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에서 ‘더빙’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7월 31일, 성우 박일(1946~2019) 씨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9월 2일에는 성우 이완호(1938~2019) 씨가 8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두 분 다 50년 이상 방송에서 목소리로 시청자(청취자)들을 울리고 웃긴 위대한 연기자다.
박일은 1970년대 이래 텔레비전 외화 더빙에서 늘 주역을 맡았던 인기 성우였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한 제임스 본드 역을 비롯하여 <대부>의 말론 브랜도, <사선에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로버트 레드퍼드, <히트>의 알 파치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가까이는 <CSI 과학수사대>에서 길 그리섬 반장 역을 맡았었다.
이완호 성우는 ‘동물의 왕국’(KBS)의 해설자 말고는 내게 특별히 기억 나는 영화가 떠오르지 않는데, 그는 주로 활동한 시기가 1990년대 이후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양들의 침묵>에서 앤서니 홉킨스, <어 퓨 굿 맨>의 잭 니컬슨,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진 해커만, <지옥의 묵시록>의 로버트 듀발, <쉰들러 리스트>의 벤 킹즐리, <스타워즈> 연작의 이언 맥더미드의 목소리를 연기한 것이다. 모두 내가 더빙으로 보지 못한 작품이다.
두 원로 성우의 삶과 연기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외부세계를 만나고, 다양한 서사의 세계를 학습했던 청취자, 시청자들의 성장을 도왔다. 이 얼굴 없는 연기자들은 목소리로써 인물의 삶과 의지를 재현해 주었던 미디어 시대의 숨은 공로자였다고 할 수 있다. 두 분의 영면을 빈다.
2019. 9. 7. 낮달
어저께 <한겨레신문>에 “더빙 사라지는 TV…목소리 움츠러든 성우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KBS> 2TV에서 외화 ‘셜록’ 시즌 2를 더빙이 아닌 자막으로 방영하게 되면서 “외화 주인공의 개성을 살려주는 목소리로 사랑받던 성우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기사는 성우들의 입지가 10년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2000년대부터 케이블 채널들이 자막으로 외화를 내보내기 시작하고 시청자들이 불법 내려받기한 ‘미드(미국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부터다. <KBS> 2TV의 ‘토요명화’(2007)나 <MBC>의 ‘주말의 명화’(2010)가 폐지되고 어린이 영화 더빙도 성우들 대신 연예 스타가 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TV에서 ‘더빙’이 사라져 간다!
<KBS> 2TV뿐만이 아니다. <MBC>가 외화 ‘시에스아이(CSI)’를 없애면서 이 드라마를 더빙하던 성우들 일감도 사라졌다. <SBS>는 방송중인 외화 시리즈가 없다. 당연히 성우들의 입지가 시나브로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우(聲優)는 말 그대로 ‘목소리 광대’다.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70년대 이전, 라디오가 유일무이한 대중매체였던 시기가 아마 성우들의 전성시대였을 성싶다. 고은정이나 남성우, 이창환 같은 성우들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요즘 여성들의 선망의 적이 된 아나운서조차도 이들 라디오 성우들의 격에 미치지 못했을 정도였다니 말이다.
시청자들에게서 상상력을 간단히 빼앗아가 버리는 시청각 매체 텔레비전과 달리 라디오는 ‘목소리’ 연기를 통해 청취자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주인공들을 만들어간다. 그것은 라디오가 가진, 한 세대 이전의 낡은 매체라는 핸디캡을 단번에 뛰어넘는 강점이다.
특히 외화 더빙은 배우가 가진 기왕의 개성적 캐릭터에다 성우의 목소리가 환기해 주는 새로운 성격을 창조하는 경우다. 코 큰 서양 배우가 우리말을 그렇게 능란하게 할 리가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그가 구사하는 대사에 우리는 홀린 듯 이끌린다. 클라크 게이블의 넘치는 남성적 매력에 성우 유강진의 목소리는 날개를 달아주면서 새로운 성격을 더해 준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의 성장기는 바로 그들 외화의 배우들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해 낸 성우들이 연출해 낸 장엄한 서사의 세계와 맞물려 있다. 우리는 다만 텔레비전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만날 수 있었고 그 허구의 서사를 통해서 세상을 배워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떠나온 고향 집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들어온 때가 1970년대 초반이다. 상표는 ‘골드스타’, 금성사 제품이었는데 네발 달린 나무 케이스에 든 놈의 모습은 대단했다. 사랑방에 비치된 녀석은 여름이면 저녁마다 동네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평상에 둘러앉은 동네사람들 앞에 수상기 케이스의 문을 좌우를 열어젖히면 뿌연 흑백 모니터가 나타났다. 거기서 펼쳐지는 다른 세상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그것이 장차 우리가 편입될 세상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거기서 이른바 ‘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통기타 가수’들을 만났고 그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노랫말의 포크 송을 배웠다.
그 시기의 텔레비전에서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우리를 사회화시킨 것은 두 개의 채널에서 주말 심야에 방영되던 외화였다. <KBS>의 ‘명화극장’과 <MBC>의 ‘주말의 영화’가 그것인데, 마침맞게 그것들은 토요일과 일요일로 나누어 방송되었으므로 우리는 영화 선택을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칙칙한 흑백의 화면이었지만 우리는 그 시절의 고전 영화 대부분을 거기서 감상할 수 있었다. <벤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콰이강의 다리>, <카사블랑카>와 <젊은이의 양지>, <로마의 휴일>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따위의 고전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이를테면 서구의 ‘현대’를 수혈받은 것이다.
찰턴 헤스턴과 말론 브랜도, 비비언 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헵번과 그레이스 켈리, 험프리 보가트와 게리 쿠퍼, 메릴린 먼로와 잉그리드 버그만, 율 브리너와 앤서니 퀸 같은 전 시대, 혹은 당대의 명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교양목록을 더해갔다.
더빙, 목소리로 성격을 ‘재창조’하다
세로쓰기의 자막이 펼쳐지던 영화관 상영 외화와 달리 이들 외화는 더빙(dubbing) 작업을 거쳐 우리말로 방영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자막을 읽느라 집중력을 분산시키지 않고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더빙 작업에 참여한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에 힘입어 이 명배우들의 성격은 한층 새롭게 창조되기도 했다.
외화 더빙에 참여한 성우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떠오르는 이는 유강진과 이선영이다. 두 사람은 한국인으로서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만한 독특한 억양과 음역이 있는 이다. 나는 이들 목소리의 결이 가진 이국적인 감성과 이미지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로 클라크 게이블과 숀 코너리의 목소리를 더빙한 유강진은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굵직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래트 버틀러 역(클라크 게이블), ‘벤허’와 ‘십계’의 찰턴 헤스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게리 쿠퍼, ‘닥터 지바고’의 오마 샤리프를 연기한 그는 원작의 배우보다 더 선명한 이미지를 연출해 준 연기자였다.
이선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루스, ‘장미의 전쟁’에서 캐서린 터너, ‘졸업’에서 앤 뱅크로프트, ‘파리는 안개에 젖어’에서 페이 더너웨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에서 잉그리드 버그만, ‘로렌조 오일’에서 수잔 서랜던 등을 연기했는데, 개인적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캐서린 터너와 수잔 서랜던의 이미지와 가장 부합하지 않나 생각한다.
성우 장유진은 ‘애수’의 비비언 리, ‘디어 헌터’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에서의 메릴 스트리프 등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그이는 다소 앙칼진 듯한 여운을 남기는 미성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했던 것 같다. 감기약 광고로 유명한 ‘감기 조심하세요’에 드러나는 그 목소리의 매력은 여전해 보인다.
외화의 더빙이 해를 더해가면서 배우마다 그 목소리를 담당했던 전문 성우들이 정해졌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앤서니 퀸의 목소리는 이치우 또는 김기현이 맡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치우의 어눌한 목소리가 훨씬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대머리로 유명한 율 브리너 역은 박상일, 진 해커만은 황일청, 로버트 레드포드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론 브랜도는 박일이 주로 맡았던 것 같다. 요즘이야 주인공이 미남에다 목소리까지 근사할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용모와 목소리의 조화는 필수적이었다. 당연히 이들 멋진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주연급의 연기를 도맡을 수밖에.
목소리 연기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이는 ‘형사 콜롬보(Columbo)’에서 활약한 최응찬(1941~1984)이다. 헝클어진 머리, 매다만 넥타이, 낡은 트렌치코트 등의 외양부터 파격적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맡은 최응찬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상대를 얼러대면서 문제의 변죽을 울리다 단박에 핵심을 찔러대는 가늘고 높은 목소리는 시청자에게 통쾌한 반전의 묘미를 선사했다.
‘형사 콜롬보’는 여느 수사극과는 달리 범행의 전모를 보여준 뒤 전개된다. 그리고 콜롬보가 어떻게 범인을 찾는지, 즉 ‘추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차별화된 형식을 취했다. 공전의 인기를 끌면서 미국에서의 방영기간만 20년이었다는 이 수사 시리즈는 1984년 최응찬이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굳바이 콜롬보’라는 제목으로 앙코르 방송이 되기도 했다.
최응찬의 사후 콜롬보역은 배한성이 이어받아 최응찬과 다른 새로운 성격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배한성의 코맹맹이 소리는 인물을 필요 이상으로 희화화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나는 최응찬의 콜롬보를 훨씬 선호하는 편이다.
추억의 미니시리즈와 인기 성우들
TV 시리즈의 목소리 연기로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방영된 ‘엑스파일 (X-File)’이 있다. FBI 요원 멀더와 스컬리가 ‘엑스 파일’이라는 초자연적 현상, 괴물, 유령,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해결 사건 등을 수사하면서 겪는 일을 다룬 이 TV 시리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숱한 마니아층을 확보했다.
멀더 요원 역은 이규화가, 스컬리 역은 서혜정이 맡았는데 둘은 마치 데이빗 듀코프니와 질리언 앤더슨을 빙의한 것처럼 보일 만큼 배역을 깔끔하게 소화했다. 이 시리즈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혜정은 2000년대 후반 한 케이블 방송에서 내보낸 ‘남녀탐구생활’의 해설자로 폭발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양지운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2차대전 당시 유럽을 배경으로 한 미군 보병소대의 활약상을 그린 ‘전투(Combat)’(KBS)라는 미니시리즈가 방영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다. 양지운은 이 드라마에서 빅 모로우가 맡은 샌더스 중사 역으로 열연했다.
미국적 관점을 유지했지만, 전쟁의 비정성과 휴머니티를 양념처럼 깔고 있어 다소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다. 양지운은 그런 작품의 성격에 걸맞은 샌더스 중사를 훌륭하게 재창조했다. 허스키하면서도 배한성의 그것과는 다른 양지운의 음성이 환기하는 것은 도전에 맞서는 강렬한 남성성이었기 때문이다.
TV 시리즈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작품으로는 어윈 쇼 원작의 ‘야망의 계절(Rich man, Poor man)’이 있었다. 1970년대에 이미 <동양방송(TBC)>에서 방영했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 지방에서는 <TBC>를 볼 수 없었다. 아마 우리가 그 드라마를 보게 된 것은 80년대 <TBC>를 흡수한 <KBS>2TV를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한 가문의 형제간 애증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립과 갈등, 그 극적 인생유전을 다룬 이 드라마는 후일, 김수현이 쓴 <야망의 세월>이라는 한국판 드라마를 낳기도 했다. 피터 슈트라우스가 열연한 루디 조다쉬역을 맡은 성우 배한성도 드라마 못잖은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70~80년대 이래 외화는 꾸준히 우리네 안방에 공급되었다. 숱한 작품들이 명멸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70년대 <KBS>가 방영한 ‘월턴네 사람들(The Waltons)’이다. 이 작품은 버지니아주의 작은 산골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3대에 걸친 월턴네 대가족의 소박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드라마다.
무려 10여 년간 방영되었던 이 추억의 드라마는 작가가 꿈이었던 큰아들 존이 쓰는 일기 형식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런 드라마의 포맷이 마음에 들었다. 극적 갈등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삶의 결이 아주 잔잔하게 마음에 고요한 파문을 던지는 그런 드라마였다.
8남매의 맏이로 아버지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피는 장남 존 보이는 70년대 미국 어린이의 ‘역할모델’이었다고 하니 이 드라마가 받았던 대중의 지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미국과 같은 인기를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매회 에피소드는 존이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로 끝난다. 월턴네 집 창문마다 하나둘 불이 꺼지면 저녁 인사를 나누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아롱진다. 그것은 매회 완결되는 드라마와 달리 월턴네 가족의 삶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우리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30년도 더 전의 옛일이어서 월턴네 가족들의 더빙을 담당한 이들이 누구였던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너그러운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 상징되는 가족들의 따뜻한 유대와 결속이 성우들의 목소리에 실려 가부장제의 심연을 지나던 1970년대의 한국의 안방을 채웠던 것은 분명하다.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우리 세대는 여전히 자막보다는 더빙을 선호한다. 더빙이 사라지고 자막으로 가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성우들의 생존권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더빙 대신 자막으로 가는 것은 ‘모국어 보호’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무심히 들을 내용은 아니다. 다행히 자막 논란에 대해 <KBS>는 이후 방송될 외화는 성우 더빙으로 간다고 밝혔다고 한다.
세상은 변했다. 더는 젊은이들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문화를 누리지 않는다. 대신 실시간 쌍방향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노닌다. 거기서 최신영화를 만나고 더빙 대신 자막을 읽으면서 배우의 육성을 귀로 듣는다. 어쩌면 그게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훨씬 사실적인 영화감상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흑백텔레비전을 통해서 오래된 외화를 만나고, 배우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귀에 익은 성우들의 정제된 음성으로 그들의 삶을 재구성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를. 그것이 비록 한갓진 추억의 한 장면에 그칠지라도 그것이 우리들 아날로그 세대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이었다는 걸.
인터넷에 떠 있는 오래된 고전영화의 포스터를 무심히 바라본다. 지상파 방송사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영화 프로그램의 ‘명화극장’은 이제 일요일 심야에서 금요일 오전 0시 이후로 방송 시간대가 바뀌었다. 이 글을 쓰면서야 간신히 그걸 확인한다. 그게 오늘날 ‘명화극장’의 현주소인지 모른다.
컴퓨터를 종료하는데 문득 귀에 익은 오프닝 사운드가 천천히 귓전을 두드린다. ‘명화극장’과 ‘주말의 명화’에서 만났던 메트로 골든 메이어(MGM) 사의 그 유명한 오프닝이다. MGM 엠블럼의 리본 안에 든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 20세기 폭스사의 장엄한 행진곡 풍의 오프닝도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2013. 3. 27. 낮달
* 결국, KBS의 ‘명화극장’은 2014년 12월에 폐지되었다. 지금 남은 텔레비전 외화 프로그램은 <교육방송(EBS)>의 ‘세계의 명화’(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새벽 01:00~)와 ‘일요 시네마’( 일요일 낮 13:10)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들도 더빙 대신 자막으로만 제작하고 있다.
'이 풍진 세상에 >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뮤직 박스(Music Box)>, 세상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0) | 2019.09.18 |
---|---|
세월은 가도 명작은 남는다 (0) | 2019.09.14 |
영화 <암살>, 혹은 역사에 대한 성찰 (0) | 2019.04.05 |
‘문숙’,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사람들 (0) | 2019.01.13 |
배우의 힘, 최민식의 <파이란> (0) | 2018.12.20 |
댓글