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구에 대한 집착 … ‘목수 아버지’의 피
요즘 나는 펜치나 드라이버, 망치와 톱 같은 공구들에 묘한 집착을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녹슬어 뻑뻑해진 소형 펜치를 후배의 충고대로 식용유를 이용해 정성들여 녹을 닦아내 제대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다.
연모, 그리고 인간
보이지 않는 부위 깊숙이 녹이 슬어 거의 사용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몇 방울의 식용유를 먹고 붉은 녹물을 조금씩 토해내더니 곧 새것일 때의 기능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가끔씩 무료해지는 시간마다 연필꽂이에 꽂아둔 그 놈을 꺼내 만지작거리면서 연모를 처음 만들어 쓰던 때의 선사시대의 인간을 생각하곤 한다.
그보다는 더 오래 전 일로, 집에서 쓰던 망치의 자루가 부러져 임시방편으로 아카시 나무로 볼썽사납게 자루를 박아 쓴 지 근 3년만에야 나는 그놈의 자루를 간 적이 있다. 생나무가 마르면서 조금씩 헐렁해지기 시작한 망치자루를 갈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차일피일만 하다가 결국은 인근의 야산에 들러 한참 물이 오른 감나무 가지 하나를 잘라 왔다. 물론 망치자루로 감나무가 적당하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짧은 시간에 낫도 없이 과도 하나로 꺽어올 적당한 나무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대형 공작용 도루코 칼로 그놈을 자르고,식칼을 이용해 틈새를 메울 쇄기를 다듬으면서 나는 잘 벼루어진 낫과 끌을 얼마나 원했던가. 엉성하게나마 자루의 모양이 완성되자 나는 그것을 공구서랍 속에 곱게 모셔두면서 그놈의 물기가 완전히 말라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 충분히 말라 꼬장꼬장해진 나무를 망치뭉치에다 박고 쇄기를 메우자 드디어 망치는 제 모양을 갖췄다. 나는 가끔씩 서랍을 열고 놈을 꺼내들고 흔들어보면서 놈의 기능을 확인해 보곤 한다.
그러한 내 일종의 유한 취미의 뿌리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집안의 적당한 나무를 골라 단시간에 훌륭한 공작물을 만들어내곤 하던 아버지의 피에 있다. 아버지께선 목수셨다. 물론 당신은 일생동안 나무를 다듬은 전업 목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 우리가 떠나온 집을 손수 지으셨고, 젊은 한때를 나무를 다듬으며 보내셨다. 훨씬 뒤에야 내가 깨달을 것이지만 아버지께선 생계의 수단으로 나무를 다듬었다기보다는 그런 일을 통해 가족과의 모듬살이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나누고자 하셨던 듯하다. 당신께선 다정다감하고 무엇보다 정직하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다정다감하고, 정직하고 너그러우셨던 아버지
아버지가 최초로 내게 공작물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마 국민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된다.나는 그 즈음 잘 다듬어진 팽이가 몹시 갖고 싶었으나 학교 앞 초라한 전방(廛房)에선 그 놈을 구할 수 없었다. 혼자서 낑낑대며 적당한 나무로 깎으려 해보았으나 그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본 당신께서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팽이를 깎아 어린 아들에게 쥐어주셨다. 이때, 나는 기쁨에 겨워 ‘울 아부지가 최고’라는 탄성을 질렀는데 지금껏 어머니는 이 일을 두고두고 한 시절의 부자간의 정겨운 순간으로 추억하시곤 한다.
아버지의 작업을 바라보는 것은 어린 내게 참으로 경이롭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비교적 작은 키에 도타운 몸피였는데 별 서두르는 법도 없이 나무를 자르고 깎고 대패질을 하여 순식간에 단정한 공작물을 만들어내시어 나는 늘 그런 부조화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느끼곤 했다. 목수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귓뒤에 작은 몽당연필을 끼우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신 채 곡척(曲尺)에다 시선을 모으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당신의 구레나룻에 머물다 가는 바람과 햇빛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막 젖을 뗄 무렵부터 시작한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아버지께선 방앗간은 물론 집안에 요긴한 모든 공작물들을 손수 만드셨다. 각각 다른 크기의 연장궤는 물론이고 함석을 이용한 각종의 소쿠리나 자투리의 송판을 짜 길죽한 나무의자(저 6,70년대의 만화방에 모여든 조무래기들을 일렬횡대로 앉히던 그런 의자 말이다.) 등속을 만드셨고, 만년에는 훌륭한 솜씨로 TV대(臺)를 짜시기도 했다. 아아, 그리고 내 어린 시절, 얼어붙은 낙동강 위를 달리던 썰매들……도 결코 빠뜨릴 수 없다. [관련 글 : ‘택택이 방앗간’의 추억]
내 신혼 시절에 내 방 한구석을 장식했던 붉은 페인트칠의 자그마한 책장도 아버지의 솜씨셨다. 그 책장을 채웠던 내 빈약한 장서들은 지금 훨씬 크고 의젓한 서가에 누렇게 변색된 채로 남아 있지만, 당신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솔가해 낯선 땅에서 한 울을 이뤄 살다 황급히 달려온 막내의 얼굴을 흘낏 일별해 보시곤 아버지는 만 24시간 동안의 혼수상태를 끝내고 숨을 거두셨던 것이다.
아마 81 년의 여름이었으리라. 태풍이 지나간 후에 수해가 여러 집을 덮쳤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신이 손수 지으신 흙담의 기와집의 뒷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나온 얼마간의 지원금으로 아버지는 인부를 들여 그 뒷벽을 시멘트 블록으로 다시 쌓았는데, 공사가 끝나고 고정해 놓은 내 방의 문틀에 마지막으로 문을 달고 나서 지으시던 아버지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문틀의 고정이 설었던 탓일까. 아귀가 맞아야 할 문과 문틀의 마지막 틈이 길쭉하고 예리한 각도의 역삼각형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된 당신의 감각과 의지를 배반하고 삐죽이 틈을 드러낸 문틀 앞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요량할 수 없을 만큼의 참담한 표정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녹슨 솜씨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듯하다. 당신께선 쫄대를 적당히 잘라 붙이는 걸로 벌어진 문틈을, 청년 시절부터 단근질한 당신의 감각을 압도해 버린 세월의 간격을 여미셨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야기했지만 기실 나는 그런 공작엔 손방이나 진배없는 편이다. 공구에 대한 일종의 집착도 서른이 넘고, 가정을 온전히 이루면서 시작된 것이니, 일생을 관류했던 아버지의 이력 앞에 감히 그 '피'를 운운할 자격이 애당초 없는 것이다.
올 들어 낯선 땅으로 옮아 살면서 이룬 몇 가지의 공구들, 몽키 스패너와 단단한 새 펜치나 규격이 다른 드라이버 등속을 가끔씩 사용하면서 나는 다시 새삼스럽게 톱과 대패 따위의 목공구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미 버리고 오다시피 한 고향집에 남겨진 아버지의 공구들은 이미 너무 낡아서 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들이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 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간암이 막 일흔이 되셨던 당신을 빼앗아 갔다. 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께선 자신의 병명을 짐작조차 못하셨다. 모두가 간경화라고 둘러댔고, 치유될 수 있다고 당신은 믿으셨던 것 같다. 온몸으로 번진 황달과 무력감으로 거의 기동도 못하시면서도 당신께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지만, 혼수에 빠진 24시간 후에 단순히 삶에의 미련으로서가 아니라, 가족과의 단란한 한때에 대한 소박하지만 강렬한 미련을 남겨두고 눈을 감으셨다. 1985년, 을축 팔월 스무이레였다.
그 떠돌이별을 맞는 ‘사랑의 제의’
아버지의 육신이 산으로 향하던 날은 내가 낳은 당신 손자의 백일이었다. 그 날 네 살이던 내 딸애가 역시 아버지의 솜씨였던 녹색의 페인트칠을 한 대문을 붙잡고 눈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에사 어렴풋이 깨달은 일이지만 그 소박한 생애를 끝낸 아버지가 머문 떠돌이별―이는 가브리엘·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쓰인 말이다. 마르께스의 의도가 어쨌든 간에 나는 이승을 떠난 영혼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의 가녘을 나지막하게 떠돌아 다닌다고 믿는다.―은 지금도 우리 가족들 주위를 나즈막하게 떠돌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 다섯 해에 가까운 해직 시절 동안 나를 무시로 충동질했던 것은 목공으로의 전업으로, 이미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 있던 한 목수 친구의 도제(徒弟)가 되는 것이었다. 굳이 그것을 충동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그때 이미 서른 고개를 훌쩍 넘어 있었고, 그만큼의 세월 동안 나를 지탱했던 것이 서툰 관념과 이론들이어서, 분명하고 단순한 사실조차도 난삽한 허구로 덧칠하는 데 이력이 난 얼치기 먹물이었던 것이다.
내가 5년만 젊었어도…, 자넬 따라다니며 나무를 만지며 살고 싶어. 이건 정말이야. 어느 날,술자리에서 만난 예의 목수 친구에게 내 희망을 이야기했을 때, 그 사람 좋은 친구는 맑고 정겹게 웃기만 했다. 소목일이면 모를까, 요새 집짓는 데 목수가 하는 일이 뭐 있기나 해야지……. 국민학교 졸업으로 자신의 학력을 마감하고 스무 해 이상을 톱밥을 먹고 살아온 그 자그마한 내 친구는 자신의 신산한 삶에 끊임없이 옹이를 박았던 숱한 눈물과 땀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릴 적 친구를 그렇게 용서해 주었다.
그래도 나는 가끔씩 길거리의 전신주 위에, 혹은 정류장의 게시판에 붙은 직업훈련원의 원생 모집 공고를 설레임과 아련한 슬픔과도 같은 눈길로 쳐다보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언젠가, 내 삶에 다소의 여유가 생긴다면 나는 일요목수(일요화가가 있다면 일요목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을 터이다.)가 되리라고. 그러나 과연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올에 조부의 출상 덕택에 백일을 빈손으로 넘긴 손자는 열살이 되었다. 그 애는 낳았을 때는 내 국화빵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타고난 흰 살결과, 여름이 들면서부터 땀으로 속옷을 적셔내는 체질과 너그러운 성품, 애비의 서툰 공작에 동참하는 집요한 관심 등에서 나는 누대에 걸친 피의 순환을 확인하곤 한다. 아버지께서 머문 떠돌이별은 내 머리를 낮게 스쳐가 시방 아들놈의 이마에서 넉넉하게 쉬고 계신 것이다. [관련 글 : ‘아비의 아들’에서 다시 ‘아들의 아비’로]
이달 말께 고향을 찾으면 나는 아버지의 묵은 연장궤를 뒤져볼 터이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쓸만한 톱과 대패 따위의 목공구를 마련하고 싶다. 그것은 내 머리 위를 스쳐간 한 따스한 떠돌이별을 맞는 내 추억과 사랑의 제의(祭儀)이기도 하다.
1994. 10. 낮달
* 이 글을 읽고 나서 아내는 목이 메었고, 딸애는 설움에 겨워 울먹였다. 모두 다 우리 가족들에게 사랑의 추억으로 남아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탓일 게다.
* 결국 나는 아버지의 연장궤를 챙기지 못했고, 아버지께서 손수 짓고 운영하셨던 우리 옛날 집과 방앗간은 인근 도시의 상인에게 팔렸다. 지금 그 옛터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흑염소 불고깃집이 날아갈 듯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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