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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