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사랑
어떤 작가는 아내는 ‘장롱’ 같은 존재라고 했다. 아내는 장롱처럼 늘 거기 있다. 그래서 그 존재의 의미를 따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 자신의 ‘부재’를 통해 그 존재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게 해 준다는 얘기다. 그건 자유가 ‘공기’ 같다는 오래된 비유와도 같은 맥락이겠다.
아내는 ‘장롱’이다?
모든 남편에게 당신의 아내는 당신에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그 질문에 서슴없이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자신에게 묻는다. 아내는 내게 무엇인가. 마땅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혼인으로 부부가 되면서 우리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유보해 버리기 때문이다.
삶에서 아내나 남편을 바라보는 눈길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우리는 ‘반려(伴侶)’라 하여 배우자를 ‘짝이 되는 동무’라 이르고 영어권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뜻으로 ‘자기 반쪽’이라는 ‘베터 하프(better half)’를 쓰니 말이다.
연애든, 중매든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은 별로 다르지 않다. 불같은 연애 끝에 부부가 된 이든 서로의 자격을 저울질한 끝에 혼인에 이른 이든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사랑은 본질에서 같다. 부부는 삶을 지켜주는 건 연애 시절의 감정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기른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우리 내외도 가족을 이룬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삼십 년은 그저 그런 세월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게 마치 낯선 영화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불과 4, 5년 전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거기 담긴 우리 내외의 모습을 현재에 비기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세월이란 그처럼 인간이 가진 감정조차도 무화해 버리는 어떤 것이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 나는 참 무심하게 살았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놓고도 나는 내 삶에 너무 바빴다. 가족을 소 닭 보듯 하면서 살았다면 과장일까. 내가 가족의 의미와 ‘가장’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은 30대 중반, 해직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재래식 부엌이 있는 작고 허술한 집(아이들은 이 집을 ‘부엌 깊은 집’으로 부른다.)에서 세를 살 때였다. 가을 어느 날 밤에 잠에서 깨었는데, 창을 통해서 들어온 달빛이 교교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데리고 잘 때다. 달빛 속에 혼곤히 잠든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처음으로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최초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내 삶을 직접 맞닥뜨린 순간이었을 성싶다.
우리는 이사를 모두 여덟 번쯤 했다. 해직 기간에는 해마다 집을 옮겨야 했다. 세를 사는데 주인이 세를 올려달라거나 비우라면 꼼짝없었다. 복직하고 생활근거지를 옮기면서 아이들은 초·중학교를 각각 두 번씩이나 옮겨야 했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들은 성년으로 자랐고 우리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30년을 함께 나누어 온 사이니 우리는 무심해졌다. 거기에는 연애하던 시절에 뇌던 사랑과는 견줄 수 없는 ‘교감’이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이해고 믿음이고 용서이기도 하다.
한때는 서로 얼마나 많이 부딪치고 깨어졌던가. 30대 중반에 겪은 해직은 내겐 실존적 선택이었지만 그 짐을 몽땅 뒤집어쓴 것은 아내다. 아내는 별 불평 없이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 주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시방도 여전히 남루한 우리네 살림 앞에 내게 그렇게 말한다. 당신,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괜찮아요.
함께한 세월, 혹은 믿음과 용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마흔 살이 되기 전에는 나는 이부자리를 갠 기억이 없다. 그건 으레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그게 내 몫의 일이 되었다. 아내가 아침을 짓는 동안 나는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는 거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쩌다 바삐 출근하느라 시간 여유가 없는 때가 있다. 이부자리 개는 데 드는 시간은 불과 2, 3분이니 나는 서둘러 그걸 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바쁘긴 하지만, 아내가 팔이 아플 텐데……, 나는 우정 그렇게 생각하며 이부자리를 개고서 집을 나서는 것이다. 저밖에 모르는 내가, 말하자면 ‘사람’이 된 셈이다.
그저께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아내가 다림질을 시작했다. 아내의 다림질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데 그게 아내가 무려 삼십 년 동안이나 해 온 작업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맥없이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신, 날 위해 다림질을 삼십 년이나 했네, 고마워……. 아내는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피식 웃는다.
마침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먹음직한 음식이 조리되기 시작한다. 이왕 내친 김이어서였을까. 나는 또 그렇게 말했다. 다림질도 다림질이고……, 식구들 맛있게 먹이느라고 수고도 많았네. 이번에는 아내가 미소 끝에 그렇게 받는다.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고 당신이 고생했지, 뭐……. 글쎄,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닭살’이 돋았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무심히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내외가 오랜 세월을 같이 하는 것은 서로에게 가진 불만족을 줄이고 만족을 키워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젊을 때 부부의 다툼이 잦은 것은 서로에 대한 불만을 다스리지 못함 때문이듯 나이 들어 내외의 금슬이 좋아지는 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족하기 때문일 터이다.
유정 혹은 앙드레 고르의 사랑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로 나는 유정의 <램프의 시‧ 5>를 즐겨 읽는다. ‘내 갱생의 등불인 아내 추임(秋姙)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읽으면 정작 그 삶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사랑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유정(柳呈, 1922~1999) 시인은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드러나는 정보가 많지 않다. 함북 경성 출신의 이 시인은 경성중학 재학 때부터 작품을 발표했고 일본 유학 중에 이용악·김종한 시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일어로 시집과 단가집을 출간했고 해방 전에는 김기림과도 교유했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해 시집 <사랑과 미움의 시(詩)>(1957)을 펴냈다. 그는 현실에서 체험한 아픔과 사랑과 그리움을 현실과 대응시키면서 차분히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유감스럽게도 이후 그의 행적은 찾을 길이 없다.
연작시 <램프의 시>는 그의 대표작인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내 ‘추임’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연작에 따르면 그녀는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 시인의 갱생을 어떻게 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등불’이라고 붙일 만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시인의 아내가 전쟁 중에 세상을 뜬 거로 쓴 것은 순전히 연작시 ‘램프의 시’ 가운데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래 시인의 친손녀가 쓴 댓글에 나타나듯 시인의 부인은 시인의 임종도 지켰다고 한다. 유정 시인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아내여 바지런히 밥그릇을 섬기는 / 그대 눈동자 속에도 등불이 영롱하거니 / 키 작은 그대는 오늘도 /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는 부분과 “세월은 덧없이 간다 하지만 / 우리들의 보람은 덧없다 말라 / 굶주려 그대는 구걸하지 않았고 / 배불러 나는 / 지나가는 동포를 넘보지 않았다”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아내를, 아내와 함께 달려온 세월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D: A Love Story)』를 읽고 쓴 글을 통해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연민으로 넘치는 노인들의 사랑이 가장 ‘농익은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살을 맞대고 희비를 함께한 세월의 무게는 얼마나 ‘실존적’인가. [관련 글 : 죽음으로 유예한 이별-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과 함께한 세월은 60년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맞이할 이별 대신 세상을 함께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세월과 사랑 앞에 한갓진 우리 내외가 나눈 시간을 말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내 철없던 사랑을 되돌아보며 아내와 못다 한 것들을 짚어가며 늙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쩌면 아내에게 슬슬 넘치기 시작하는 남성호르몬과 내게 상승하는 여성호르몬이 어쩌면 기존 부부관계의 역전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지난 세월 동안 늘 내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면 아내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다스리며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되는지는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다스리거나 누르지 않고도 서로의 소박한 욕망이 조화롭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는지.
내 친구는 아내가 먼저 가면 그를 따르겠다고 했다. 아내 없는 삶은 남루할 것이라며. 글쎄, 나는 아내가 나보다 먼저 떠나는 걸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었으면 하고 바란다. 뒤늦게 아내 없이 사는 것은 정말 서글프고 외로울 테니까 말이다.
2011. 12. 16. 낮달
유지영 2017/09/15 05:42
안녕하세요, 유정 시인의 친손녀 딸입니다. 저희 할아버지의 아내셨던 오추임 할머니는 전쟁 중에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정정 부탁드립니다. 저희 할머니께서는 두 분께서 혼인하셨을 때부터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곁에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1999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낮달 2017/09/15 17:05
정정하였습니다. 마땅한 자료가 없어서 결례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유정 시인에 관한 모든 자료가 돌아가신 해를 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의 이름으로 최소한 백과사전 같은 데는 정정해 달라고 요청하시는 게 필요할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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