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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세월은 가도 명작은 남는다

by 낮달2018 2019.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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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의 <서편제(西便制)>(1993)

▲ 요즘 국어 시간에 영화 비평문을 배우고 있다 .
▲ 영화 <서편제>의 포스터

요즘 국어 시간에 비평문을 가르치고 있다. 교재는 교과서에 실린, 유지나 교수의 영화 <서편제> 평론이다. <서편제>가 개봉된 것은 1993년인데 아이들은 대부분 1995년에 태어났다. 당연히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본문을 배우기 전에 <서편제>가 어떤 영화인지부터 시작해야 했다.

 

원작, 줄거리, 배우, 감독을 소개하고 영화의 스틸 사진과 동영상 따위를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밑그림을 그려주었다. 당시에 영화를 본 느낌이나 주변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일곱 학급을 다니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18년 전에 본 영화가 새롭게 되살아났다.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이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서편제>는 단성사 개봉 당시 서울에서 196일 동안 백만 관객을 동원하여 사상 최대 관객을 모은 영화로 기록된 영화다. 간판도 사람이 그릴 땐데 200일 가까이 장기 상영하다 보니 간판의 색이 바래 덧칠을 할 정도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전국에 복합상영관이 널려 있어 같은 영화가 칠팔백 개 극장에서 걸리는 요즘 상황과는 비길 수 없는 때다. 그 시절의 백만이라면 요즘 같으면 거의 천만으로 환산해도 좋을 숫자가 아닐까 싶다. 그만한 관객이 들었다는 것은 영화의 호소력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이겠다.

 

나는 정작 영화관에서 <서편제>를 보지 못했다. 간다 간다 하다가 결국 비디오를 빌려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내와 함께 영화 중간쯤에서부터 울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이 어릴 땐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눈물 바람을 하는 어미 아비를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하게 쳐다보던 아이들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영화가 환기하는 ‘한’, 관객의 ‘눈물’

 

주변에는 <서편제>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배 교사 두 분은 영화를 보면서 돌아앉아 우느라 혼이 났다고 했고 그예 눈이 퉁퉁 부어 극장을 나섰다던가. 온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한 영화로 치면 6·70년대의 멜로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이 있지만 <서편제>가 촉발한 슬픔은 그것과 성격이 다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 모자간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전형적 멜로드라마로 모성애에서 비롯한 슬픔을 다루고 있다면 <서편제>가 환기한 슬픔은 훨씬 더 본질적이고 원형적이다. 그것은 ‘한(恨)’이라는 민족적 정서와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담긴 주인공들의 삶과 사랑, 소리에 대한 집념과 한은, 개인적 공감을 넘어 민족적 보편성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서편제>에 대한 공감이 전 연령대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서편제>를 보고 난 며칠 후,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여제자가 집에 들렀다. 어땠냐고 묻는 우리 내외에게 그 애는 심상하게 대답했다.

 

“영화, 어땠어? 울었니?”
“아니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대목이 있긴 했지만…….”

 

예기치 않은 반응에 대해서 우리 내외는 이구동성으로 받았다.

 

“나중에 나이 먹어 봐라.”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던 그 제자에게 <서편제> 주인공들의 삶과 한은 좀 멀고 낯설지 않았을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공감의 변수가 ‘삶에 대한 이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주인공들의 곡절 많은 삶에서 드러나는 애환 속에 깊숙이 자리한 ‘한’을 이해하기에 제자는 너무 젊었다.

 

나는 18년 전의 경험을 들며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고 울기에는 너희도 아직 어리다고 말해 주었다. 고통과 절망이 뒤섞인 삶의 심연을 바라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한’이란 멀고 낯선 감정이다. 영화가 슬퍼서 우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영화가 일깨워 주는 우리 자신의 슬픔과 서러움 때문이다…….

▲ 18년 만에 나는 새삼 여배우 오정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이해했다.
▲ 길 가다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는 주인공들. 이 장면에서부터 우리 내외는 울기 시작했다.
▲ 소리 수련을 하는 유봉과 송화. 수련의 아픔과 어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 눈이 멀어버린 송화. 노을을 바라보면서 나누는 부녀의 대화는 슬프다.
▲ 떠돌이 소리꾼의 겨울.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삶은 지속된다.
▲ 재회한 오누이는 밤새 '춘향가'를 나누며 그들의 한과 신산한 삶을 풀어낸다.
▲어린 딸을 앞세우고 다시 길을 떠나는 송화 . 떠돌이의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

아이들에게 <서편제>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예전과 달리 영화의 속살까지 엿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무심히 바라보았던 사람과 삶을, 나는 훨씬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김명곤과 오정해를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들의 미세한 표정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허허롭게 받아들였다.

 

18년 전에는 무심히 넘겨버린 장면들과 이른바 ‘미장센(mise en scène)’의 의미들이 애매하게나마 다가옴을 느꼈다. 주인공들의 삶이 감추고 있는 온갖 결들이 조금씩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분노로 몸을 떨어도 시원찮을 삶의 곡절을 나는 쉽사리 이해했고 새롭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못할 ‘삶의 곡절’이 어디 있는가

 

아들이 떠나자 딸마저 자기 곁을 떠날까 봐, 혹은 한을 품고 내는 소리가 기막히다는 무지막지한 신념으로 딸에게 눈머는 약을 먹인 아비도, 그 약을 먹고 눈을 잃고서도 아비를 용서하는 딸도 나는 이해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아비와 자식들이 보여주는 강고한 가족의 유대를 나는 이해했다. 오랜 세월의 기다림과 그리움 끝에 만난 두 오누이가 심청가를 함께 나누며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모른 척 헤어지는 까닭도, 의탁한 주막에서 다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여인의 운명도 나는 이해했다.

 

삶은 때로 그 진부한 정형성만큼이나 부정형적이기도 하다. 예기치 않은, 혹은 기대를 전혀 배반하지 않는 길로 이어지는 삶은 낯설면서도 진부하다. 그리고 그것을 무심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니었던가.

 

앞세운 어린 딸이 끄는 줄을 잡고 다시 길을 떠나는 송화의 앞에 하얗게 펼쳐진 눈길 위에 엔드크레디트가 떠오른다. 그 막막한 길을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쩌지 못한다. 세월이 가도 명작은 남는다. 18년 만에 다시 만난 <서편제>를 나는 시방 그렇게 다시 새기고 있다.

 

 

2011. 11.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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