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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다시 읽기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by 낮달2018 2018.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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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넘게 써 온 글이 천 편이 넘었지만, 그 가운데 몇 편이나 '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시 부끄러움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 있긴 하다. 글을 쓴 때와 내용 분류와 관계없이 무난히 읽히는 글을 한 편씩 다시 싣는다.

 때로 그것은 허망한 시간과 저열한 인식의 수준을 거칠게 드러내지만, 삶의 편린들 속에서도 오롯이 빛나는 내 성찰의 기록이다. 나날이 닳아지고 있는 마음의 결 가운데 행여 거기서 예민하게 눈뜨고 있는 옛 자아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까.

▲ 물리적 시간의 변화는 생물학적 노화를 가져온다.

마음도 나이를 먹는다.” 써 놓고 보니 꼼짝없는 신파다. ‘인간은 서서 걷는다는 진술과 다를 바 없는 맹꽁이 같은 수작이다.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가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뚱이와 그 기관의 노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몸이 늙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명확한 자각 증상의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다.

 

 산 따위를 오르다가 적당한 높이의 내리막을 내려가 보라. 혹은 쉽지 않은 틈새의 개울 같은 허방을 뛰어넘어 보라. 대체로 젊은 축들은 서슴없이 뛰어내려 버린다. 대상을 보는 순간, 그 높이와 자신이 발을 디딜 위치와 착지할 때의 충격 따위가 한꺼번에, 별도의 셈이 필요없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까닭이다. 허방도 마찬가지다. 건너편을 흘겨보면서 건너기를 결심하는 순간, 이미 의지와 몸의 관절과 근골격 등은 이미 공조의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저도 몰래 진행되고 있는 노화’의 과정들

 

 뛸까 말까가 망설여진다면 아직은 괜찮다. 바로 다른 경로가 없는가를 주변을 눈여겨 살피고 있다면 이미 그는 젊지 않다. 대상을 보는 순간, 이미 자신의 거푸집이 먼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일찌감치 깨우치고 있다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 훌쩍 뛰어 내리는 대신 이 신중한 ‘중늙은이는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아주 조신하게 자신의 거푸집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게 싫지 않게 느껴진다면, 어느 날부터 텔레비전의 볼륨을 저도 몰래 자꾸 키우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거푸 되묻다가 종내는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사실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 채) 바보처럼 고개를 주억거려 본 경험이 있다면, 그에게서 노화는 이미 매끈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 게 옳다.

 

마음의 노화는 다분히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다. 몸의 노화가 전해주는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징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어느 날 그는 너무나도 구체적인 증거 앞에서, 옅은 비애와 상실감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노화의 속도는 몸의 그것을 앞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다.

 

이제 쉰고개를 겨우 넘긴 형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청승맞을뿐더러 다분히 외람되고 민망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몸의 정직한 반응만큼 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 앞에서도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이 먹은 마음의 모습을 그려 내는 가장 소박한 표현을 나는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버이로서의 바라봄이다.

 

 어버이는 피와 살로 자식과 생명을 나눈다. 혈육(血肉)이라는 낱말이 생긴 까닭이다. 짐승에게도 제 피붙이에 대한 애정은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뭇 짐승과 달리 그 관계의 의미를 확충하여 이해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자기 혈육에 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 마음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외경(畏敬)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나이듦은 결국 어버이 되기의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넓히게 되는 것이다. 새 봄을, 그리고 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는 꽃을 경이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때쯤이다.

▲ 길거리의 노인들. 노인들의 표정과 모습은 어디서나 몹시 닮았다. ⓒ 이슈메이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외경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어버이가 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 듯하다. 그것은 단지 앞서 말한 너그러움을 위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아이들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단순히 내 아들, 내 딸이라는, 관계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진 의례적 성격에서 내가 지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심화되기 위해서는 내 살을 베어서라도…… 식의 피 흘리는 맹목(盲目)의 사랑에 대한 깨우침이 필요하다. 내가 지은 생명의 가치, 그 절대성에 대한 자각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새롭게 하며 그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출산의 고통을 통해 어머니는 이미 자기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내 아이처럼 바라보게 된 것은 내 사랑의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고서부터이다. 처녀 적에는 아이들에게 쉽게 매질을 했는데, 아이를 낳고서부터 그게 참 힘이 들기 시작했다는 후배 여교사의 고백도 같은 과정에 있겠다.

 

아비와 어미의 자리를 넘어 할미와 할아비의 자리에 오르면서 더 이상 그들은 아이들에게 모질어질 수 없는 까닭도 거기 있다. 가끔씩 부모는 분노로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만, 조부모가 되면 그게 불가능해진다. 분노보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더 큰 까닭이다. 아파트 주변에서 가끔씩 만나는 살빛 맑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 아이들이 낳을 아이의 숨결 같은 걸 아주 진하게 느끼곤 한다.

 

 매주 일요일에 방영되는, 해외 입양아와 그 생모의 만남을 다룬 한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순발력 뛰어나고 말솜씨가 좋은, 젊은 개그맨과 매주 초대되는 예쁘장한 여자 연예인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애당초의 목표대로 시종일관 시청자들이 눈물바람을 하게 만든다.

 

사랑의 ‘동질성’과 절대성

 

20년이나 30년 만의 만남이 주는 극적 성격도 흥미롭거니와 주인공들이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슬픔과 고통의 결을 함께 따라가면서 아내와 나는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혀를 차는 등 분노와 연민의 감정을 쉽게 감추지 못한다.

 

지난 연말에는 미국에 입양된 한 자매와 그 생모의 만남을 방송했는데, 늘 그랬듯이 딸들보다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이 눈물겨웠다. 그건 전적으로 사랑의 무게와 부피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일 터이다. 어머니의 통곡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수천 수만 겹의 한을 그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양부모를 만나기 위해 들른 집에서 카메라에 잡힌, 계단을 내려오던 양어머니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자신이 기른 딸과 그 딸의 생모를 일별하면서 그 여인이 지은 슬픔과 연민이 오롯이 담긴 그 표정은 마치 어버이의 사랑이 갖는 동질성절대성의 한 미니어처(miniature; 세밀화) 같았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딸의 생모를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인종도, 나라도, 문화도 달랐지만, 그 백인 여성이 보여 준 어머니의 눈물은 사랑의 보편성을 뜨겁게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어버이로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다시 자식으로서의 어버이 사랑을 되살피게 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한다. 나이를 먹으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한편, 우리는 못다한 '치사랑'을 후회하고 그 회한으로 목이 멘다. 일상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굽은 등, 힘겨운 걸음걸이, 굵게 팬 주름살, 가녀린 한숨소리 들은 모두 우리의 어버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굽은 어깨에 실린 고독, 비낀 하늘에 잠시 머물다 가는 외로운 눈길들, 우리는 고통의 눈금 하나, 마음속 상채기로 그들을 기억하지만, 이미 그분들은 세상에 없다. 그것이 어버이로 세상 살아가기의 우울한 공식이다. 그렇다. 마음도 새록새록 나이를 먹는 것이다.

 

2006. 1.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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