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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고백 - 회고 혹은 참회

by 낮달2018 2019.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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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을 되돌아보며

▲ 수업은 아이들과 ‘교감’하는 일이다. ‘교감’의 성공이 곧 ‘수업’의 성공이 된다.

며칠 전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났다. 40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문학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다. 열일곱에 만났는데 그새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한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일하다가 10여 년 전에 퇴직한 이래 여러 곡절을 겪은 친구다. 대전 시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지난 17년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조만간 교직을 떠나고 싶다는 얘기를 했더니 블로그를 통해 내 교단생활을 짐작하고 있는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역시 그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서른 해 가까이 켜켜이 쌓인 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이들의 변화, 에멜무지로 시행되는 교육정책, 나날이 심화하는 입시경쟁, 그 가운데서 나날이 황폐해져 가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어찌 몇 마디 말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래, 단지 지겨울 뿐이지. 몸도 고달프지만, 무엇보다도.”
“그러고 보니 내 삶에서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없었던 것 같네. 자넨 어때?”
“입 밖으로 존경의 뜻을 표시한 적은 없는데, 기억나는 이가 두 분 있지. 자네도 알 거야…….”

 

정말이다. 나는 특별히 존경의 염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기억나는 선생님은 두 분이다. 아마 선생님들께선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까까머리이던 시절, 그분들은 4~50대의 장년이셨으니 말이다.

 

‘은사’에게서 배운 ‘관용’과 ‘진정성’

 

함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냥 김 선생님과 박 선생님이라고만 해 두자. 김 선생님은 윤리(그런데 이 부분은 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선생님은 한문을 가르치셨는지도 모르겠다.)를, 박 선생님께서는 영어를 가르치셨다. 두 분에게서 배운 수업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없다.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두 분이 온몸으로 보여주신 ‘태도’이기 때문이다.

 

김 선생님은 작달막한 키에 유난히 동안이어서 해맑은 느낌을 주는 분이셨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늘 조곤조곤 말씀하시곤 했는데 체벌하는 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님 시간은 자주 소란스러웠다. 수업이 시작되어 인사를 하고 출석부를 기록하고 난 뒤에도 아이들은 저마다 잡담이 늘어졌다. 그래도 선생님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없이 아이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2, 3분의 시간이 흐르면 교단 쪽의 침묵을 깨달은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문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느릿느릿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정을 실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떠들고 얘기할)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을 좀 더 줄까?”

 

그건, 교사의 존재는 안중에 없다는 듯 소란을 멈추지 않는 아이들이 괘씸하여 떠보는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기분이 썩 괜찮아서 발동한 너그러움도 결코 아니었다. 초등학생 아이들도 교사의 말에 담긴 진정의 순도를 동물적으로 알아채는 법이다. 하물며 고등학생이랴. 그러면 아이들은 공연히 죄스러워져서 아니요, 하고 교과서로 눈길을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그게 다다. 그분의 수업이 어땠는지, 어떤 인상적인 얘기를 했는지, 아이들이 그분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따위는 기억에 없다.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은 내가 선생을 이해하는 데 그리 긴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내겐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따뜻한 눈길과 관용의 태도가 마땅히 교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시간을 더 주겠노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돌아보는 선생의 따스한 눈빛, 연민으로 가득 찬 표정, 차분한 나직한 목소리에 실린 진정성……. 나는 선생이 보여준 ‘진정성’과 ‘관용의 태도’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을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영어를 가르쳐 주신 박 선생님도 진정성이라면 김 선생님에 뒤지지 않는 분이었다. 반백의 머리에 무언가 깊은 고뇌가 서린 듯한 표정이 멋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선생의 수업은 대단한 열강이었는데, 그래서인가 늘 쉰 듯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열강’의 수준도 여러 종류일 터이다. 선생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도 그리 높지도 않았다. 땀을 흘리거나 침을 튀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그가 온전히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다. 그리고 그런 열의의 가장 깊은 곳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앎을 아낌없이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과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선생께서 구사한 영어가, 혹은 그의 수업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아이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따위의 기억도 역시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수업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는 그의 모습에 경의를 표했을 뿐, 정작 수업을 듣는 대신 소설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져 있을 때가 훨씬 많았으리라.

 

고교를 졸업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나는 내가 교사가 된다는 사실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누구처럼 나는 ‘교직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단지 ‘방편’으로서 교단을 선택했다. 경주 지역의 한 여학교에 부임하면서도 나는 거기 ‘잠깐’ 머물다 갈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추 서른 해가 가까워진다. ‘경유지’라고만 여겼던 학교였음에도 나는 섣부르게 ‘학교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교원노조’ 운동에 참여했고, 그것 때문에 타의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다섯 해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교직이 삶의 보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동시에 ‘생존의 수단’이라는 사실도 아프게 깨달으면서.

▲ 당구 큐를 들고 있는 교사, 수십 년 전의 내 모습도 이랬을 거다 .

복직 후 지금까지 모두 6개 학교를 옮겨 다녔다. ‘참교육’을 부르짖다 쫓겨났다 돌아온 ‘불온한 교사’는 어땠을까. 나는 굳이 앞서 든 두 분 선생님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은연중에 그분들이 보여준 태도가 내가 이르러야 할 어떤 목표 지점이라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분들은 말하자면 내 교단의 ‘사표(師表)’였던 것이다.

 

두 분 중 굳이 더 따르라면 나는 ‘사랑과 관용’의 자세를 가르쳐 준 김 선생님을 좇고 싶었다. 교육운동에 투신할 즈음, 나는 무자비한 체벌을 자행하고 있었던 ‘폭력교사’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교육’과 ‘통제’ 사이에서 내 내면은 황폐해지고 있었다. [관련 기사 : 문제아는 발길질과 따귀로내가 왜 이러지?] 그런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아이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참교육 실천 운동’의 대의였다.

 

무엇보다 젊었으므로 관용은 멀었고 억압적 권위가 더 가까웠던 시기였다. 그런 너그러움에 대한 ‘결핍’이 무의식 속에서 선생님을 늘 환기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떠나면서 나는 매를 버렸고 다시 돌아온 교단에서 20여 년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김 선생님이 보여주신 태도를 따르기에는 수양도 인품도 보잘것없었다.

 

나이 들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주체로 세우는 수업이나 교실보다는 내가 장악하는, 온전히 내 통제 아래에 있는 시간을 원했던 것이다. 그 경계와 눈높이를 낮추고 아이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법을 늘 마음에 새긴다고 했지만, 그 근본적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선을 넘는 아이들의 반응 앞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분노를 명료하게 의식한다. 아이들의 사소한 소란과 일탈도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게 쉽지 않다. 그런 자각이 새삼 선생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해 주었다. 나는 50점도 과하다고 여기는 냉정한 마음과 그래도 6, 70점을 줄 수도 있지 않으냐는 자애심 사이에서 몹시 쓸쓸해짐을 느꼈다.

 

‘되돌아보는 30년’, 회고 혹은 참회

▲ 90년대 드라마 <옥이 이모>의 정종준. 그가 맡은 교사 역도 따를 만한 것이었다.

나는 박 선생님의 열정과 태도를 얼마나 흉내 냈을까. 여기엔 평균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선생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침을 튀기지도 않으면서 온전히 전력을 다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제풀에 먼저 흥분해 잔뜩 목소리를 높이거나 거품을 문 채 수업에 까무룩 빠지곤 했으니 말이다.

 

수업을 건성으로 치르거나 적당히 때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수업에 배분했다. 기술적으로 세련되지는 못했을망정 내가 전하고자 하는 애정과 열의를 아이들도 이해해 주었다. 만족스럽게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 마음의 배웅을 받으며 교실을 나서면서 나는 40년 전의 선생님을 따뜻하게 떠올리곤 했다.

 

어저께다. 학년 초에 수업 분위기가 잡히지 않아서 애를 먹은 반에서의 문학 수업이었다. 내 나름으로는 꽤 애를 써서인지 요즘은 아이들과 교감이 살가워졌다. 민요 ‘시집살이 노래’를 가르치다 말고 어쩌다 내 40년 전의 그 은사들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두 분 선생님을 닮고자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나는 지금도 너희들이 좀 엇길을 새면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어떤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그러니 50점도 과할지 모르겠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선생님을 따르고자 한 것으로도 족하다는 걸. 나는 아무리 원해도 선생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 모습이 바로 내 ‘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가진 성품과 인격의 한계인 것이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희도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경우에도 열심히 가르치려 한 것은 그나마 이룬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어진 과제와 지식만을 전하는 학원 강사가 아니다. 나는 수업을 통해서 너희에게 무언가 ‘삶에 대한 태도’ 같은 걸 가르치려 했다. 물론 여기엔 너희가 흔쾌히 동의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이제야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 것은 좀 늦은 감이 있다. 앞으로 남은 아홉 달 동안 나는 내 수업이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면 좋겠다. 물론 괴로운 시간이 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은 내 몫이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내 수업에 기꺼이 참여하는 너희가 있어서 좋은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아이들이 내 섣부른 ‘고백’과 ‘성찰’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었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과거의 은사 이야기를 꺼내 공연한 ‘구라’를 푼 교사를 낯설게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조만간 교직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면서 나는 가끔 그날을 막연히 그려보곤 한다. 서둘러 떠나는 것이므로 당연히 ‘퇴임식’ 따윈 있을 일이 없다. 나는 퇴임과 관련한 어떤 형태의 공식적인 자리도 만들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근무연한을 채운 교사들이 학교를 떠나듯, 그렇게 심상하게 학교를 떠날 것이다.

 

글쎄, 아이들에겐 인사를 해야겠다. 그것도 마지막 수업 시간을 이용하면 된다. 퇴임의 변? 그것도 약식으로 줄일 일이다. 제대로 말하라면 아마 한나절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버나드 쇼의 생전 묘비명을 닮을지 모르겠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우물쭈물하다 보니 벌써 퇴임이다.’라고 말이다.

 

정말, 이 ‘혹성(?)’을 탈출하게 될 때 한 번 더 기회가 있을 거다. 지난날에 대한 한갓진 회고든, 부끄러운 참회든 말이다. 그때까진 마지막 힘을 다해야 할 수밖에 없다. ‘젖 먹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매운 손찌검을 내리던 젊은 날의 객기라도 다시 기억해야 할 일이다.

 

 

2012. 6.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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