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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삼성’ 물건 안 쓰고 살기

by 낮달2018 2019.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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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물건 안 쓰고 살기, 불편하지만 할 만하다

▲ 삼성은 자사 직원의 죽음을 은폐, 왜곡하고 있다. ⓒ <프레시안>(김윤나영)

‘윤리적 소비’를 다룬 기사 “착한 커피, 혹은 더바디샵”을 쓴 것은 2007년 1월이다. 나는 거기서 ‘영악한 소비자’ 대신 ‘재화의 가치를 거기 투여된 노동으로 환산해 이해’하는 ‘합리적 소비자’를 이야기했다. 이들은 ‘반값으로 물건을 사게 된 행운을 기뻐하면서도 그들은 제값을 받지 못하게 된, 거기 투여된 노동을 안타까워할 줄 아는’ ‘윤리적’인 소비자들이다. 

 

윤리적 소비, 혹은 ‘삼성 물건 사지 않기’

 

이들 윤리적 소비자들은 ‘여러 개의 동종의 상품 중에 꼬집어 한 제품을 고르면서, 자신의 선택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량한 소비자’들이다. 나는 기사에서 이들의 참여가 ‘사람 사는 세상’을 여는 조그마한 실마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도 말했다.

 

나는 ‘기업이 이윤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기능한다’라는 걸 긍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 방식은 최소한의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금기시하고 있는 삼성의 ‘집요한 노무관리 방식’은 그들이 떠받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무관하게’ ‘야만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삼성의 상품을 더는 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부터다.

 

정작 예의 기사를 썼지만, 기사를 블로그에 걸면서 나는 정작 ‘윤리적 소비’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고백한 바 있다.

 

‘윤리적 소비’는 쉽지 않다. 어디 없이 진보적으로 사는 것은 불편할뿐더러 가외의 지출을 동반할 수 있는 까닭이다.

삼성에서 만든 물건을 피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디브이디(DVD) 플레이어나 청소기, 유무선 전화기 따위는 의식적으로 피했는데 아들 녀석이 요청한 엠피스리(MP3) 플레이어와 내 첫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는 꼼짝없이 삼성 거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기업의 촉수는 전자제품에서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까지 아주 촘촘하게 뻗어 있는 것이다.

착한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펜탁스의 기술력으로 만든 디에스엘아르 카메라 삼성 지엑스(GX)-10으로 그걸 찍으면서 기분이 ‘껄쩍찌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때 이후, 나는 삼성이 생산해 낸 상품을 더는 사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청소기, 세탁기 따위의 전자제품을 사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경쟁사의 제품을 샀다. 소형 휴대용 녹음기를 사면서 삼성 제품을 피하느라 갑절이 비싼 다른 상품을 사기도 했다.

 

휴대전화를 바꿀 때도 나는 한글 입력방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의 제품을 샀다. 아이들은 그걸 불편하게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거기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천지인’이든 ‘나랏글’이든 한글의 구성 원리를 적용한 것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국민의 지지를 받는 도덕적인 기업이 드문 현실에서 ‘윤리적 소비’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삼성 제품을 사지 않는 방식의 소비생활도 과연 나머지 기업들은 도덕적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현대, 엘지(LG), 한화, 두산, 롯데, 에스케이(SK)……, 모두 만만치 않은 기업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연초에 지인들이 꾸려가는 카페에 올라온 한 선배 교사의 글을 읽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인근 소도시에서 사는 이 선배는 삼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른바 ‘범 삼성’ 기업 전체를 대상으로 ‘나 홀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삼성 제품을 쓰지 않고 있다. 그리고 농심도 사 먹지 않는다. 아마도 광우병 파동 이후 언론 소비자주권운동이 벌어지면서 삼성카드를 가위로 자르고, 그리고 삼양 컵라면 촛불이 등장하였던 그때부터일 거다. 중국제 안 쓰고 살기가 그렇게 힘든 것처럼 삼성이나 농심을 사지 않고 살기도 참 힘들었다.

일단 쓰고 있는 것들은 버릴 수가 없어 TV나 컴퓨터는 그냥 두고 그 이후 전자제품이든 각종 일용품에서 CJ 제품과 농심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이마트 신세계 CGV 등에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모르고 보는 것, 사는 것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삼성 관련 제품들을 어찌 다 알 것인가? 알면서도 사지는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던 꿀꽈배기도 사 먹지 않았고 신라면도 먹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볶은 소금, 조청 등도 오뚜기나 청정원보다 CJ 것이 좀 더 싸지만 사지 않았다. 그렇게 싸게 팔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하청업체를 못살게 구는가를 생각했다.

매일매일 장을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가리며 사는 것이 참 힘들게 보이지만 막상 해 보면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다.”

 

일상적 소비생활은 전적으로 자기 몫의 삶일 뿐이다. 그것은 아무도 눈여겨보거나 감시하는 일이 전혀 아니다. 삼성 물건을 쓰든 쓰지 않든, 자신의 소비생활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외부의 상찬이나 비난으로부터도 온전히 자유로운 일이다.

 

‘나 홀로 불매운동’, 소박한 실천의 진정성

 

나 홀로 실천해 가는 ‘특정 기업의 불매운동’이 쉽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그것은 자신의 윤리적 선택에 대한 자기만족 외에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불매운동은 해당 기업에 털끝만 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역으로 그것은 반드시 ‘어려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다. 내가 지켜온 것보다 훨씬 엄격한, 선배의 ‘삼성 물건 쓰지 않고 살기’ 같은 소박한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은. 그이와 내 그것이 삼성의 매출에 털끝만 한 영향을 미치지 못할 터이지만 이런 실천의 진정성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난 1월 중순 <프레시안>의 삼성 관련 기사 “삼성 에버랜드 25살 사육사는 왜 갑자기 죽었을까?”를 읽으면서 나는 내 소박한 실천이 기업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분노가 개인의 것에서 사회적 연대로 이어지지 않는 한 스물다섯 살 처녀의 죽음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 공공의 눈은 삼성을 세계 최악의 기업으로 뽑았다. ⓒ <뉴스타파> 갈무리

나라 안에서는 대학 졸업생들이 가고 싶은 기업의 상위권에 삼성을 올려놓고, 존경할 만한 기업인의 선두로 이건희를 기리고 있을 때, 그린피스와 베른 선언이 다보스포럼에 맞서 실시한 ‘공공의 눈’(Public Eye)은 ‘세계 최악의 기업’ 세 번째로 ‘삼성’을 뽑았다.

 

‘공공의 눈’에서는 삼성이 “독극 물질을 사용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알려주지도, 보호하지도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최소한 140명이 암 진단을 받았고, 그들 중 최소 50명이 사망했다”고 지적하고 ‘환경오염, 노조 탄압, 부패와 탈세’를 일삼은 삼성을 반환경, 반인권 기업으로 선정한 것이다.

 

‘최악의 기업’ 3위를 만든 ‘민완 삼성’의 순발력

 

삼성은 주최 측에 항의 서한을 보내 “직업병이나 노조 탄압 등 후보로 오른 이유가 모두 명백한 허위사실이자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라고 항의했지만 온 세계 누리꾼들의 평가를 넘지는 못했다. ‘떡값과 뇌물’로 우리 사회 곳곳을 매수하는데 발군의 실력을 보여 왔던 삼성은 애당초 2위였던 순위를 3위로 끌어내리는 데 그쳤다. ‘투표 기간에 점점 많은 한국인이 참여해서 그들이 1, 2위 기업에 표를 준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하는 주최 쪽의 설명은 ‘민완(?) 삼성’의 순발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삼성이 나라밖에서 최악의 기업으로 선정된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과 ‘삼성이 만들면 다른’ 삼성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다른 일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의 사원이 되기를 희망하고, 거기서 다른 기업보다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의 브랜드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연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어느새 정치적 권력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이 거대 자본의 횡포 앞에서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것은 조직화하지 않은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바탕을 둔 사회적 실천이기도 하다.

 

뜻밖에 삼성에 대한 ‘나 홀로 불매운동’을 벌이는 이들은 적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나라 안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월간 <작은책> 2012년 2월호에 실린 한 ‘뉴욕 아줌마’의 실천도 그중 하나다. 그이는 미국인 남편마저 삼성 불매운동의 동지로 삼았다.

 

“(남편은) 초립동표 야채 만두, 아씨표 보리, 깻잎, 생식용 두부 등의 목록을 한국어로 적어주면 하나도 빠진 것 없이 혼자서 장을 봐 옵니다. 그리고 삼성 물건이 싸다고 권하는 미국 가게 직원에게 왜 삼성 물건을 안 사는지도 꼭 말하고 다닙니다.”
     - 이명희, 살아가는 이야기, <작은책> 2월호 17쪽에서

이제 우리 집에 남은 삼성 물건은 14년이나 쓴, 플라스틱 외형이 군데군데 깨진 14인치 텔레비전 한 대, 10년이 가까워지는 냉장고 한 대가 고작이다. 성한 물건을 버릴 일은 없으니 앞으로 몇 해쯤은 더 이놈들과 동서(同棲)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안다. 내가 지켜온, 그리고 지켜갈 이 소비의 방식이 문제의 해결과는 아주 먼 것이라는 것쯤은. 그러나 이런 내 선택은 동시대인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분노에 대한 나름의 참여이다. 이러한 내 선택이 초보적이지만 사회적 연대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게 큰 힘이고 격려가 되리라.

 

 

2012. 2. 5. 낮달

 


2020년 현재, 나는 물론 우리 집에선 더는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제습기 같은 가전제품을 물론, 식구 가운데 아무도 삼성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 사진기도 펜탁스 제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립한 컴퓨터 내부에 들어간 SSD(Solid State Drive)나 하드 드라이버 따위까지 고르지 않기는 어려웠다. 선배처럼 범 삼성’ 가의 기업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삼성을 쓰지 않고 사는 게 생각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메이드 인 차이나를 쓰지 않는 게 더 어려울지 모르는 세상 아닌가 말이다.

 

20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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